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대 작가들의 소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동안 소설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던 관계로 이쪽 세계를 전혀 모른다. 서사를 주의깊게 보려한다. 어떻게 얘기를 풀어가는지 그 방식에 관심 있다.   

코맥 매카시, 필립 로스, 토머스 핀천과 함께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로 꼽힌다는 돈 드릴로의 소설 [화이트노이즈]는 한 마디로 재밌다. 1985년 발표작이다.

 

 

 

 

 

   

 

소설은 좀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할듯 한데, 내 처지도 그렇고, 성격이 느긋하지도 못한터라(단,체력이 찌질할 뿐) 진짜, 좀 후다닥 읽는다. 그래서 오래 기억에 안남는 건가?... 뭐, 어쨌든.  

옮긴이 강미숙의 약 10여 페이지에 이르는 '옮긴이의 말', "테크놀로지 시대의 욕망찾기/벗어나기"는 책에 대한 좋은 안내서이다. 잘 정리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존 어빙의 책이라곤 [가아프가 본 세상] 밖에 본 게 없지만, 어쩐지 비슷한 책읽기 경험이었다. 특별히 작가가 웃기자고 쓴게 아닌데 펼쳐지는 상황이나 대화, 인물의 행동이 우습다. 흐흐흐 웃을 수 있는 대목이 많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쓸쓸하고 적막한 슬픔이 배어난다. 기가 막히는 글쓰기다. 가족, 부부, 아이, 별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는 듯한 평범한 현대 미국인들에게 드리워진 이상한 불안과 공포. 거기서 벗어나고자 또는 잊어버리고자 하는 욕망이 보여주는 안타깝고도 우스꽝스러운 후반부는 과도한 듯 하지만 작가의 밀어부치는 힘을 느끼게도 한다. 좋은 작품이다.  

   
 

 배비트와 나는 우리가 구입한 상품들의 질량과 다양성에서, 저렇게 빽빽하게 들어찬 봉투들이 암시하는 저 순전한 충만함 - 속에서 우리가 느낀 재충전감, 이를테면 이런 상품들이 우리 영혼 속의 어떤 아늑한 집에 가져다주는 행복감, 안전감, 만족감으로 존재의 충만함을 성취한 것 같았다. 이런 감흥은 외로운 저녁 산책을 중심으로 삶을 꾸리면서 물질을 덜 필요로 하고 덜 기대하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p.38)

 
   

   
  세상에는 채택되지 않는 의미들로 가득하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주제들과 충격적인 사건들을 발견한다.(p.317)  
   

   
  그 컴퓨터 전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그가 내 이력을 두들겼더니 얼마나 비관적이고 엄청난 기록이 나왔는지도 말해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데이터의 총합이야. 우리가 우리의 화학적 충동의 총합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이렇게 그녀에게 말했다. (p.351)  
   

   
  "당신, 괜찮은 내과의 알고 있냐고 묻지. 진짜 권력이 있는 곳이 거기니까. ...... 사람들은 조세전문 변호사나 자산운영자, 그리고 마약상에 대해 물어.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바로 내과의예요. "당신 내과의는 누굽니까?" 어떤 사람이 도전적인 어투로 물을 거요. 그 질문은 당신의 내과의 이름이 생소하다면 당신은 췌장에 버섯 모양의 종양이 나서 죽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당신 장기에서 피가 뚝뚝 흐를 수도 있어서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 의뢰할 사람을 알지 못해서,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서 당신은 열등하고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고 느껴야만 한다는 거죠. 군산복합체 따위는 신경끄시오. 진짜 권력이 일상적으로 휘둘러지는 것은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런 사소한 도전과 훈계조의 말을 할 때니까." (p.377)  
   
 

   
 

"내 걱정은 하지 말게나." 그가 말했다. "다리 조금 저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내 나이엔 누구나 저니까. 나이가 들면 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기침하는 것도 신경쓰지마. 기침은 건강에 좋은 거야. 속에 든 것이 이리저리 움직이게 해주잖아. 그게 한곳에서 자릴 잡고 몇 년이나 그 자리에 가만있지만 않으면 아무 해가 없는 법이야. 그러니까. 기침도 괜찮아. 불면증도 그렇지 불면증은 아무 문제 없어. 내가 잠을 자서 얻는 게 뭐가 있단 말이야? 자네들도 1분 더 자면 1분 줄어드는 그런 나이가 곧 될 거야. 기침하고 다리 절고 할 시간이 줄어든다 말이지. 여자 문제는 신경 꺼. 여자들은 괜찮아. 우리는 카세트를 빌려서 섹스도 좀 하고 그렇게 지낼 거야. 섹스는 피를 심장으로 펌프질해 주지. 담배 피운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어. 그럭저럭 잘 넘어가고 있다고 자신하고 싶으니까. 모르몬교도들이나 담배 끊으라고 해. 그들도 담배만큼 해로운 것 때문에 결국 죽을 거야. 돈은 아무 문제가 안돼. 수입 면에선 완전히 고정적이니까. 연금 제로, 저축 제로, 주식과 채권도 제로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 저절로 굴러갈 거야. 치아 때문에 신경쓸 것도 없어. 이는 괜찮아. 이가 헐렁해질수록 혀로 흔들어 줄 수 있어. 그러면 혀도 할 일이 생기는 거야. 손 떠는 것도 걱정하지마. 누구든지 가끔은 떠는 법이야. 그리고 왼손만 떨잖아. 손 떠는 걸 즐기는 방법은 말이야, 그게 다른 사람 손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체중이 원인도 모르게 갑자기 줄어도 걱정할 필요 없어. 눈도 시원찮은데 먹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눈 걱정도 하지마. 눈이야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가 없지. 정신이 온전할까 하는 걱정은 깡그리 잊어버려. 정신이 몸보다 먼저 가는 법이야. 그렇게 돌아가는 거지. 그러니까 정신이 어떨가 걱정하지 마. 정신은 온전해. 차에 대해선 걱정을 해야만 해. 핸들이 좀 휘어졌거든. 브레이크도 세번이나 리콜된 거고. 푹 파진 곳을 지나가면 후드가 위로 치솟든단 말이야." 

완전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444~445)

 
   
주인공 잭의 장인의 도저한 무심함? 그런데 정작 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건네 준 이는 바로 이 장인이다.  
 
   
 

"아주 멋져요, 잭. 죽음이 없다면 삶이 다소 불완전하다고 믿으시나요?" 

"그게 불완전할 수 있겠어요? 죽음이야말로 삶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인데." 

"우리가 죽음을 인식하기 때문에 삶이 더 소중해지는 건 아닐까요?" 

"두려움이나 불안에 근거한 소중함이란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불안해서 덜덜 떠는 존재일 뿐인 게지." 

"맞아요. 더없이 소중한 것은 우리가 든든하게 느끼는 사람들이죠. 아내나 아이 말이죠. 죽음의 유령 때문에 아이가 더 소중해지나요?" 

"아뇨."    (p.495)

 
   
   
 

 나는 사진틀, 금속으로 된 책받침대, 코르크 받침접시, 플라스틱 열쇠고리, 먼지 쌓인 머큐로크롬 병과 바셀린, 굳어버린 그림붓, 덩어리진 구둣솔, 응고된 수정액 따위를 버렸다. 촛대, 얇은 판으로 된 식탁용 깔개, 낡아빠진 주전자받침도 버렸다. 그 다음엔 천을 감은 옷걸이와 자석 달린 메모판을 버렸다. 나는 뭔가에 앙심을 품은 듯 거의 광포한 상태였다. 이 물건들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들이 나를 이런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니까. 이것들이 나를 파멸시키고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게 했으니까. (p.512)

 
   

주인공 잭은 집안 물건들을 하나하나 버린다. 딸이 말릴 정도로 갖다 내 버린다.  

나도 가끔, 집안을 둘러보며 내가 부려놓은 이 것들을 다 버리고 가야 할텐데, 버려야 할텐데...... 한없이 둘러보곤 한다. 뭐, 곧잘 한 움큼씩 버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휘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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