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퇴근길에 동네서점에서 레이 브레드리의 [화씨451]을 구입했다. 동네서점이라 황금가지의 환상문학전집도 몇 권 비치해 두고 있지 않았는데, 예상대로 같은 작가의 신작 [민들레와인]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돌아와 소파에 턱 기대누워 들고 읽은 책은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름다움을 훔치다]였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건데, 그 동안 손도 못댔다고 생각해 손이라도 일단 대보자라는 심정으로 집어들었다가 의외로 빠져들었다.
p.s. 참, 딱히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소설이다. 영화의 레퍼런스를 찾자면 글쎄, 데이비드 린치의 세계 같기도 하고, <쏘우>나 <향수> 같은 류의 잔혹 공포의 세계 얘기 같기도 하고, 세헤라자드가 들려주는 얘기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나', 뱅자맹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야기이자, 또 다른 '나' 마틸드가 뱅자맹이 들려주는 기괴한 이야기에 빠져드는 과정이며, 그가 사라지지 않고, 그침없이 이야기를 해주길 갈망하는 아라비안 나이트이기도 하다. 또한 마틸드가 직접 그 이야기의 끝, 세계의 끝에서 회생해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탐하여 취하는 것이 파괴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아슬아슬하고도 아찔한 절대적 아름다움의 위험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늙어간다는 것이 거느리는 그 모든 불안과 공포와 슬픔으로 어쩔 줄 모르는 제롬 슈타이너, 주름 사이사이에서 콤펙트 가루가 떨어지는 얼굴로 철학책 읽어주는 여자 프란체스카, 허락되지 않은 욕망을 간직한 난쟁이 하인 레몽. 청춘시절에 이미 청춘이지 못했던 '나' 뱅자맹. 명석함과 아름다움을 지녔건만 그 많은 걸 소비하는 엘렌. 스물여섯에 세상과 단절을 선택한 마틸드.이들이 이 소설을 이루는 인간군상이다.
'아름다움의 건초장'

그래도 소설의 대부분이 '나' 뱅자맹이 하는 얘기로 이뤄지는 것이니, 뱅자맹이라는 인물이 흥미로울 수 밖에 없다. 한없는 열등감을 지닌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비참한 화자를 만나본지가 언제인지.... .
에세이 [순진함의 유혹]을 쓴 것이 1994년이고, 이 소설이 97년에 나왔으니 '제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나쁜 짓 하는 인간'에 대한 인물을 형상화 하고 싶었던 것일까.
[순수함의 유혹]은 어떤 책일지 구미가 당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