작가는 '밤에만 읽어'주길 바랬지만, 난 아침에도 읽고 낮에도 읽고, 저녁에도 읽었다. 밤에만은 읽지를 못했다. 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읽는 내내 사랑얘기를 쓰고 싶다던(치정얘기를 쓰고 싶다고 했던가?) 김훈이 소설을 썼다면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다시 한번, 나는 이런 격정적 감정이 휘몰아치는 이야기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소설은 삼각관계의 얘기를 기본으로 삼았다. 70이 가까운 시인과 그의 40대 제자,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들어온 여고생. 시인이 자기가 죽은 지 1년 후에 공개하라고 유언한 노트와 제자가 남긴  일기가 교차서술되는데, 일어난 같은 사건을 두고 두 사람이 다르게 받아들이며 사건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거기에 이제는 대학생이 된 그 여고생, 은교의 애매모호한 진술이 언뜻언뜻 끼어들며 이야기는 세 사람이 각자 품었던 갈망의 어긋남을 보여준다. 삼각관계의 흔하디 흔한, 그렇고 그런 얘기로 빠지는 걸 가까스로 막아준 것은 아마도 늙어감과 젊다는 것, 죽음을 가까이 보는 것과 아직은 아득한 것 사이의 긴장을 원숙하게 숙고할 줄 아는 작가의 세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 은교의 것만은 진술이 없다, 소설 구도상 은교까지 진술할 몫을 가진다면 뻣뻣해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보다는 70이 다 되어도 대상은 대상일 뿐, 그런 '자리'를 차지한 여자를 진술할 수는 없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박범신의 다른 소설을 본 적이 없어서 자신할 수는 없다.  

 

 

 

 

 

 

 

한겨레21에 실린 임옥희 씨의 글은 이 시대에 [은교]를 보는 또 다른 관점을 보태주는 듯하다.  

'왜 일흔 남자에게 열일곱 소녀가 필요한가 - 저물녘의 황홀, 불멸의 환상이 없는 노령화 시대가 맞이한 사랑의 정치경제학(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23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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