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튼 나의 순수한 즐거움을 위하여 책을, 특히 소설을 읽는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요 몇 년 동안 읽은 책이라고는 법률관계의 책이나 혹은 통근 지하철 안에서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 뿐이었다. 누군가가 정한 것도 아닌데,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는 인간이 많건 적건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것은 품행이 좋지 못하다고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그다지 바람직한 행위로는 여기지 않았다. 그와 같은 책이 내 가방 안에, 혹은 서랍 안에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한다면 아마 피부병에 걸린 개를 보듯이 나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곤 아마도 이렇게 말했겠지, "그렇구나, 너는 소설을 좋아하는구나. 나도 소설을 좋아해. 젊었을 때는 곧잘 읽었지" 하고. 그들에게 있어서 소설이란 젊을 때 읽는 것이다. 마치 봄에는 딸기를 따고 가을엔 포도를 수확하듯이.

                                      -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감는 새 1](문학사상사)  P53 -

 
   

요즘 소설을 읽고 있다. 좀체 소설이 잘 들어오지 않던 기나긴 세월이 흐르고 요즘 갑자기 소설이 그리워졌다.

나란 인간이 좀 그런 편인데, '~현상, 신드롬' 따위가 한 풀도 아니고 두, 세풀 꺾인 후에 느닷없이 어느날 새삼스레 뒷북을 치게 된다.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딱 그렇다.

그의 문학세계나 작품성을 따지고 싶지도 않고, 뭐라 쓸만큼 명료하게 정리되는 것도 아니니 내 능력 밖이다. 다만, ... 재밌다. 그렇게 줄줄이 써댈 수 있는 그의 재주가 신기하고 부럽다. 단편을 논외로 하고 그의 소설을 보라. 분량 엄청나다. [태엽감는 새] 1권을 보고 있는데, 나는 8장 '가노 구레타의 장황한 이야기*고통에 대한 고찰'을 읽으면서 실실 웃었다. 와, 이건 완전 '구라'다. 나는 이렇게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얘기를 시침 딱 떼고 주절주절 해낼 수 있는, 누에고치에서 실 뽑듯 뽑아내는 능력도 놀랍더라.

추석 연휴 때 의무처럼 가족모임을 끝낸 후 돌아와 [해변의 카프카]를 완독했다. 2003년도 가을 무렵인가 지인의 책을 빌려 읽었었는데 ... 다시 읽은 이 책은 내겐 완전히 새로운 책이었다. 한 번도 읽어 본 적 없는 책처럼 그렇게 읽었다. 이렇게 가끔씩 한심하고도 멍청한 나를 만나는 때가 있다. 읽었던 책임에도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봤던 영화임에도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분명 예전에도 맞닥뜨렸던 문제였음에도 완전 생경한 어려움처럼 또 다시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럴 때마다 느끼게 되는 절망감 같은 것이 있다. 내가 해온 일과 지나온 시간을 어떻게 생각해야 된단 말인가? 부질없는 도로에 불과한 시간 아니었던가?

너무 오래 살고 있는 거 아닌가? 시간들여 공들여 뭔가를 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내 인생이란 게 따지고 보면 스펀지 같은 거에 불과한 건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헛공간들로 이루어져 있는 ... 그래서 죽을 때까지 헛공간만 자꾸 늘여가는... 지대한 충격이 와도 멍~하니 움츠러들었다 다시 그 모양 그 꼴이 되곤 하는 그런 쓸데없는 스펀지. 꾹 짜면 내 인생만큼 빨아들인 시간이 하릴없이 뚫린 헛공간에서 고작 떨어지고 말 그런 스펀지.

어쨌든..., [해변의 카프카]에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대공>(op.97)을 계기로 베토벤 생애와 관련된 얘기가 나온다. 이와 관련되어 또 다시 나의 멍청한 과거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 때 뭣 때문이었는지 베토벤의 곡들을 열심히 들었었던 때가 있었다. 분명 어떤 계기가 있었을 텐데 도무지 기억에 없다. 그 땐 카세트 테이프였다. 다시는 들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터라 지금보다 한참 젊었을 때 사 모았던 카세트 테이프들을 상자에 쓸어모아서 어따 쑤셔 박아뒀었는데 2008년 추석 연휴 마지막날 집안을 뒤졌다. 테이프와 플레이어를 함께 두지 않아서 테이프를 찾은 뒤에는 플레이어를 찾아 또 한참 들쑤셨다. <대공>은 분명 있었다. 이어폰으로 잡음 섞인 음악을 듣고 있어보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무덤덤하긴 마찬가지였다.

현악4중주곡들도 있는대로 다 샀었나보더라. 역시 열심히 들었다. 베토벤 음악 중에서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건 작품번호 73, <황제 콘체르토>이다. 시원해서다. 그리고 이른바, <월광> <비창> 등의 극적이면서도 피아노 특유의 차갑고 냉정한 음색이 잘 드러나는 곡들이다.

베토벤 생애가 나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박홍규 교수의 [베토벤 평전](가산출판사, 2003)이다. '음악노동자'로서 베토벤이라 규정한 것이 흥미롭기도 했다. 책은 인덱스까지 해서 333페이지로 적당한 분량이었고 작품해설이 구구절절한 것도 아니어서 가볍게 읽어볼만했다. 박홍규 교수가 이 책에서 애써 알리고자 한 베토벤은 세뇌되다시피한 신화적 베토벤이 아니라 '인간 베토벤'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을 뒤흔들고 있던 새로운 시대의 와중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품활동을 해야 했던 시대적 인간 베토벤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평이하고 쉽게 베토벤과 그의 시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은 있되 읽는 맛은 없는 팜플렛 같은 느낌이 강하다.

공교롭게 최근 닥본사하는 드라마가 <베토벤 바이러스>이다. 일본 드라마(영화?) <노다메 칸타빌레>의 한국판이라고 하는데 <노다메...>는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여튼 아직까지는 작가인 홍자매의 발랄함은 있으나 연출력이 좀 문제가 있는 듯 하다. 이런 드라마나 영화제작의 노하우나 인프라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베토벤 vs 모차르트,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구도이지만 인간사 어쩔 수 없는 구도 아니겠는가.

드라마에서도 강마에(김명민)는 말한다. "나는 모차르트가 싫어!"  웃기지만 슬픈 얘기다. 세상의 모든 비모차르트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P.S. [해변의 카프카]를 읽다가 김훈의 소설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문장, 단어를 구사한 것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하권의 P.366페이지에서는

"베개에서는 햇빛 내음이 난다" 같은 문장에서 '햇빛내음'은 김훈이 종종 쓰곤 하는 '햇빛냄새'와 똑 닮았다. 작가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응하는 단 하나의 단어만을 쓸 수 있다고 했을 때, 이렇게 비슷한 계통의 단어를 쓴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비슷한 감성에서 비슷한 단어를 고르고 조합한다는 게.

김훈과 하루키는 어딘가 닮아 있다. 물론 '밥벌이'의 삼엄함과 엄중함을 중요시하는 김훈과 '나' 혼자만의 생활로 그럭저럭 잘 버텨나가는 하루키의 생계의 경중은 비교하기 힘들겠지만.

3인칭을 힘들어 하는 점에서도 닿는 점이 있고. ... .

김훈은 1948년생이고 하루키는 1949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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