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인 땅, 유럽에서 온 중년의 기자, 현지에서 사랑하게 된 여인, 젊고 '순수'한 미국인 남자 간의 삼각관계. 간추려본 뼈대로만 보자면 이런 얘기를 다룬 소설, 영화, 연극 등의 예를 한트럭 들 수 있을 것이다. 명작, 고전이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어떤 점들이 충족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원서를  학생들이 직역 숙제해 놓은 듯이 번역해 놓은 책으로 읽은 터여서, 좋은 번역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변덕스럽기가 죽끓듯해서 애초 읽으려고 가까이에 둔 책들보다 꼭 애먼 과욋 책들이 더 눈에 들어오고야 만다. 정서불안아닌가?   

점점 기억력도 떨어지다보니, 분명 어디선가 이 책, 그레엄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에 대한 글을 읽고 도서관에서 대출했던 것인데, 어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거의 3주 만에 겨우 읽었다, 막상, 맘 잡고 읽으면 ... 금방인데.  

도서관에 있는 책은 1991년 출판사 '대성'에서 나온 책이다. 한마디로 ... 번역이 좋지 않다. 

2004년 돛대라는 출판사에서 1,2 권으로 나온 책이 있는 모양인데, 알라딘에서는 찾을 수 없고, 원서로는 검색이 된다.   

 

 

 

 

 

 

 

페이퍼백이긴 하지만 515페이지에 이르는 책인데, 내가 읽은 책은 널널한 본문 형태로 304페이지 정도였다. 책 읽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읽은 책으로는 간신히 내용을 간추릴 정도고, 대략적인 정서, 느낌을 애써 얻었다. 내가 그레엄 그린에 대해 아는 거라곤, 영화 <제3의 사나이> 원작자라는 것 정도. 고전에 속하는 영화라 다소 졸렸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장면이야 워낙 유명하고, 어쩌면, [조용한 미국인]의 느낌과도 통할 것이다.  

검색해보니, 참고해볼만한 논문이나 리뷰는 국회도서관 자료를 찾아 읽어보면 될 것 같고, 2004년 다시 만들어진 영화에 대한 글이 있어 스크랩 해둔다.

씨네21(2004.5)  짐 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빌리지 보이스>

낡은 향취에 젖은 ‘조용한 미국인’, <콰이어트 아메리칸>  

자유 진영의 주도권을 둘러싼 오래된 싸움을 묘사하다 


보들레르가 저 유명한 <파리의 우울>에서 “삶은 순진한 악마들로 넘쳐나는 것이니”라고 통찰한 바 있듯이, 그레이엄 그린의 1955년작 동명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필립 노이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 <콰이어트 아메리칸>은 이 “무고함”이라는 가치에 정치적, 혹은 (제목이 암시하듯) 민족적 측면을 두드러지게 부각하고 있다(원작소설은 이미 1958년에 한 차례 영화화된 바 있다).

영화는 프랑스가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패퇴하기 2년 전 식민지 시대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영화의 주요 내용은 순종적인 여인 퐁(그녀는 파울러의 정부이다)을 차지하기 위해 매사에 냉소적인 영국인 기자 파울러(마이클 케인)와 못 말리는 미국인 인도주의자 파일(브랜든 프레이저)이 벌이는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독 노이스가 멋대로 꾸며내고 프레이저가 뻔뻔스러울 정도로 깊이없이 연기한 주인공 파일은 “의도하지 않은 인과의 법칙”을 인격화하고 있는데, 이 짧은 머리의 정글 보이는 야구 모자를 쓰고 애완견에 끌려다니는 어느 미국 대통령처럼 애매하기 그지없는 인도주의적 임무를 수행하며 영화의 줄거리를 힘겹게 끌고 나간다. 이 열렬한 미국인이 만찬을 마친 뒤 퐁과 춤을 추기 위해 어설프게 그녀를 리드하려는 모습에서처럼 바보들은 언제나 허겁지겁하게 마련이다. 퐁을 얻기 위한 두 사내의 경쟁은 베트남의 영혼, 혹은 자유 진영 안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에 다름 아닌데, 이 멍청한 이상주의자는 파울러의 연인을 빼앗으려는 것과 더불어 불한당 같은 월맹군 장군 티에를 공산 반군과 프랑스 식민주의자들 사이의 “제3의 힘”으로 간주하고 지지하기까지 한다.

9·11 사건의 여파로 배급사인 미라맥스로부터 버림받아 창고로 직행했다가 1년 뒤 토론토영화제에서 마이클 케인의 탁월한 연기가 각광받으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된 영화 <콰이어트 아메리칸>은 역사적 사례에 기반한 텍스트를 영화화한 가장 최근의 사례라고 하겠다.
원작자 그린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자신의 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는데, 책 속의 몇몇 인물과 사건은 실제 인물과 사건에서 차용해왔고(예를 들면 티에 장군의 존재나 1952년에 그를 향해 행해진 차량폭파 사건 등) 미국인 주인공 역시 남부 베트남 정권에 미국이 개입할 수 있도록 공작을 펼쳤던 CIA의 기린아 에드워드 G. 랜스데일을 모델로 한 것임에 틀림없다.

원작자 그린의 퉁명스러운 공식대로라면 “순진무고함이란 갈피를 잃고 세상을 헤매며 해라고는 끼치지 않는 바보 문둥이와 같은 것”인데, 상당히 반미국적인 성향을 보여준 원작은 당시 미국 내에서 비난을 야기했었다. 때문인지 뒤이어 <코멘터리>(Commentary)를 통해 이루어진 세련된 좌파 자유주의자 필립 라브와 흥분한 초기 네오-콘 다니엘 트릴링 사이의 격론은 지금 돌이켜보면 매우 현재적인 느낌마저 준다. <콰이어트 아메리칸>은 더도 덜도 아닌 당대의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50년대 페이퍼백 판의 커버는 “많은 미국인들이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것이 전세계가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라고 적고 있고, 당대의 할리우드 작가-감독이었던 조셉 L. 맨케비츠가 각색해 영화화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오늘날 돌이켜보면 <콰이어트 아메리칸>의 첫 번째 영화 버전은(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호치민에서 촬영되었다) 수다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이하게 심각한 내용이었다. 가히 수정주의적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인데, 앞서 언급한 CIA 요원 랜스데일에게 대본에 대해 자문을 얻고 영화를 당시의 남부 베트남 정권에 헌사하기까지 했던 맨케비츠 감독은 원작자 그린의 입장을 뒤집어 자신이 “세상에 만연한 반미주의와 공상주의와의 밀월관계에 반대한다”라고 회견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 영화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오디 머피가 연기한 파일은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편의주의도 당시에 영화의 상업적, 비평적 성공에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비평적 옹호자는 젊은 고다르였고, 그는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영화 <콰이어트 아메리칸>이 그린의 원작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추켜세우며 자신의 1958년 베스트 10 리스트에 해당 작품을 올려놓았었다(과연 10여년 뒤 베트남전을 통해 그린의 소설이 미국 베트남 종군기자들의 필독서가 된 시점에서도 고다르가 그토록 열렬히 맨케비츠의 작품을 옹호할 수 있었을까?)  

“이 훌륭한 각본으로 오슨 웰스나 로버트 알드리치가 영화를 만들었다면 얼마나 대단한 영화가 나왔을까?”라고 고다르는 적고 있지만, 노이스 감독의 이번 <콰이어트 아메리칸> 역시 그다지 훌륭한 작품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크리스토퍼 도일이 촬영한) 이번 리메이크는 이전 작품에 비해 좀더 많은 액션과 로맨스 등을 보여주고 있고(지금의 100분인 상영시간보다 훨씬 길었을 원래의 편집시간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는 급작스러운 내용상의 전계에도 불구하고) 내용상 좀더 일관성 있어 보이지만 여전히 낡은 향취와 분위기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 케인의 성찰적인 연기는 영화의 전체적인 톤을 설정해주는데, 영화 속에서 액션의 종결부는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미국이 베트남에 전면 개입하게 되는 1965년의 헤드라인들을 몽타주한 장면인 셈이다. 짧게 말해서, 새로 만들어진 <콰이어트 아메리칸>은 그린의 원작소설에 충실할 뿐 아니라,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이 소설이 진실되게 보이게끔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씨네21(2004. 4) 김도훈

사랑은 떠나고 전쟁의 기운은 그의 세상을 흔드네,  

<콰이어트 아메리칸>

 아름다운 프랑스 식민치하의 사이공, 늙고 냉소적인 영국인은 ‘조용한 미국인’을 만난다. 사랑은 떠나가고 전쟁의 기운은 그의 세상을 흔들기 시작한다 

베트남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전쟁은 죽음을 낳고, 사랑을 낳으며,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낳는다.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을 영화화한 <콰이어트 아메리칸>은 베트남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이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고, 정치적 음모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언제나 그렇듯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쟁의 징후들이 유령처럼 맴돌던 프랑스 식민치하의 베트남, 1952년의 사이공, <런던타임스>의 특파원인 토마스 파울러는 전쟁의 기운에 대해 “나는 아무런 의견도 없다. 나는 행동하지 않는다. 나는 말려들지 않는다. 나는 그저 기자일 뿐이다”라고 독백한다. 젊고 아름다운 베트남 여인 ‘풍’과 사랑에 빠진 늙은 영국인 유부남에게 독립과 이데올로기 정쟁으로 가득 찬 베트남 민중의 삶은 그저 관망의 대상일 뿐이다. 그 평화로운 파울러(마이클 케인)의 일상은 미국인 파일(브랜든 프레이저)이 그들 앞에 나타나면서 금이 가기 시작한다. 활달하고 매력적인 미국 젊은이는 파울러의 연인인 퐁(두 띠 하이 엔)과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긴 영국 늙은이는 무너져내린다. 개인적인 사랑의 종말은 베트남 전쟁의 전운과 맞물려가고, 파울러의 눈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사랑에 실패한 늙은이는 그제야 그가 사랑했던 것이 연인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베트남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깨닫는다. ‘조용한 미국인’이라는 제목의 함의가 열리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조용한 미국인이란 없다. 조용조용 프랑스 식민지하의 베트남에 들어온 상냥한 미국인들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베트남은 ‘시끄러운’ 전장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었으니까.  


<패트리어트 게임> <긴급명령> 등의 몸에 맞지 않는 할리우드 액션영화들로 재능을 낭비하던 호주감독 필립 노이스가 이 소설을 손에 넣은 곳은 우연히 휴가차 방문한 베트남의 호치민시였다. 그는 이 책에서 흥미진진한 가능성을 보았다. 1955년, 베트남전이 일어나기도 이전에 쓰여진 <조용한 미국인>은 수십년 동안 미국인의 트라우마가 될 베트남 전쟁의 기운을 예언하고 있었고, 거기에 현대인의 도덕적, 종교적 갈등에서 야기되는 내적 혼란을 역사 속에 삽입하는 그레이엄 그린의 장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레이엄 그린 소설의 진수들을 촘촘하게 제대로 배치했다. 영국인 기자 파울러는 그레이엄 그린 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이다. 그는 영국인으로서의 냉정한 태도와 세계관을 벗어던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혼해주지 않는 영국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 아내, 자신과는 다르게 활달하고 직접적인 세계관을 지닌 미국인 젊은이, 두 인물은 젊은 베트남 연인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지 못하는 늙은 영국인의 종교적, 정치적인 갈등을 상징한다. 영화가 천천히 진행되면서 관객은 개인과 세계의 관계가 뒤얽히는 무대 속으로 파울러의 목소리를 따라 조용히 이끌려간다. 영화를 관통하는 관조적인 목소리는 그린의 원작마저 살짝 뛰어넘는 지적인 우아함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통속적인 스릴러의 형식과 흥미롭게 만난다.
 

사실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들은 영화화하기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 닐 조던의 <애수>는 그레이엄 그린의 원작이 지닌 힘을 스크린에 옮기면서 잃어버린 예다. 필립 노이스는 <위험한 관계>를 각색했던 작가 크리스토퍼 햄튼의 힘있는 각색으로 그 한계를 넘어선다. 크리스토퍼 햄튼은 <조용한 미국인>을 각색하면서 “그레이엄 소설의 각색이 힘든 이유는 소설로 봤을 때는 그것이 너무도 명확하고 쉬워 보인다는 점이다. 그레이엄이 주로 사용하는 내레이션을, 영화 속에서 캐릭터에게 독립적인 스토리를 줌으로서 내러티브로 풀어나가는 것이 가장 어렵다”라고 이야기했다. 결과물을 놓고 보았을 때 그 모든 것은 아름답고 조화롭게 구현되었다.  

영화의 또 다른 공로자는 촬영을 맡은 크리스토퍼 도일이다. 그는 습하고 끈적끈적한 베트남의 공기를 카메라에 그대로 묘사해낸다. 그의 카메라가 담아내는 사이공은 때때로 황홀할 만큼의 쓸쓸한 아름다움이 드리워져 있다. 그 유려한 카메라의 시선에서 오리엔탈리즘에의 의심을 지울 수 있는 것은 다만 그가 왕가위를 비롯한 많은 아시아 감독들과 작업해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그레이엄 그린 자신이 캐스팅했더라도 부족했을, 더없이 잘 캐스팅된 배우들에 의해 생생한 인간미를 부여받았다.  

<미이라>의 브랜든 프레이저는 <갓 앤 몬스터> 이후 가장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고, 마이클 케인의 연기는 ‘아름답다’는 칭송이 필요할 정도다. 마이클 케인은 감독 필립 노이스가 영화에 끼친 영향력 그 이상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드리운다. 젊은 여인을 빼앗긴 노쇠하고 지치고 냉소적인,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불안을 목도하는 영국인 기자 역은 마이클 케인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특히나 깊은 울림을 지닌 그의 목소리가 영화 전체의 내레이션으로 깔리면, ‘캐릭터 내부와 외부의 혼란과 갈등이 뒤섞임’을 표현하는 소설만이 가능할 어법까지 그대로 마술처럼 스크린에 재현된다. 이 작품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그가 상을 놓친 것은 진심으로 아쉬운 일이다.

많은 장점들을 풍요롭게 지니고 있는 <콰이어트 아메리칸>은 쉽게 우리를 찾아오는 그런 종류의 영화가 아니다.
캐롤 리드 감독, 오슨 웰스 주연의 <제3의 사나이> 이후 그레이엄 그린 작품을 이처럼 제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작품도 흔치 않았다.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없이 아시아를 담는 <콰이어트 아메리칸>의 정갈하고 관조적인 정치적, 개인적 시선과 그것을 담아내는 맛깔스런 스릴러와 로맨스의 힘은 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꽤나 수난을 겪어왔다. <콰이어트 아메리칸>은 베트남전에서 미국인들이 벌인 정치적 술수들을 다루었다는 이유로 개봉이 9·11 이후로 한없이 연기된 적이 있다.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소설 <조용한 미국인>은 조셉 맨케비치 감독에 의해 58년에 이미 한번 영화화된 적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미국인을 애국자로, 영국인 기자를 악한으로 묘사하면서 소설을 완벽하게 모독했었다. 다행히도 그레이엄 그린은 필립 노이스의 <콰이어트 아메리칸>으로 그 굴욕적인 작품모독을 저승에서나마 잊어도 될 듯하다. 그러고보니 미국에서의 수난만이 문제는 아니다. 이 영화는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하기 위해 잠시 동안만 국내 개봉을 하게 된다. 한국영화 1천만 시대에 박수치고 감격하는 관객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면, <콰이어트 아메리칸> 같은 훌륭한 외화들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급속하게 사라져가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이다. 

기사에 덧붙여진 그레이엄 그린에 대한 소개글이다.  

1904년 영국 허트포오드셔주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 뒤 <런던타임스>의 편집자로 활약했고 주간신문인 <스펙테이터>에서 영화비평을 쓰기도 했다.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1926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과 종교적 신념에 대한 심리적 딜레마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의 작품들의 특징은 이같은 그의 경험들에서 나온 것이다. 처녀작 <내부의 나>로 문단에 데뷔했고 <권력과 욕망> <사건의 핵심> <사랑의 종말> 등의 작품들을 통해 20세기의 주요 작가 반열에 올랐다. 언급된 작품들을 통해 그는 가톨릭 교도인 주인공이 겪는 내부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혼란과 인간 외부의 고통을 치유하는 초월적인 신앙의 문제를 묘사해냈고 이러한 일관된 주제의식 때문에 ‘종교적 작가’라는 이름이 붙기도 한다. 그는 장편소설을 ‘노블’(Novel)과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로 구분하였고, 후자로 스스로 분류한 <이바나의 우리 공작원> <권총을 팝니다> <제3의 사나이> <조용한 미국인> 등의 작품들을 써냈다. 하지만 그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엔터테인먼트’로 구분된 그의 정치적 스릴러들에서도 그 일관된 주제의식이 분명히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파리대왕>의 윌리엄 골딩은 91년 그레이엄 그린이 사망했을 때 “독자들은 20세기 인간의 정신과 불안의 궁극적인 기록자로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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