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번역투 문장은 왜 나쁜가- 멀고느린구름

요즘 논술 탓에 글쓰기 관련 서적이 넘쳐나고 있다. 얼마 전 지인의 부탁으로 쓸만한 글쓰기 참고 서적을 찾아보기 위해 영풍문고를 갔었다. 내가 글쓰기 공부를 할 적만해도 국내작문론 서적으로는 이태준의 '문장강화'가 거의 유일했는데, 몇 년만에 수 십 가지로 책이 늘어났더라. 작문론 코너에서 이리저리 책을 살펴 보았다. 거의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개 중에는 바른 문장쓰기와 관련한 책도 여럿 있었는데 재미난 공통점이 있었다. 다들 하나 같이 번역투의 문장은 안돼! 라고 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엉? 왜에?

 

  그러게, 왜? 왜 번역투의 문장은 쓰면 안된다는 걸까? 국적없는 표현이라서? 아래 한 문장론 책에서 인용한 것을 먼저 보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낮술마신달님의 블로그에서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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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없는 번역투 표현'란에서 대표적 사례를 부분 옮겨본다.

 

 

 '피동형'은 글심(표현력)을 약하게 한다.

 

 '피동형'은 '사동형'이나 '능동형'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책을 읽히다'(사동형), '책을 읽다'(능동형)

 

 

  ㄱ.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있습니다.

  ㄴ. 회의를 보다 즐거운 것으로 하기 위하여, 좋은 제안을 보내 주십시오.

  ㄷ. 새 달 중순경 회의를 가지려 합니다.

  ㄹ.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ㅁ. 오늘 중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ㅂ. 더 일찍 제출할 터였는데 미안합니다.

  ㅅ.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시킨 것일까요.

 

이렇게 고쳐야 한다.

 

  ㄱ. 이 책은 젊은이들이 많이 읽고 있습니다.

  ㄴ. 즐거운 회의가 되게끔, 좋은 생각을 보내 주십시오.

  ㄷ. 새 달 중순께 회의하겠습니다.

  ㄹ. 계획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ㅁ. 오늘 중으로 하여야 합니다.

  ㅂ. 더 일찍 내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ㅅ.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을 행한다', '~을 갖는다'는 쓰지 마라

 

 '을 행한다', '~을 갖는다'는 번역투 말이다. 구수한 청국장 냄새나는 우리식 표현으로 고치자.

 

 

 7년간 연구를 행한 끝에 -> 7년간 연구한 끝에

 전문적 조사를 행하고서야 -> 전문적으로 조사해야

 재판이 행해진 뒤에 -> 재판 끝난 뒤에

 

 단독 회담을 가진 자리에서 -> 단독 회담 자리에서

 어떠한 관계를 가진 사이인지 -> 어떤 사이인지

 예정대로 입학식을 갖기로 했다. -> 예정대로 입학식을 하기로 했다.

 

 

조심할 번역투

 

'~을 시키다'는 번역투 표현이므로 '~하다'로 바꾸자.

 

 환경을 개선시키다 -> 환경을 개선하다

 회장을 구속시키다 -> 회장을 구속하다

 전투기를 격추시키다 -> 전투기를 격추하다

 계획을 구체화시키다 -> 계획을 구체화하다

 

 '~화하다'는 '~해지다'로, '~화되다'도 번역투이므로 '~이되다'로, '~화되어지다'도 '~화하다'로 바꾸자.

 

 비대화한 도시 -> 비대해진 도시

 폐허화된 평양 -> 폐허가 된 평양

 조직화된 종교 -> 조직화한 종교

 산업화되어진 오늘 -> 산업화한 오늘

 

 

 '~적', '~화', '~성'의 남용

 한자어 접미어 '~적(的)' '~화(化)' '~성(性)'은 모두 추상(抽象)을 나타내는 접미사들이다. 너무 많이 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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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소위 '번역투' 문장을 다른 여러 서적에서도 문제 삼고 있다. 글쓴이의 나이가 많으나 젊으나 한 결 같이 그건 안돼! 라고 외친다. 그러나 다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단지 한국적이지 않다 라든가, 전통을 무시한다 라든가 하는 궁색한 근거만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문장 혹은 표현에 '국적'이 있다는 생각은 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일까? 물론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법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가 개인이 구사하는 표현이나 문장을 가지고 국적을 들먹이며 규제할까?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첫 번째 주의에서 "피동형은 글심을 약하게 한다" 라고 외치고 있는데, 정말 그런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글심이 약해지는 것은 오히려 '능동형만'을 사용했을 경우의 현상이다. 피동형과 능동형을 함께 사용했을 때 되려 더욱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다. 예를 보자.

 

 

ㅅ-1.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시킨 것일까요.

ㅅ-2.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적을 지키기 위해 피동형(ㅅ-1)을 능동형(ㅅ-2)으로 바꾸어 보면 문장의 늬앙스가 전혀 달라진다. ㅅ-1의 문장에서 그녀는 어떤 외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행위를 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것 같다. 허나 ㅅ-2의 그녀는 스스로 어떤 일을 해버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걘 왜 그랬대? ㅅ-2의 그녀는 왠지 얄미운 그녀이다. 자랑스런 문장의 국적을 지키기 위해 모든 '위기의 그녀'를 '얄미운 그녀'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두 번째 주의, '행한다, 갖는다'를 쓰지 말라고? 이런 무지막지한 폭력이 어디 있는가. 뻔히 있는 표현을 쓰지 말라니. 언어는 기본적으로 풍부할 수록 좋은 것인고, 표현 또한 선택지가 많을 수록 재미난 것이다.

 

예정대로 입학식을 갖기로 했다. -> 예정대로 입학식을 하기로 했다.

 

앞의 문장은 소위 번역투이다. 영어의 have 표현을 우리말로 옮겨 온 것. 자 우리 입학식으로 다양한 말을 만들어 보자.

 

 

입학식을 열다.

입학식을 하다.

입학식을 개최하다.

입학식을 치르다.

입학식을 겪다.

 

 

입학식이라는 주어로 우리는 숱한 다른 형태의 표현들을 만들 수 있다. 여기에다 영국에서 물 건너 온 '갖다'라는 표현을 하나 더 붙이는 게 그렇게 몹쓸 짓이란 말인가.

 

 

입학식을 갖다.

 

 

표현이 좋지 않은가? 영어식 표현에는 시적인 것이 많다. '입학식을 갖다'라는 표현 역시 사물이 아닌 것에 사물을 소유한다는 뜻의 '갖다'를 붙임으로서 독특한 늬앙스를 전달한다. 창의적인 언어 사용자라면 더 참신한 표현을 발명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입학식을 풀다', '입학식을 맞이하다', '입학식을 잡다', '입학식을 낚다' 등등도 아직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든지 의미의 전달이 가능한 표현들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표현 방법은 풍부하면 풍부할 수록 좋다.

 

 

 문장이나 표현의 '국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나친 민족주의자이거나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문장,표현의 국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전통이란 과연 어느 시대의 것일까. 아마도 일제시대, 좀 더 길게는 조선시대의 것일 터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을 테니 그 전통이라고 해봐야 끽해야 3~400년 정도이다. 그러나 이 3~400년 동안 우리 한반도의 언어가 단일한 표현 방식으로 균일성을 유지해 왔다고 볼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언어와 요즘의 언어 사이에서 조차도 도드라지는 이질성이 발견되니까. 언어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엄연한 언어의 자연(스스로 그러함)이다. 언어는 도도히 흐르고 흐르는 강물과 같다. 그것을 인간의 보수적 욕심으로 틀어막아 버리면 물이 고여 썩게 된다.

 

  언어는 흐르고 흘러 저 다른 세계의 강줄기와도 뒤섞이며 넓고 넓은 바다가 되어야 참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 민족의 언어는 참으로 품이 넓은 언어이다. 영국식 표현이든, 일본식 표현이든, 중국식 표현이든 모두 우리의 언어 속에 품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이는 '문장, 표현의 국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우려처럼 재앙인 것이 아니라 한국어를 구사하는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혜택인 것이다. ~행하다도 쓰고, ~하다도 쓰고, ~시키다도 쓰고, ~갖다도 쓰고,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가지 다양한 국적의 독특한 표현들을 문맥의 상황에 맞게 맛깔나게 쓰면 그만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입학식을 갖도록 하셈!' 이라고 쓴다고 해서 훈민정음이 알파벳이 되지는 않는다.

 

  사족으로 몇 년전에 어떤 국어학자(아마도 민족주의자)가 방송에 나와서 대한민국을 표현할 때 '저희 나라' 라고 하면 안 되고, 꼭 '우리나라' 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덕분에 요즘 어디가서 저희 나라가... 어쩌구 라고 말 시작하려 하면 철썩! 뺨 맞는다. 그런데 이게 참 웃기는 일이다, 웃기는 일. 아니, 나라를 좀 낮추면 어때서 그러는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모든 존재에 앞서서 존재하는 최상의 것인가. 옳지 않은 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국가가 평화에 대한 신념을 지키는 나라보다 항상 우위에 있는 나라인가. 대한민국은 내가 태어난 나라이기 때문에 항상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훌륭하고 좋은 나라로 대접해주어야만 하는 걸까.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를 통하여 교묘하게 국가주의를 학습시키려는 계략에 온 국민이 얼씨구나 하며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 건 아닐까. 오호 통재라!

 

 

 

2007. 3/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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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퍼온글] [오마이뉴스] 8년 만에 재즈 앨범으로 돌아온 신해철을 만나다

아티스트이든, 정치인이든, 지식인이든, 대중과의 구별짓기를 통해 자신을 정립하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대중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신해철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내 귀가 고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신해철의 이번 판은 별로더라... 가수는 노래로 이야기해야 하겠지만, 신해철 같은 가수는 계속 이렇게 말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존경스럽다.

 

 

"뮤지션 구박하는데 음악이 먹히겠나
대중이 달라져야 아티스트 시대 온다"
[인터뷰①] 8년 만에 재즈 앨범으로 돌아온 신해철을 만나다
    김작가(zakka) 기자   
8년 만에 솔로 앨범을 낸 가수 신해철과 대중문화평론가 김작가의 만남. 3시간에 걸친 두 사람의 대화를 두 편으로 나눠 싣습니다. <편집자 주>
▲ 8년 만에 솔로 재즈 앨범을 낸 가수 신해철
ⓒ 싸이렌

한국의 뮤지션, 아니 문화계 종사자 중에서 신해철만큼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인물은 드물다. 그것은 그의 음악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알다시피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그의 화법에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

사회 정치적 현안에 대해 언제나 말을 극도로 아끼는 우리 문화계의 풍토를 비춰본다면 그래서 더욱 이슈메이커로서 독보적인 자리에 있는 게 신해철이기도 하다.

그런 신해철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음악계의 도올 김용옥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삼국지의 관우에 비교하기도 한다. 자신의 철학과 가치에 대한 끝없는 자신감, 혹은 거침없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를 드러냄에 있어서 일말의 주저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신해철이 8년 만에 솔로 앨범 < The Songs For The One >을 냈다. 록과 일렉트로니카를 오가며 음악 활동을 해온 그로서는 이례적으로도 재즈를 표방하는 앨범이다. 듣는 이에 따라 새로운 도전으로, 혹은 안전한 선택으로 비칠 수도 있다.

서울 공덕동에 있는 사이렌 뮤직을 찾아 스물 다섯번째 앨범에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장을 내민 속내를 들어봤다. 음악뿐 아닌, 다양한 현안에 대해서도 그는 말발굽소리가 날만큼 거침없이 생각을 내뱉었다.

"재즈란 장르보다 로맨스 먼저 생각해"

- 오랜만의 솔로 앨범이자 첫 재즈 앨범이다. 주변 반응은 어떤가.
"무조건 좋다는 팬들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가며 괜찮다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냥 참고 넘어가는데 빨리 때려 부숴라, 나 기다린다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재즈라는 특정 장르보다는 로맨스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만든 앨범이다."

- 부인에게 바치는 앨범이라고 했다. 정작 부인의 반응은 어떤가.
"와이프한테 주는 앨범으로 되어있지만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아버지와 나'가 일반적인 다른 사람들 얘기가 됐듯 이 앨범에서의 'One'도 나한테는 마누라지만 듣는 사람한테는 자신의 'One'이다. 내년에 듣는다 해서 촌스러워질 앨범도 아니고, 화이트데이나 밸런타인데이에 선물할 수 있는 음반이 되었으면 좋겠다."

- 오리지널 재즈 앨범이라기보다는 이지 리스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최근의 재즈라기보다는 재즈가 가장 대중에게 친근했던, 뉴올리언즈나 스윙 시절의 대중음악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분명히 이지 리스닝인데, 문제는 우리 대중들이 그리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일단 가요 팬들은 브라스 섹션이 튀어나오면 당황스러워 한다. 가요 팬들에게는 어렵고 재즈 팬들에게는 가벼운, 타깃 없는 앨범이라고 본다."

- 레퍼토리 선정은 어떻게 했나. 특히 최희준의 '하숙생'은 의외의 선곡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회의를 거쳤다. 스탠다드 넘버와 리메이크 대상이 되는 우리 노래 수백 곡 중 세상 사람들이 다 알 만한 노래가 아니면 다 쳐냈다.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중학교 때도 부르는데 어려움 없었던 노래들로 갔다. '하숙생'의 경우 당시 노래들 중 트로트가 아닌 귀한 곡이어서 들어갔다. 만약 최희준씨가 노래할 때 우리나라 음악계에 재즈가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면 이렇게 가지 않았을까 한다."

"보컬 녹음하면서 이렇게 재미있었던 건 처음"

- 어느 앨범보다도 보컬리스트로서 역할에 충실한 작품이다. 프로듀서, 편곡, 연주를 다른 사람에게 전부 맡긴 첫 앨범 아닌가. 노래 부를 준비도 많이 했을 텐데.
"서양 사람들 앞에서 쪽 팔리기는 싫었으니 세 번 미리 불러보고 녹음했다. 생전 가장 노래 연습 많이 하고 녹음한 경우다. 원래 나는 레코딩 때 노래 연습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 습관적으로 녹음 들어가기 직전에 가사를 쓰기 때문이다. 녹음하기 전에 커피나 녹차 시켜놓고 식기 전에 다 불러버렸으니. 멜로디도 윤곽만 잡아놓고 녹음 직전까지 안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넥스트 라이브 앨범 들어보면 오리지널 레코딩보다 좋다. 일단 연습이 되고 지방을 거친 후 서울 공연에서 녹음을 했기 때문에 원래 앨범보다 라이브 앨범에서 노래를 잘 불렀다. 기형적인 타입이지만 음악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그래서 어쩔 수 없다."

▲ 최초 미디 음반을 낸 신해철이지만 '조립식 음반'에 지쳐 '한방 레코딩'을 마음먹었다.
ⓒ 싸이렌
- 밴드의 전면에 서 있는 게 보컬리스트인데 그렇게 무책임해도 되나.(웃음)
"어릴 때부터 보컬은 악기의 하나라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내가 보컬을 하게 된 계기가 가위바위보에서 졌기 때문이다. 우리 때는 기타가 최고고 음악은 하고 싶은데 할 줄 아는 악기가 없는 애가 하는 게 보컬이었다. 그래서 스쿨 밴드 처음 만들 때 보컬하라고 해서 분개했다. 애들 앞에서 기타를 막 치면서 이거 보라고, 우리가 기타가 두 명이지만 내가 리드 기탄데 왜 나보고 보컬하라고 하느냐 그러다가 가위바위보에서 졌다.(웃음)

심지어 '무한궤도' 이후 솔로 앨범 낼 때도 음악은 계속 해야지, 밴드는 계속 해야겠는데 상황은 안 좋지 그래서 전략적 방편으로 노래를 했다. 그러다 보니 보컬에 애정을 가질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프로듀서, 편곡 남한테 다 맡기고 노래만 불러보고 싶었다. 보컬 녹음하면서 재미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 6일 만에 녹음을 끝냈다고 들었다.
"첫날은 파티였으니까 정확히 믹싱까지 포함해서 5일이었다. 한방에 갔다."

- 원 테이크 녹음은 사전 준비도 철저해야 하고 무엇보다 연주자들의 기량이 엄청나게 요구되지 않나.
"인프라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팝도 하고 클래식도 하고, 이런 사람들 끌어 모아서 하는 게 아니라 일년내내 빅밴드만 하는 사람들과 하니까 확실히 차이가 있더라. 노상 밴드를 하는 사람들이니까 리허설 과정에서 이미 밸런스를 맞춰버리고 레코딩에 들어간다. 녹음하다가 가수 컨디션 살펴보면서 '아, 그런 식으로 노래하려고? 야야 우리도 이렇게 가자' 이런 식으로 자기들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캐치해서 본 녹음에서 즉각즉각 맞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욕이 나올 정도였다. 선장이 지시를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알아서 한다."

"조립식 음악에 지쳐 '한방 레코딩'으로"

- 원 테이크 녹음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이번 앨범이 어찌 보면 듣는 사람은 편한데 만드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녹음이야 5일 만에 끝났다고 하지만 사전 준비가 그만큼 길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다. 이 앨범이 어떤 면에서는 공격적이다. 첫째, 한방 레코딩으로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몽땅 미디로 찍어서 조립식으로 나오는 요즘 음악들에 나도 지쳤고, 듣는 이들도 지쳤다. 그리고 조립식으로 음악을 만드는 걸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이 나다.(신해철의 솔로 두 번째 앨범 < Myself >는 미디로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음반이다...필자주) 디지털 편집의 가능성이나 음악 수준을 상승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매력 때문이었다.

헌데 지금은 조립식이 아니면 나오는 앨범이 없으니까 짜증이 났다. 그리고 음반 시장이 축소되니까 투자, 제작비도 줄어든다. 따라서 미디의 위력 때문이 아니라, 싸게 가기 위해 미디를 사용한다. 그래서 일부러 28인조 밴드를 썼다. 인간이 연주하고,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는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 완전히 새로운 작업 방식을 통해서 앞으로의 음악에 있어서 자양분이 될만한 게 있었나.
"앞으로는 넥스트 앨범 녹음을 원 테이크로 한 방에 가려고 한다. 물론 넥스트의 경우는 오버더빙없이 한 번에 모든 걸 만들기는 힘들지만 원 테이크를 기본으로 삼아서 가려고 한다. 그리고 조립이나 편집, 기술을 많이 부리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그게 답이라는 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러려면 연주도 잘해야 하고 곡이 좋아야 하는 거니까. 어쨌든 끝까지 가봐야 뭐든지 알겠더라."

- <모노크롬> <비트켄슈타인> 등의 앨범으로 디지털의 끝까지 가보니까 오히려 아날로그가 답이었다는 얘긴가.
"이제 아날로그, 디지털의 장점을 다 취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잃은 것도 많다. 그래서 공부는 적당히 하라고 후배들에게 그런다. 좋은 소설가가 되고 싶은지, 언어학자가 되고 싶은지 구별하라고 한다. 기타 치는 친구들에게도 말한다. 검객으로 달빛 자르기를 완성하면 검도 선생이 되는 거다. 만약 칼을 들고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싸움에 뛰어들어라. 즉, 곡을 써야 한다.

내가 그 반대로 갔으니까 나 자신은 할 말은 없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얻은 보람은 있다. 록 음악에서 프로듀서란 음악에서의 크리에이션뿐 아니라 사운드를 디자인하고 최종 단계에서 기계를 조작해서 믹싱까지 끝내주는 건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지 않나. 그런 단계까지는 간 것 같다. 스키조의 경우에도 사운드 디자인에서 믹싱까지 내 손으로 끝내줄 수 있었는데. 밴드들은 음악만 만들고 나머지는 다 나한테 맡겨, 그럴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거 하나는 기쁘다."

- 앞으로 뮤지션이 아닌 프로듀서 신해철에 집중해야 하는 건가.
"어쩔 때는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최대의 프로듀서일 수 있다. 피터팬 콤플렉스의 경우 간섭하지 않는 게 최선의 프로듀싱이었다. 음악을 하면서 프로듀서도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고, 인디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자본가들을 설득하고 끌어들이는 것도 내 할 일이다. 공연장 설립 사업도 계속 추진중이다."

▲ 신해철은 가수로서 뿐 아니라 가요계 이슈메이커로서 독보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 싸이렌
"앨범이 사라진다는 건 내겐 사형선고"

- 90년대 정상을 맛봤던 가수들이 더 이상 앨범을 내지 않거나, 앨범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비슷한 세월 활동해온 사람으로서 어떻게 보는지.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인 것 같기도 하다. CD가 사라진다는 걸 결정돼있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디지털 싱글이 아닌 디지털 앨범도 가능하다. 히트곡을 위한 목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라 앨범 위주의 작가주의적 생각으로 가려는 사람은 끝까지 싸워야지.

CD를 사는 마지막 한 사람이 날 때까지 CD를 내려고 한다. 나 같은 사람한테는 앨범이 사라진다는 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패배할 게 뻔한 싸움이라도 마지막에 내 목에 칼이 들어와서 땅바닥에 꼬꾸라져야 끝나는 거지, 이미 끝났구나 싶어서 먼저 깃발 내려서는 안된다는 거다."

- 당신의 음악적 도박은 대체로 성공을 거둬왔다. 미디를 도입했고, 잘나가는 솔로 가수에서 밴드로 회귀했고, '도리도리'밖에 모르던 상황에서 테크노 앨범을 냈다. 시대 상황에 한걸음 앞서 왔던 셈이다. 음반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지금, 당신의 결의는 이제 대중들의 판정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 같다. 대중을 믿는 편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대중을 가장 불신한다. 우리나라 대중은 음악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서 면책을 받고 있다. 매스미디어, 뮤지션, 시스템 여러 문제를 지적하면서 아무도 대중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대중이야말로 모든 사태의 원인이자 책임자다. 아티스트가 반성할 게 없다는 뜻이 아니라 대중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도 다루지 않는다는 의미다. 뮤지션이 대중을 공격하면 싸가지없는 놈이 되거나 변명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20세기 이후의 대중이란 그 자체가 아티스트의 풀이다. 대중은 미래의 아티스트이기도 하고 최종 소비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중이라고 하는 음악의 토양도 생각해 봐야 한다. MP3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다른 나라 음반 시장도 작살나긴 했지만 우리나라는 가장 먼저 가장 참혹하게 작살났다. 그게 오직 초고속 인터넷 때문일까. 과연 뮤지션의 역량이 떨어져서 음악을 조잡하게 만들기 때문 만일까.

아니다. 돌밭에 모내기했으면 쌀이 안 열리는 게 당연하다. 우리나라 대중은 20세가 넘어서면 급격히 주류에 편입하려 무릎을 꿇으면서 음악 듣는 걸 멸시하기 시작한다. 예전에 좋아했던 아티스트를 쳐다보면서 '한때는…' 이러면서 피식 웃는다. 문화비가 없다면서 울부짖으면서 술값은 항상 있다. 딱, 그 수준밖에 안된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듣던 멜로디가 아니면 안 들으려고 한다. 집요할 정도다. 특이한 멜로디나 특이한 시도를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면 작곡가들은 어디서 듣던 멜로디를 죽어라 찾아내야 하는데 확률적으로 나올 수 있는 멜로디가 뻔하니까 표절을 하게 되는 거다. 표절에 도덕적 책임을 묻는 건 당연하다. 그러면 왜 대중들은 죽어라고 어디서 듣던 멜로디만 들으려고 할까.

일본 대중음악 차트를 보면 깜짝 놀란다. 톱10 안에 들어있는 노래들을 보면 요상망측한 노래들이 있다. 영국은 멜로디도 리듬도 없는 노래가 넘버 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그런가? 자기들이 뻔한 노래만 좋아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다 면책받고 있다."

"팝과 단절되면서 대중도 하향평준화"

- 하지만 예전의 대중은 안 그랬던 것 같다. 넥스트의 2집,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 같은 새로운 음악이 우후죽순으로 나왔던 시대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대중은 언제나 준비되어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90년대 대중과 지금의 대중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처럼 평생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삶의 일정 시기에만 음악을 듣는 토양에서는 10년쯤 시간이 지나가면 대중을 이루는 세대 하나가 완전히 소멸하고 다른 대중층이 와있다고 봐야 한다. 지금의 20-30대도 음악을 듣겠지만 그들이 실제 필드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6.10항쟁 이후에 등장한 10대-20대 초반은 음악을 듣는 방식과 세계관이 다른 세대다. 결정적으로 라디오에서 팝의 공급을 끊어버리면서 팝에서 단절되어 귀가 하향평준화돼버린 게 지금의 대중이다. 우리나라 대중의 역사에서 가장 귀가 밑으로 떨어지는 게 지금이다. 이런 풍토에서 음악이 제대로 먹힐 리가 없다.

지금 라디오가 가장 뒤처져있는 매체라고들 한다. 하지만 옛날에는 음악 초보자는 2시의 데이트를 들으며 장르 구분과 명곡에 대한 기초를 배웠다. 해마다 초급반에 입학하는 애들은 다 김기덕으로 들어오고 중급반은 '황인용의 영팝스'로 가서 심장을 때리는 음악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후에 '전영혁의 음악세계'라는 마스터클래스로 넘어갔다. 이런 코스를 거치면서 팝과 가요를 동시에 듣는 세대가 90년대에 탄생한 거다. 팝을 듣던 그들이 왜 우리나라 음악은 그렇게 안되냐고 뮤지션들에게 압력을 가했던 거다.

넥스트가 앨범을 내고 성공할 수 있던 건 '우리나라에도 속주 기타를 칠 줄 아는 애가, 하이톤으로 빽빽 지르는 애가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심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2집을 낼 때는 '팝에 비해 사운드가 밀리는데 해결해'라는 압력이 있었던 거고. 그래서 미국에서 엔지니어를 불러 와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대중의 힘이다."

- 들을 음악이 없다는 불만도 대중들로부터 끊임없기 제기된다.
"들을 게 없어서 아예 음악을 듣지 않는다면 그런 말 해도 된다. 그건 자기의 선택이니까. 하지만 다운로드 계속 받으면서 그렇게 얘기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일부 네티즌들의 행태는 그런 면에서 비겁하다. MP3와 함께 전멸한 건 아이돌 진영부터가 아니었다. 뮤지션 진영이 먼저 박살이 난 다음에 아이돌로 옮겨간 거다.

그나마 아이돌은 타격을 덜 받는다. 아이돌인 상대방과의 교감을 위해 직접 물건을 구매한다는 행위가 작용을 하니까. 하지만 아티스트 진영의 팬은 음악 내용만 있으면 되지 북클릿, 브로마이드 이런 건 필요 없거든. 소위 마니아들 포함해서 모두가 우리나라 음악에 칼을 꽂았다."

ⓒ 싸이렌

"음악하는 사람들을 구박하는 나라가 어딨나"

- 하지만 아직까지 뮤지션들의 앨범이 나오는 건 그걸 듣는 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앨범이 얼마나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앨범 때도 난 그랬다. '아직도 니들이 내 앨범 제작비를 댄다고 생각하냐. 나는 다른 재주 부려서 돈 벌어서 내 돈 퍼부어서 앨범 만든다. 그럼 나한테 말할 자격이 없는 거지'라고 얘기하곤 한다. 나처럼 구르는 재주라도 있는 사람은 좀 다행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갑갑하다.

뮤지션들에게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야 한다. 90년대는 그런 예우가 가장 높았던 시기다. 그 음악을 듣는 팬들은 자기 맘에 드는 아티스트들은 팝 아티스트들과 동급으로 대우해줬다. 그렇지만 지금은 사람 취급을 안 하려고 한다. 말꼬리 잡고 늘어지거나 이상한 얘기 찍찍 해대고. 칭찬은 못 들어도 좋다. 그렇지만 왜 침 뱉고 돌 던지는 거냐는 거지.

그나마 나는 팬덤이 형성되어 있으니 보호막 역할을 해줘서 버티는데. 심지어는 음악한다고 자살까지 해야 하는 형편까지 갔으니까. 다들 죽으려고 한다. 실제 음악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대중들이 그들을 대하는 악독한 태도다. 음악 하는 사람들을 구박하는 나라가 어딨나.

외국에 여행을 가면 놀란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할 때 뮤지션이라고 하면 일단 활짝 웃는다. 짐도 안 열어본다. 런던에서 택시를 탔는데 뮤지션이라고 하니까 뒤돌아보면서 '오, 모든 사람이 뮤지션이 되고 싶어하죠' 이러더라. 우리나라는? 엄마한테 따귀맞는 것부터 시작한다. 풍토가 너무 다른 거다."

- 뮤지션이 예우받았던 90년대는 자기 노래를 가지고 활동하는 이들이 중심이었다. 심지어 댄스 뮤직도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노이즈 같은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기획사 시대가 시작되면서 뮤지션의 자리가 위축됐다는 생각이다. 싱어송라이터를 필두로 한, 자신의 음악을 하는 이들이 산업의 변방에 있고 기획상품들이 미디어를 다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산업구조가 대중이 음악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단초가 아닐까.
"기획상품이 미디어랑 결합하고, 그게 블록화하면 아티스트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게 순서대로 간다. 라디오가 그 순서를 그대로 보여줬다. 우리나라 라디오가 지위를 잃은 건 뉴미디어 탓도 있겠지만 자기 발을 자기가 찍은 게 더 크다. 라디오가 TV워너비가 되면서 아이돌을 끌어들여 DJ를 시키고 팝송을 끊었다. 그 결과 최약체 미디어로 전락했다. 하지만 외국은 여전히 라디오가 강력한 매체다.

TV 음악프로그램은 오로지 풍선 든 10대들만 대상으로 생각하고 아이돌만 데리고 놀았다. 요즘 어떤가. 음악 프로그램 시청률 안 나오고 망해간다. 하지만 EBS의 스페이스 공감 같은 경우는 어떤가. 그런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갔는데 성과가 나오고 있다. 매스미디어가 장기전략이나 고민없이 유행만 따라 왔다갔다하니까 순서대로 작살이 나고 있다. 아티스트들을 중심축에 뒀을 때 보다 못한 결과가 나오고 있다."

- 다시 아티스트들이 음악산업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시기가 올까.
"매스미디어가 다시 열리는 시기가 되면 창구가 올 수 있다. 다만, 그저 싱어송라이터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뭔가가 있어야지. 심지어 서태지도 아이돌 댄스팀이란 형태를 취함으로써 대중을 공략할 수 있는 길을 뚫었고, 듀스도 본인들이 댄서 아닌가. 넥스트의 경우는 무대에서 벌이는 퍼포먼스의 정도가 백댄서 데리고 나오는 아이돌 댄스팀에 비해 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넥스트가 1집 내고 TV에 한번도 안 나가다가 몇 년 만에 나가게 되니까 PD가 백 댄서를 세우려고 했다. 그룹사운드는 연주 말고는 보여줄 게 없다고 생각한 거다. 그래서 백댄서 세웠다가는 우리 기타에 맞고 코피 터지니까 치우라고 그랬다. 기타를 돌리고 이빨로 물어뜯고 하는 김세황 앞에서 무슨 백댄서가 필요하겠나. 쇼적인 측면과 아티스트는 반비례라 생각하는 인식은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인디 밴드들과 얘기할 때 가끔 그런다. 홍대에서 클럽에 모여있는 관객 300명을 질질 싸게 못 만들면서 TV 앞에 있는 400만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라디오헤드처럼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끌 수 있는 포스가 있던가, 아니면 머틀리 크루처럼 '생쑈'를 하던가. 뭐든지 해야 한다.

차력을 하던 뭘 하던 관객의 눈을 끌어야 하는 거 아닌가. 넥스트는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차력단이었다. 음악만 열심히 하는 걸로 된 게 아니었다. 우리 슬로건이 '연주에 실패한 뮤지션은 용서받아도 액션에 실패한 뮤지션은 용서못한다'였다.(웃음)"

- 솔로시절부터 넥스트, 모노크롬 등 당신의 음악적 여정을 돌이켜보면 초기에는 상업적, 비평적 찬사와 함께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평단의 지지를 그리 못 받았다. 그리고 시장에서도 팬의 외연을 넓히기보다는 기존의 팬층에 머물러있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음악보다는 발언이 더 화제가 되는 상황이다. 뮤지션으로서 답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하다 보니 어떻게 해야 평론가들이 좋아할지는 예측이 된다. 하지만 97년부터 더 이상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넥스트를 해산할 때 더 올라갈 곳이 없어서 해산한다 말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 이상의 평가와 판매를 원한 적이 없다. 그 이후부터는 철저히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다. 97년까지의 내가 인기있는 소설가였다면 그 이후부터는 논문을 썼던 셈이다.

모노크롬은 레코딩 테크놀로지 실험이었고 비트켄슈타인은 미디가 어쿠스틱의 영역을 어디까지 잠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었다. 음반 자체의 구조와 예술성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거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누굴 위해, 뭣 때문에 그걸 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든거지. 그런 음악을 원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된다고. 90년대에 조성되어 있던 분위기 정도는 되어야 거기에 따라갈 텐데 그렇지 않으니 나 좋은 거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스타가 등장했을 때 팬덤이 형성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거꾸로다. 팬덤이 형성된 후 그들이 요구하는 스타가 나온다. 그것도 비슷한 수천의 후보에서 한명이 간택되어 탄생한다. 간발의 차이로 너바나의 업적이 펄잼에 의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시작한 건 너바나였듯 말이다. 디스코가 난리 치고 다른 음악이 전멸할 때가 됐을 때 록이 파티 음악화되면서 LA메탈이 출연했다. 그 임무가 다하자 그 뒤를 이어 너바나가 등장했다. 그렇게 보면 미디를 무기로 등장했던 우리 세대의 등장이나, 서태지의 등장도 대중들의 요구가 상승하기 시작했을 때 튀어나온 거다."

"돈을 아끼려는 순간 뮤지션은 죽는다"

- 시대가 뮤지션을 낳는다는 얘기다. 그렇게 보면 지금은 더 비관적인 상황 아닌가. 음악은 감상의 대상이 아닌 BGM(배경음악)이 됐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 비관론은 음악이 세상에 존재한 이래 늘 있어왔다. 언제 뒤집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음악은 비주얼 없이 오디오만 존재하는 매체기 때문에 다른 예술과 결합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매체다. 그런 면에서 종합 엔터테인먼트화될 가능성이 남아있다. 자꾸 일회적이고 상업적인 매체와 결합해서 그렇지. 깊이 있는 다른 예술과 결합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간단히 말해서 핑크 플로이드가 영화 <더 월>이나 콘서트에서 보여준 종합예술과의 결합이 아니었으면 단순한 변칙 블루스 밴드로 끝날 수도 있었을 거다. 단지, 지금 방법을 못 찾고 있을 뿐 결합할 수 있는 매체가 존재하지않는 건 아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여러 토양이 필요하다.

우선 아이돌에 대항하는 아티스트의 축을 이루기 위해서는 콘서트 인프라가 있어야 한다. 콘서트에서 아이돌은 라이브를 중심으로 하는 아티스트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인프라가 없는 거다. 미국에서 스톤 템플 파일럿츠 공연을 2만원이면 봤다. 국내 가수를 보려면 8만원을 내야한다. 당연히 공연 사업이 안되는 거지.

여기서 화살은 정부에게 돌아간다. 콘서트는 최약체 산업이다. 여기서 무슨 세금을 뜯어간단 말인가. 면세 정책도 될까 말까 한데. 아티스트에게 돌아가는 돈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건 싸움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총탄이다. 그러나 돈을 벌면 몽땅 음악에 투자할 각오가 돼있는 뮤지션한테조차도 대중들은 돈을 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거리의 악사가 없는 이유는 단속도 구속도 아니다. 거리에서 공연해도 사람들이 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뮤지션에게 나가는 돈은 아낄 수 있는 한 아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뮤지션은 죽는다. 이런 상황에서 뮤지션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음악을 하는 것밖에 없다. 시대가 어떻게 바뀌는지 관찰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영악해 봐야 소용없다. 제작자들이 영악해져야지. 너무 영악하면 음악 못한다. 그렇다고 너무 띨띨하면 음악할 수 있는 환경을 손에 넣지 못하고. 적당히 띨띨해야 한다.

내 경우를 돌이켜봐도 그렇다. 내가 솔로앨범 두 장을 내고 밴드로 전환했을 때 그렇게 안 했으면 오래 못 갔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결과론적인 얘기다. 솔로 두 장이 대박이 터지니까 '이제 회사에서 뭐라고 못하겠지. 자, 하자' 이렇게 된 거다. 사전에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리고 모노크롬을 내고 다시 풀 밴드로 돌아간 것도 '아, 막 두드려야지 이게 뭐냐!'는 욕구 때문이었다. 기본적인 자기 욕구에 충실하고 자기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결론적으로는 가장 영악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신을 잃지 말아야지. 좋은 음악을 만들고 그걸 대중에게 보여주면 반응할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게 내가 사이렌뮤직을 설립한 이유다. 싱어송라이터이고 사람들이 들을만한 음악을 만들지만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빠져있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메이저로 흡수시키는 게 목적이다. 그러다 보면 뭔가 바뀌겠지."

"인디는 수권능력 없는 약체 야당의 난립"

- 사이렌뮤직에도 스키조, 피터팬 콤플렉스 같은 팀들이 있지만 고스트 스테이션을 통해서도 인디 음악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최근 인디 뮤지션들의 흐름이 어떻다고 느껴지는지.
"굳이 인디라 할 것 없는 사람들도 인디로 몰린다. 댄서블하고 상업적 음악을 만들지만 얼굴이 상업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댄서블한 음악을 들고 인디 신으로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사노바 뮤지션도 인디다. 디스코 뮤지션도 있다. 외국 같으면 메인스트림에서 놀아야 할 뮤지션들이 다 인디에 머물러 있다. 매스미디어가 철저하게 폐쇄적이기 때문에 여기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인디가 된다. 인디의 풀이 대단히 다양해진 건 이런 상황에 대한 역설적 결과다.

R&B 아이돌 진영이 더 이상 히트를 내지 못하는 무능한 집권 여당이라면 인디펜던트는 수권 능력이 없는 약체 야당의 난립이라 볼 수 있다.(웃음) 정권교체를 하려면 인디 뮤지션들을 묶어 세력화하고, 콘서트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에서 매스미디어로 뚫고 들어가야지. 제일 문제는 자신감의 결여다.

인디 뮤지션들이 자기 노래를 안 틀어줄 거라 생각해서 방송사에서 음반 심의를 안 받는 경우가 많다. 어떤 노래 괜찮아서 틀어보려 하면 심의가 안 돼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가 직접 심의실로 가지고 가서 심의받아서 튼다. 만약 언젠가는 록 스타가 될 거라는 자신감이 있으면 그런 일은 안 생기겠지.

고스트 네이션에 게스트 출연하면 웬만하면 검색어 1위는 한다. 일반 음악 듣던 사람에게는 인디가 너무나 신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만, 지금이라도 라디오 3사에서 아이돌 틀어봐야 아무 메리트 없다는 거 깨닫고 몽땅 인디 음악만 틀면 인디는 순식간에 세력화될 수 있다."

"인디 세력화 필요... 매스미디어도 거부 못해"

- 음악계에 대해 너무 비관적인 얘기만 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거라는 가능성, 혹은 징후는 느끼지 않나.
"최소한 음악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는 거다. 20세기 후반 들어 홈스튜딩 테크놀로지가 보급되면서 대중에게 음악을 생산할 수 있는 수단이 넘어왔다. 컴퓨터가 한편으로는 뮤지션을 잡아먹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뮤지션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고, 쌓이는 메탄에너지가 결국 지금의 메이저를 밀어낼 거라고 본다.

방송사 PD들도 변했다. 옛날처럼 기세등등한 상황이었다면 스키조나 피터팬 콤플렉스 같은 팀들 TV에서 안 받아 줬을 거다. 우리 회사에서 프로모션할 때도 인디 밴드가 나와서 반응 있었던 적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녹화 현장에서 반응이 나온다. 윤도현 러브레터에 피터팬 콤플렉스 나왔을 때 검색어 1위하고 홈페이지는 방문자 폭주로 다운됐다.

그 사람들도 생각을 바꿀 기회가 있어야 한다. 당장 한 주 한 주 시청률이 나와야 프로그램을 계속 할 수 있는 입장이니 모험은 할 수 없어도, 만일 매스미디어에 진출한 인디 뮤지션이 대중의 관심을 끈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지."

- 하지만 방송국의 턱이 높다. 당신이 갖고 있는 루트와 여타 인디 레이블들이 가진 루트는 차원이 다르다. 인디 레이블 제작자들은 PD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든 게 엄연한 현실이다.
"사이렌에 소속된 팀들이 방송 출연하는 것만으로는 답이 안 나오니 사업 방향이 여러 가지다. 우선 여러 곳에서 인디를 세력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거리와 클럽에서 시작해서 끝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각 단계의 길을 건설하려고 한다. 긍극적으로는 그 길이 건설돼도 뮤지션이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다며 거부하는 일이 벌어져야 하지 않겠나."

- 뮤지션이 방송에서 활동할 때 가장 문제되는 게 립싱크다. 밴드 사운드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열악한 방송환경에서 립싱크는 필요악이라는 얘기도 있다.
"립싱크에 대한 편향적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 외국은 우리랑 다르다. 분명히 돈을 내고 보는 공연에서 립싱크를 하면 문제가 된다. 콘서트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라이브라는 게 누구나의 상식이니까. 그러니까 법적으로 콘서트에서 립싱크를 할 경우 별도 표시를 하라는 거지 TV에서의 립싱크는 논란이 되지 않는다. 비틀즈,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도어스, 너바나. 다 TV에서는 립싱크했다. 그게 이슈가 되지도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립싱크란 프로덕션 기획 상품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연예인을 구박하기 위한 용도에 불과하다. 진짜 음악을 사랑해서 라이브를 보려면 돈을 내야하는 거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이렇게 기브 앤 테이크 교육이 안 돼 있는지 모르겠다."

- 음반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MP3를 유료로 다운받아도 바보 취급을 받는 분위기다. 음악은 공짜라는 인식이 팽배해있다.
"우리나라는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 아닌가. 나는 우리 민족이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보는데, 그들 말을 받아들이자면 똑똑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얘긴데 그래서 피곤하다. 이 나라에 필요한 건 바보다. 우리나라 인구 중 천만명만 바보면 행복해진다. '우리 애들 영어과외 안 보내고 조기 교육 안시킬 거다. 때 되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딱 천만명만 되면 우리나라 행복지수 올라간다."

ⓒ 싸이렌
"다시 정치할 생각 없다"

-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의 문제가 된다. 올해가 대선의 해다. 지난 대선 때처럼, 이번에도 특정 후보를 공개 지지할 생각인가.
"생각 없다. 그때도 생각 없다가 갑자기 한 거고 이번에는 갑자기 할 것 같지도 않다. 정치할 거라는 의심을 많이 받고 있어서 이번에 한 번 더 얽힐 생각하면 끔찍해진다. 벌써 다음 대통령를 뽑는 해가 됐는데 지난번에 노무현 진영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현기증 날 정도로 증오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꽤 되니까."

- 얼마 전에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기사를 봤는데 악플이 엄청 나더라.
"조선일보니까. 조선일보 독자들은 신해철을 철천지원수로 알고 있는데 그 신문에 내 기사가 나오니까 밉겠지. 음악 얘기만 했는데 거기서 노빠, 이런 얘기는 대체 왜 나오는거야.(웃음)"

- 얼마 전 한 포털 사이트에서 명사들을 대상으로 네티즌에게 궁금한 걸 묻는 이벤트를 벌였다. 하고 많은 질문 중 당신은 악플에 대한 질문을 던졌더라. 악플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그 중에서는 악플이 하나의 비판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보나.
"단어 자체의 사전적인 의미를 좀 알고 얘기했으면 좋겠다. 적절한 수위 이상을 훨씬 벗어난, 이미 비판의 의미를 상실한 걸 악플이라고 부르지 않나. 단지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얘기를 했다고 악플이라 부르지는 않는단 말이다. 인권을 침해하고 악성루머를 퍼트리는 수준 의 악플을 왜 비판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 악플러가 판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그 질문에서도 악플이 근본적인 민족성인 발로냐고 했다. 최근 10년 동안 대중이 처음으로 스스로 쪽 팔리다는 걸 깨달은 건 이번 악플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현재 인터넷 문화에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조성된 게 이번이 처음 아닌가. 지금 같은 경우는 인터넷 실명제에 찬성하는 여론이 대세화되는 조짐이 보인다. 하지만 전에는 부정적이었다. 이것만 해도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로 봐야지. 사실 그 자체가 부끄러운 거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해서 실명제라는 제도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니 말이다.

우리 국민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고, 우수한 것도 아닌데 자꾸 우수하다고 선전하고 가르치는 게 문제다. 계속 허풍을 떤다. 지금 우리 국민성이 좋을 수가 없다. 생각해봐라.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가 몇 년 됐나. 동족상잔전쟁이 일어난 게 이제 반세기. 찌들대로 찌들고 고생할 대로 고생하고, 사회 이념이라고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얘기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 이념은 잘 먹고 잘 살자, 하나밖에 없다.

경제 얘기를 왜 그렇게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정권이나 정부의 치적의 포커스가 경제로만 몰리는 것도 이해가 안 간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들이 우리처럼 불행하게 사나. 그렇지 않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해리슨 포드가 수명이 정해져 있는 사이보그에게 얘기한다.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기분이 어떠냐.' 우리는 그런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낙오와 도태, 끊임없는 경쟁에 대한 공포. 원론적인 얘기지만 인간은 그렇게 해서 행복할 수 없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경제지수에서 결정난다는 것 자체가 무지막지한 착각이다. 선진국 다니면서 느끼는 게 당황스러운 친절을 길거리에서 받았을 때, 우호적인 사람들로 가득찬 거리를 봤을 때다. 우리의 거리는 적대적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이 속에서 어떻게 행복하겠나.

도로교통에서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난다. 차선 변경할 때 보자. 앞차가 아무 이유없이 막는다. 내 차선 막는다고 빨리 가는 게 아닌데도.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가 있나. 무의식적으로 딴 놈이 내 앞으로 오는 게 싫다, 양보하는 게 싫다, 그런 심리가 깔려있는 거다. 런던에 있을 때 운전하고 다녔다. 유럽은 우리와 차선도 반대고 핸들도 반대다. 얼마나 힘들겠나. 그런데 한국보다 편했다. 내가 깜빡이 켜주면 뒤차는 무조건 서주니까."

"한민족 우수성 교육이 배타적 문화 만들어"

- 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됐을까. 개발독재,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였을까.
"박정희, 전두환보다 뿌리가 깊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도 무지막지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토양이 잡혀 있으니까 그 분위기에 올라탈 수 있었던 거지. 이승만이 국부 운운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럴 토양이 있었던 것이니 굉장히 오래된 얘기다. 지금만 해도 끊임없이 경쟁심을 부추기지 않나. 아마 내 속에 있는 얘기 다하면 아마 길거리에서 맞아 죽을 것이다.(웃음)"

- 우리가 배타적이라는 건 사실인 것 같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시각만 봐도 그렇고.
"근본적으로 한민족이 인종차별주의자인 게 한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데서 교육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다른 민족에 대한 존중도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런 인식은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다. 허구한 날 국악의 우수성 운운하는데 미치겠다. 물론 국악 우수하다. 하지만 태국음악, 인도음악, 일본음악 다 우수하긴 마찬가지다.

서양사람들이 국악 공연 보고 기립박수 치고 립서비스 차원에서 '원더풀!' 그러는 건데 생각해보면 그들은 세련된 거지. 듣도 보도 못한 음악에 기립박수 치는 건데. 그걸 보고 국악이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음악이라고 하면 미쳐버리지. 지독한 콤플렉스가 지독한 오만으로 표출되는 거다. 꼭 우리 조상이 우수해야 2007년 지금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건가. 하여간 초중고 12년간 선생들한테 남대문의 선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내용을 듣느라 죽는 줄 알았으니까."

- 그런 내용을 제도권 교육에서 군대까지 거치면서 받다 보니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다. 당신의 아이가 크면 제도 교육을 받게 할 건가.
"그건 내가 결정할 게 없다. 아이가 즐거워한다면 시킬 수 있다. 자기 오류를 수정할 기회는 나중에 스스로 찾는 거니까. 나만 해도 남존여비 집안에서 마초, 극우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면서 자랐다. 하지만 스무살 때 내가 택한 길은 다른 거였다. 지금도 인터뷰 기사 뜨면 '신해철, 이 노빠! 전라디안!'하면서 난리 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난 오리지널 경상도거든. (웃음) 나 대구 못 간다. 온 집안 친척들이 다 죽이려고 해서."

- 다시 한번 묻자면, 정말 정치할 생각은 없는 건가? (웃음)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정치 안 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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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이것이 저술가의 서재다

현대와 삼성의 배구 맞대결 기사를 읽다가 손가락 가는 대로 끌려들어가 읽은 기사는 한겨레의 '재모아빠' 혹은 구본준 기자(http://wnetwork.hani.co.kr/bonbon/)가 쓴 '필진네트워크' 기사이다. 지면에 게재되는 기사는 아니라는 뜻이다. 건축사학자인 임석재 교수의 '거대한 자료실' 탐방기사인데, 얼마간은 부러운 마음으로 죽 둘러보았다(나는 내달 '고아원'에 있는 책들을 근처 다른 '고아원'에다 옮겨놓아야 한다). 저술가가 되면 이런 자료실을 갖게 되는지, 아니면 자료실을 마련해야 저술가가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한 가지 '모델'로 창고에 넣어둔다(하긴 이웃나라엔 '고양이 빌딩'을 갖고 있는 저술가도 있다고 하니 '저술가의 서재'가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은 아니지만).

한겨레(07. 02. 16)[필진] 이것이 저술가의 서재다

2년쯤 전이었습니다. 모처럼 건축사학자 임석재 교수를 만났는데, 근황을 묻자 “서재를 구해 책들을 옮겼다”고 하더군요. 새로 구한 서재는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광주라고 했습니다. 임교수의 집이 직장인 이화여대 근처 아현동인 것을 알고있던 저는 왜 가까운 집 놔두고 그렇게 멀리 서재를 구했는지 궁금해 다시 물었습니다. 임교수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자료가 너무 많아서 20평짜리 집에서는 불가능한 지경”이란 겁니다. 게다가 자기는 공기 좋은 곳이 좋으니 금상첨화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도대체 자료가 얼마나 되기에 집까지 옮겨야 하느냐고 말이지요. 임 교수는 집안 전체가 자료로 가득찼다고만 빙긋 웃었습니다. 무척이나 궁금해서 언젠가 한번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5일, 임석재 교수의 광주 아파트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10여년 동안 무려 28권의 책을 쓴 우리 시대 대표적인 건축글쟁이, 그 글쟁이의 서재를 찾아가는 제 연재 기사 <한국의 글쟁이> (한겨레 출판섹션 ‘18도’섹션 참조) 열아홉번째 초대손님으로 임 교수를 모시게 된 것이 제가 임교수 댁을 찾아가게 된 경위입니다(*그러니까 다음주 연재가 '임석재 교수' 편이겠다).

임교수의 집은 광주 시내를 살짝 벗어난 언덕 위에 잡은 비교적 대단지 아파트였습니다. 평수는 제법 넓었는데 방이 5개 짜리더군요. “서울에서 드는 비용으로 2배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임교수는 설명했습니다.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는 곳이 아닌 완전한 집필실로 마련한 공간입니다. 임교수가 현관문을 여는 순간 현관에서 보이는 집안 모습은 이 곳이 ‘거대한 자료의 바다’임을 이미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현관에서 마루로 이어지는 짧은 복도 같은 공간부터 철제 책장이 놓여있는 모습이었습니다.

IMG_2158(3232).jpg

집안 조금이라도 빈 공간에는 책장들이 열병하듯 서있었습니다. 마루는 그저 큰 방일뿐이었습니다. 마루 가운데에는 책상이 있고 나머지 모든 벽은 책장을 놓았습니다. 자, 마루 책상 앞에 선 임석재 교수입니다.

임 교수는 마침 슬라이드 필름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임교수는 글쟁이이면서도 사진을 직접 해결합니다. 사진을 거의 전문적으로 찍는데, 내년도 이화여대 다이어리를 임교수가 찍은 우리나라 전통가옥들 사진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52주별 그림으로 넣을 52개 전통가옥별로 좋은 사진을 고르던 차였습니다. 책상 위에는 슬라이드보관통과 사진을 살피는 도구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5개의 방은 방 하나 하나가 모두 서재였는데, 나름대로 분류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사진 자료를 넣어놓는 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물별 자료방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축가, 미술가, 철학자 등 개인들에 대한 자료들을 모은 방입니다. 또다른 방 2곳은 시대별 자료방입니다. 고대부터 19세기까지 자료방, 그리고 19세기 이후 현대건축까지 자료방 등. 마루는 집필공간 겸 현대건축 자료들 공간입니다. 우선 근대건축 이전 자료들을 모은 방입니다. 카메라도 모두 이방에 놓았더군요.

조금의 빈 틈에도 책장을 넣을만큼 자료는 많았습니다.

각 자료들에는 찾기 쉽도록 종이로 항목을 붙여놓은 모습입니다. 임교수 자료실의 압권은 바로 슬라이드 사진을 모아놓은 방입니다. 물론 모두 임교수가 직접 찍은 필름들입니다. 부피가 나가는 책도 아니라 조그만 슬라이드 사진필름이 도대체 몇 개나 되기에 방까지 따로 만들었냐구요? 자그마치 20만개라고 합니다. 클리어파일처럼 생긴 두꺼운 파일철에 한 쪽당 20개씩 끼워 보관합니다. 자, 한번 보시죠.

보시면 낯익은 생활용품인 방습제 ‘물먹는 하마’가 있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습기흡수용품을 넣은 것은 슬라이드 필름이 습기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이 필름철 한쪽한쪽 사이에 넣기 위해 신문지를 크기를 맞춰 1만쪽을 잘라놓은 점입니다. 습기 빨아들이는데 신문지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임교수가 신문을 주워다 모은 뒤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종이를 잘랐다고 합니다. 정말 자료 관리가 저술가에겐 생명과도 같구나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사진철에는 꼼꼼하게 필름 항목을 적어놓았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이름이 보이네요. ‘English Baroque, Christoper Wren'.

(#크리스토퍼 렌은 영국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갑니다. 원래는 자연과학자로, 뉴튼이 칭찬할 정도의 대단한 양반이었다는데, 옥스퍼드대 천문학과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놔두고 건축가가 되었답니다. 참 재주도 많은 분이죠? 대표작은 영국 세인트폴 대성당입니다. 이만틈 설명하고서 사진도 안보여드릴 순 없으니 세인트폴 성당 사진 첨부합니다.)

학자들의 일상은 자료와의 전쟁이자 동고동락입니다. 스스로 분류한 자료가 아니면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드는 불가능한 도전을 시도하게 됩니다. 건축이란 분야 속성상 임교수의 도전은 다른 인문학자들보다 훨씬 돈이 듭니다. 왜냐구요? 건축책들은 비싸거든요. 사진들이 들어가면 책도 크구요. 보통 원서가 권당 10만원 가까이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거대한 자료실 속에서 임교수는 읽고 쓰고 자료를 정리합니다. 그의 삶을 보면 글쓰는 팔자가 따로 있다 싶습니다. 아니, 글쓰는 기계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본인도 씨익 웃습니다. “참 미련하게 살지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사나 싶을 때가 있어요.” 그 결과 28권의 책이 독자들과 건축을 이어주었으니, 보람은 클 것입니다.

임 교수는 방학이면 카메라를 짊어지고 해외로 떠납니다. 취재와 자료수집을 위한 출장인데요, 그 중간중간 사서 모은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머그잔’입니다. 나라별 특색있는 기념품으로 하나씩 모은 것이 부엌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선반 위에도 한줄로 머그잔이 서 있네요. 건축학자라서 그런지 건축물 그림이 들어있는 머그잔들을 모아놓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술가들의 서재가 모두 임석재 교수의 서재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학자이면서 책을 쓰는 저술가들의 서재는 이렇게 자료실이 되고 맙니다. 얼마나 많은 자료에 투자하고 관리했느냐에 따라 저술의 양과 질이 바뀌기 때문에 오늘도 글쓰는 학자들은 모으고 또 모읍니다. 그게 저술가의 팔자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모으는 과정 자체가 즐겁기에 모으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죠.

자, 그러면 퀴즈! 책이 이 정도면 한 몇권이나 될까요?

임석재 교수에 대한 기사는 조만간 <18.0> 섹션으로 만나실 수 있습니다. 구경 잘 하셨습니까? 다음에는 다른 저술가의 서재를 엿보도록 하겠습니다. 명절들 잘 보내세요.

참, 임교수 댁에 있는 책은, '1만권'입니다.

07. 02. 19.

P.S. 4-5년 뒤면 나도 1만권쯤의 장서를 갖게 될 터인데 이를 어이해야 할 것인지, 미리부터 걱정스럽다. '물먹는 하마' 정도는 미리미리 준비해둘 수 있겠건만...

P.S.2. 한편 아래는 지난 2000년 10월말 한겨레의 '인문학 데이트' 연재란에 실렸던 임석재 교수에 대한 소개이다. 저서가 그간에 훨씬 늘어난 것은 물론이다. 작년에 나온 책으론 <서울, 골목길 풍경>(북하우스, 2006)과 '임석재 서양건축사 3'에 해당하는 <하늘과 인간>(북하우스, 2006)이 있다.

임석재는 누구?

△1961년 서울 출생

△1980~1987년:서울대 건축학과 및 같은 대학원

△1989:미국 미시간대 건축학 석사.

△1992: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건축학 박사

△1993년:원도시 근무

△1994년~현재: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저서:<추상과 감흥:비엔나 아르누보 건축>1·2(문예마당, 1995), <장식과 구조미학:불어권 아르누보 건축>1·2(발언, 1997), <형태주의 건축 운동:형태와 조형의지>(시공사, 1999), <생산성과 시지각:뉴 브루털리즘과 대중사회>(시공사, 2000), <한국 현대 건축 비평>(예경, 1998),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대원사, 1999), <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임석재 교수의 현대 건축 이야기>(북하우스, 2000), <한국적 추상 논의>(북하우스, 2000) 등 다수.

임석재가 말하는 임석재

철들면서 시작된 사춘기 때 나의 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사람들 사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집이라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조형 환경은 끝없는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서울의 오래된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다른 한 가지는 시(詩)였다. 한국 현대시의 고전들을 암송하고 스스로 시작을 해보기도 하였다.

이 두 가지 관심이 합쳐져 나는 지금 건축 역사와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가고 있다. 아직은 사춘기 때의 감성과 열정이 유지되고 있다고 자평하는 편이다. 나는 사람들 사는 방식에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사람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일년 내내 대부분의 시간을 책 읽고 책 쓰는 데 보낸다. 건축에 요구되는 실용성과 현실성은 골목길 탐방과 각종 매체를 통해서 얻고 있다. 요즘은 그 동안 공부해온 내용을 응용할 설계 작업도 시작하여 1~2년 후면 처녀작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연구는 20세기 서양 근현대 건축사, 한국 현대 건축사, 서양 건축사의 세 분야로 나뉜다. 각 분야에 대해 방대한 양의 저서 시리즈를 기획하여 매일 열심히 공부하며 집필하고 있다. 이미 상당수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런 연구의 최종 목표는 나만의 건축 사상을 세우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 끼여 철학 강의를 듣는다. 혼탁한 세상에 한 줄기 빛을 던질 수 있다면 더 이상 원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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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나라도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

오마이 뉴스에 실린 소설가 황석영의 기고문을 옮겨놓는다. 작가는 얼마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 총대 멜 생각있다”는 발언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론 6월쯤에 그의 <오래된 정원>에 대해 강의도 예정돼 있어서 관련자료들을 모아야 될 형편인데 유익한 참조물이 되겠다. 물론 작가의 '총대'는 올 12월에 가서야 보다 확연한 윤곽과 결말이 드러날 듯하지만...

오마이뉴스(07. 02. 05)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소설가 황석영씨가 지난 1월 2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에 나라도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습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230809551&code=910100). 그는 왜 작가로서 얼룩이 튀는 것을 감수하고서까지 이런 선언을 했을까요? 현재 프랑스 파리에 체류중인 황석영씨가 그 배경을 밝히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그는 다섯 번의 변화를 겪은 자신의 사상 편력에 대해 말하면서, 현재 우리 상황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논란이 된 '민족문학 작가회의'의 명칭 변경 논란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습니다.<편집자 주>

1. 나는 뭐냐

나의 글쓰기와 사상적 편력의 길을 세밀히 밝히는 일은 독자들에게도 지루한 것이 될 테지만 방향 전환의 모퉁이를 몇 대목 회상해보는 것은 어떨지.
나는 청소년 시절에 문단에 어정쩡하게 나오고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발표하게 될 때까지 그야말로 '문예반'으로서 내면을 파고드는 탐미적인 습작을 했다. 군에 입대하여 해병대로 베트남 전장을 다녀온 뒤에 사회라든가 역사라든가 하는 것들에 눈을 돌렸다. 이것이 첫 번째 변화였는데 의식이 들고 나서 작품을 쓴 내용은 그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남도를 떠돌며 겪었던 체험들을 스스로 자각해가는 과정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객지>라는 나의 체험으로 각색되었고, 평자들은 여기서 민중문학이라는 개념을 발견해냈다. 내가 공장 취업과 농촌 하방을 하면서 유신시대를 향하여 격문을 쓰듯이 <장길산>을 썼던 것은 일제시대에 벽초가 <임꺽정>을 쓰던 경우와 비슷했다. 이 기간에 나는 뒤늦게 기층민중이라는 당시의 사회과학적 단어가 아닌 살고 먹고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전위냐, 현장이냐' 하는 논쟁이 있었을 때에 당시의 많은 벗들은 각자의 길을 택하여 시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작가였으므로 당연히 가장 문제가 많다던 전라도로 하방했다. 그리고 김지하가 투옥되면서 나에게 떠넘겨준 현장 민중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피의 광주를 겪는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였던 셈이다. 당연히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은 급진화했다. 우편향이 강요되었으므로 좌편향이 시작되었다. 문예 각 장르의 헌신적인 선전 활동은 광주를 알리겠다는 뜨거운 전제가 있었지만 예술성은 스스로 포기해야만 되었다. 우리는 기꺼이 각자의 재능을 반납하고 한때의 시사적 문제들을 다루는 마당극 대본이나 노래 만들기나 성명서 작성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필름, 판화 등을 제작해냈다.

광주항쟁을 알리는 보고서를 편집·기록한 뒤에 구속되고 당국의 종용에 의하여 베를린에서 초청받은 '제3세계 문화제'에 참석했다가 유럽과 미주, 일본을 1년여 동안 유랑하게 된다. 이것이 세 번째 변화의 계기였다. 바깥에서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했던 것이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반한 인사로 해외에 망명 중인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북은 수만리 타국에서 오히려 지척이었다.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간신히 얻게 된 직접선거의 기회였지만 양김씨의 분열로 쓰라린 좌절을 겪은 뒤에 기력을 회복한 민주화 운동 진영인 노동자, 농민, 빈민, 교사, 학생, 재야 운동권은 드디어 '전국'이라는 이름을 앞에 걸만큼 성장했고, 이들 '전씨5형제'의 연합적 집행부는 물밑에서 논의했다. 그동안 군사정부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가 고조될 때마다 북을 빌미로 삼아 각종 간첩단 조직을 조작하여 탄압했다.

노태우의 7·7선언을 계기로 '자주적 민간교류'가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와 나의 방북이 결정되었고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순진하기도 하여라! 나는 그 길이 십여 년이나 걸릴 고행의 길이었다면 솔직히 스스로 조직했던 민예총을 탈퇴하고 입산수도의 길이라도 떠났을 것이다. 그저 귀싸대기 몇 대 맞고 끝날 줄 알았다고나 할까. 내가 북에 가서 경험한 것은 몇 번 밝혔지만 '감동과 절망'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일구어낸 우리 백성의 '생활력'에 감동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그 물샐 틈 없는 '통제'에 절망했다.

베를린에 거처를 정하고 있던 무렵에 국내에서는 나의 방북을 결정하고 지지해주었던 벗들이 뒤늦게 제도 정치권에의 입문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나는 마치 헹가래를 받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경기장에 불이 꺼지고, 선수와 관객들도 모두 사라진 어둠 속에 홀로 누워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날 장벽에서 쏟아져 나오던 동베를린 시민들과 환호하던 서베를린 시민들이 뒤섞인 축제의 광장에서 혼자 울었다. 뼈저린 외로움 속에서 나는 빛나는 개인을 발견한다. 그것이 나의 네 번째 변화였다.

그리고 뉴욕을 떠돌다가 들어와 투옥되어 5년을 보내면서 나는 감옥의 독방 속에서 뒤늦게 일상을 배운다. 그것이 다섯 번째 변화다. 나는 출옥 이후 지금까지 형식으로서의 '자아'와 현실과 내용으로서의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추구해 오고 있다. 나는 저 떠들썩한 우여곡절 속에서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기는 했다. 나는 이미 노인이지만 상상력은 아직도 푸르게 젊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직업작가'라는 프로 의식을 더욱 강력하게 유지하고자 한다.



2. '총대를 메겠다'는 뜻에 대하여

지난 1월, 3주 동안 서울에 체류하다가 31일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하루도 안 되는 동안에 획기적인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이다. 나는 세계체제 전환기의 작가로서 현재의 해외 체류가 나에게 주는 여러 가지 유익한 점들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나 자신과 한반도로부터의 거리는 더 냉정하게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게 했으며, 세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성찰하게 해준 기간이었다.

파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떤 때에는 서울보다도 더 번거로운 사교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만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십여 년 만에 연락을 해오는 때도 종종 있다. 런던에 체류할 적부터 옛 벗들이 찾아와 많은 걱정거리를 쏟아 놓았다. 지난 삶을 돌아보는 회한과 시대에 대한 우울한 전망이며 무력감 따위들이었을 것이다. 작년부터는 주위의 후배들도 여러 가지 걱정들을 주고받더니 드디어 뭔가 해보자는 데로 결론이 났다.



늘 하던 얘기지만 84년인가 광주에 살던 무렵이었는데, 홍남순 변호사가 고희를 맞았고 양김씨도 가신들과 더불어 일제히 내려왔으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와신상담하던 재야 각계 인사들도 모여들었다. 사실 고희 기념은 구실이요, 광주압살 이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복원을 위한 모임이 되었다. 그때에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라 내가 그래도 <장길산> 연재로 밥술깨나 먹는다고 삼사십대는 모두 운암동의 우리 집으로 몰려왔는데 160여 명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아마 맥주를 팔십짝 가까이 마셨을 것이다. 마당에, 거실에, 계단에, 이층에 방마다 꼬부리고 삼삼오오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웠다. 모두 옥살이에, 고문에, 도망에 심신이 피폐했지만 기개는 살아 있었다. 그들 모두 어디로 갔는가?

지금 4개 당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제각각의 삶의 굴절을 거치며 세속적인 출세나 좌절을 맛보았다. 지금 내로라하는 정치인들 모두 거기 있었다. 그 시작은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군부로부터 주어진 6·29 이후였다. 내가 현재를 '87년 체제의 종언'이라 부르자는 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 다함께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돌아가자 벗들이여, 그 때로! 그리고 생각해보자. '84년 저 피의 현장 광주에 모여서 미래를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그 때로 돌아가자!'라는 것은 이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낭만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아직도 하는 꿈같은 잠꼬대로 들리는가.



나는 정치하는 벗들이 가끔 상대의 궤변을 허위라고 공격할 때에 '소설 쓰지 말라'하고 얘기할 적마다 심한 모멸감을 느끼던 사람이다. 스스로 직업작가라고, '책장사'하는 처지라고 자학적으로 얘기하던 것도 그 이후부터는 삼가게 되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대중과의 접점은 누구에게나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그 접점을 잃으면 대중과의 소통도 끝이 난다. 그러나 소설이란 세상 도처에 널려있는 삶의 진실을 그럴싸하게 재현해내는,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6·29는 군부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카드였고 기진맥진 그것을 받아들인 민주화 세력은 분열 이후에 스스로 3당합당이라는 미궁에 빠지고 만다. 그것의 어정쩡한 귀결이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이며 여당과 야당의 가건물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대등한 가치 평가는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어떻게 대등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가 가치일 수는 있어도 산업화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행사장에서 애국가나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한 적이 없다. 유명한 얘기로 5공시절 광화문의 그 살벌하던 국기 하강식 시간에 행인들이 모두 얼어붙어 중앙청의 태극기를 향하여 서있던 때에 나는 시인 김지하, 김정환과 셋이서 만취하여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그것은 민주주의만이 존엄을 가지고 국기와 애국가에 대한 예의를 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의 땀과 피로 이루어진 민주화시대 이후에 나는 우리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을 세웠다고 말한다. 산업화도, 민주주의도 이름 없는 민중들의 업적이다. 감히 아무나 나서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의 구호는 아직도 민주주의이며 다만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 선진적 민주주의다. 그 짧은 단어 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들어있다.

내가 광대처럼 또 이제 나서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으로 분위기 일신의 바람을 잡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로서의 본능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느 자리에서나 좌중의 분위기가 침체되면 그게 '내 탓이거니' 여기는 못난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총대'의 본뜻이다. 나의 총대는 그러므로 '이제 나서서 다 같이 처음부터 생각했던 민주화운동 하자'는 소리다. 판은 모두 끝났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도는 깨져야 한다. 그것은 밖에서부터 스스로 잘못 기획하고 구축한 체제를 깨는 일이다. 운동성의 회복이야말로 이제는 오래전 어느 6월에 탄생했던 '시민'들의 몫이다.



3. 바깥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서구에서는 과거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개량하여 내부에 복지라든가 사회주의적인 안전장치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는 냉전 구조를 확정하기 위하여 과거의 종속적인 민간정부를 스스로 훈련, 교육시킨 군사정부로 교체됐다. 군사 쿠데타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애매한 명칭의 지역에서 하나의 일상적 유행이 되었다.

소련에서 수정주의를 선언하고 일종의 안정적인 대치 상태가 유지되면서 미국과 서구는 레이거노믹스 또는 대처리즘이라는 정직하고 노골적인 자본주의를 내놓는데 그것이 점잖게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며 그 행동 강령이 미국식 '세계화'이다.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구체화 된 것은 동구 붕괴 이후부터며 그로부터 지금까지를 이른바 '세계화 체제'라고 부른다.

웬일인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이 나올 무렵부터 제3세계의 군사정권은 차례로 민간정부로 바뀐다. 한국에 문민정부라는 이행기적 민간정부 체제가 생길 무렵부터 김영삼은 세계화를 입에 달고 다녔고 남한 자본주의는 풍요와 소비의 짧은 시대를 구가한다. 이때에는 미국이 동구를 재편성하느라고 여념이 없던 시기다. 그리고 아시아로 돌아섰을 때 IMF 사태가 터진다. 남한은 비로소 분단된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친 것을 깨닫는다. 중국의 생필품 생산 공세와 일본의 첨단기술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미국 민주당 정권의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남한의 생존 의지가 만나면서 '햇빛'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기류는 신냉전의 판도로 흘러가고 있다.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은 그 세력 판도 사이에 한반도를 두고 다시 대치하려하는 중이다. 틈새를 조심스럽게 헤집어 나간다면 분명히 생존할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북의 붕괴가 중국과 미국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노골화시키면서 대만과의 교환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눈치 채고 있는 상식이다. 북의 특정 지명을 거론하며 국토 영역 운운하는 중국이나 전작권 환수니, 주한미군 재편제니 하면서도 유엔사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주한미군사령관의 공언은 DMZ 관리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간접적 선언이다. 어쩐지 대선을 앞둔 이 시기가 매우 불안정하다. 더구나 북은 이미 핵실험이라는 비난받아 마땅한 절체절명의 강수를 두어버린 직후다. 앞으로 우리는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 더욱 지혜롭게 모든 슬기를 모아 다함께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안과 밖을 향한 운동의 전략을 모두 까발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큰 선은 보수나 진보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을 줄이고 통합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중도라는 깃발을 들어보는 것이다. 마치 독일 녹색당의 깃발처럼, 그것은 진보의 적색도 보수의 청색도 아닌 그 둘이 혼합된 보라색이다. 중도는 그러므로 기회주의가 아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공의 핵심을 뚫는 것이 중도다. 그 프레임 안에 누가 들어오든 살아서 온다면 그에게 깃발을 쥐어 주리라. 그리하여 지금의 카오스를 통합하고 북과의 소통을 살려내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최고의 책임이 주어질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4. 모든 굳어버린 원칙이나 근본주의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장을 하는 혼자에게는 '근사하지만' 다중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리라고 작정한 것은 어느 후배의 조그맣고 나직한 목소리와 또한 어느 '대가'의 큰 목소리 때문이었다. 내가 어느 신문과 엉뚱한 인터뷰를 한 것은 이를테면 정갈하게 서 있는 현대식 빌딩에 흙덩이를 던져 말끔한 유리창에 얼룩을 만든 것과도 같았다. 고정된 판을 흔들어 보고 싶어서다. 뒤에 어느 후배 작가가 '하이킥'이라는, 나에게는 낯선 표현으로 내 가슴을 흔들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8019.html). 매우 시니컬하고 자조적이지만 낮고 올곧은 음성이었다. 그리고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6월항쟁의 그날 서울역과 굴레방 다리목에서 최루탄 연기에 눈물을 철철 흘리며 돌팔매질을 하던 지금은 칠순 노인이 된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채광석이가 그 선배의 돌팔매를 피하며 '우리 편 맞겠어요!'하며 핀잔을 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조태일이도 이문구도 채광석이도 이 세상에 없다. 아, 그런데 지금 저 젊은이들을 품에 안을 선배는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언제부턴가 너무 아름다운 가치라든가, 점잖음, 선량함 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지당도사'들의 지당한 말씀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역시 문학이란 세속의 길이기 때문에. 나는 큰 목소리를 내던 내 동년배의 작가를 지난 위기의 시대 어느 현장에서도, 어느 글귀의 서명란에서도, 심지어는 회비 목록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우리가 광화문의 빌딩에서 그 바로 위층에 군사정권 당시 제도권의 문협 사무실이 있다는 이유로 김지하와 양성우 시인의 석방과 긴급조치 철폐를 부르짖으며 시위했을 적에, 모두 잡혀가고 계단에 있던 염무웅과 몇몇이 문협 사무실에 몰려 올라갔을 때에 난색을 표하던 사무국장이 누구였던가.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나, 먹고 살려고 허덕이며 써온 글줄을 신주단지 모시듯 내세운 적도 없다. 책을 사준 이름 없는 독자들에게 겸허해야 하므로. 우리는 먹고 살만큼만 쓰고 남는 시간에는 체험하고 독서하고 놀고 위기의 시간에는 항의하고 감옥 가고 그러면서 시시껄렁하게 산다. 그러므로 노대가들이 늙어가면서 글 쓰는 행위를 무슨 하늘이 내려준 형벌처럼 엄살을 떨고 과장하는 것에 구토를 느낀다.

우리는 자신의 기념관이나 기념비를 살아서 자기가 세우지 않으며 작품 이외의 흔적을 이승에 남기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노벨상 캠페인 따위는 그야말로 아이들 말로 '쪽이 팔려서' 스스로 벌린 적 없다. 노벨상에는 몇 가지의 도그마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가 딛고 있는 대지와 구체적인 현실에서 애매모호하게 멀어지게 하는 점이다. 그야말로 '먼 산에는 거짓이 많다'.

늘 말하지만 포즈로 세상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지금은 화면 영상의 시대라 외국인도 공식석상에 나서서 뭐라고 하면 그 말이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허공의 화면 속에서 캐릭터가 다 드러나고 만다. 자아, 모두들 자신의 성채를 부수고 광야로 나오라.

이제부터 나는 점잖지 않을 것이며 예전으로 돌아가련다. 온몸에 얼룩이 튀면 다시는 개량 한복 따위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거나 넥타이에 정장을 하지 않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명천 이문구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 무슨 문학상이니 기념비석이니 세우지 말라고 그랬고 자신의 껍데기를 화장하여 고향 뒷산 솔숲에 뿌려주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엄정한 가르침이다. 모두들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뭐라고, '민족'이 문제라고? 나는 근년에 '작가회의' 근처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권태' 때문이다. 물건은 안 나오면서 '말'만 무성하다. 나는 진작 감옥에서 나오면서 시인 김사인과 농담으로 '저 간판 언제 떼어내냐'고 헛헛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일단 조직이든 집이든 사람이 만든 것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쇄락하기 마련이다. 친목회 정도의 기능만 남았다면 '해소'하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 과업이다.

요즈음은 엉뚱한 객손님들이 뒤늦게 나타나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과거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위원회가 되어 조직 안에 깃들었지만, 이제는 6·15 민족문학회에다 무슨 평화포럼인지까지 있다. 내가 '민족'자를 떼든지 '해소'를 하든지 하자고 안을 내었던 것이 이시영 시인이 사무총장을 맡았던 나의 출옥 직후였다. 탈퇴를 하겠다니까, 그러면 시끄러워지니 '평회원'으로 명단만 남으라고 하여 그냥 그대로 지금까지다.

총회 전날에야 '민족' 문제가 안건인 줄을 전해 들었고 백낙청 선배와 만났다가 그의 온유한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족'을 떼어내는 것은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제안하고 끌고 간 것은 바로 남북작가회담을 성사시키고 단일 협의체를 이루어낸 젊은 문인들 자신이다. 그 뜻을 곰곰이 새겨보기 바란다.

언젠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작가와 대담을 하면서 우리는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바람을 걱정스러워하였다. 남북 분단이 민족 문제인 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지만 이제 이 분단체제가 남북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전체, 나아가 세계의 문제라는 것은 또 다시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가 동구 붕괴 이후로 이념적 방향의 한 축을 동아시아 진보, 평화, 연대로 삼은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는 무명의 '혈기방자한' 젊은 네티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세계인 작가다. 우리는 일본에서도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수많은 시민단체들과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알고 있다. 이는 중국, 대만과도 마찬가지며 오랫동안 젊은 문인들은 묵묵히 이러한 연대를 위하여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몽골, 카자흐스탄 심지어는 중동에까지 평화 시위대를 파견하기도 하면서 씨앗을 뿌려왔다.

그런데 '민족문학'을 꼭 붙여야 한다고? 그러면 그것을 떼자는 측의 가슴이나 작품에는 민족이 없는가? 뭐라고, '민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고인다고? 뭐라고, 작가의 고향은 '민족'이라고? 나는 작가란 국경이나 민족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나 그에게도 조국은 있다. 그의 조국은 바로 '모국어'가 아닌가. 혼혈아를 아직도 멸시하는 사회, 외국인 노동자를 일하는 기계쯤으로 아는 사회, 재일동포의 차별은 목청 높이 외치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교를 배척하고 밀어낸 사회가 아직도 '민족'이라고? 그것도 명색이 작가들이라는 사람들이.



몇 년 전에 가슴 아픈 일화를 겪었었다. 미국에 망명하고 있을 때의 일인데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 작품 <무기의 그늘>을 번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딘가 말투가 서툴고 어눌해서 외국인인 줄 금방 알아차렸다. 내가 왜 그 책을 번역하려느냐고 물으니 그가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입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말에 모든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 더 통화를 했는데 나는 뉴욕이고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어서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나중에야 자신이 한국과의 혼혈임을 밝혔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김수임을 아십니까?" 나는 6·25 전쟁 직전에 유명했던, 이강국과 박헌영을 주한미군 헌병사령관 차로 개성을 통과시킨 여간첩 김수임을 해방공간의 자료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안다고 그랬더니 "제가 그이 아들입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럼 누구와? 미군 헌병사령관 사이의? 그는 자그맣게 "네"하고 대답했다.

그를 기른 것은 저 유명한 김수임의 어머니, 삯바느질을 하여 딸을 대학 보내고 동경까지 보냈던 혼혈아의 할머니였다. 김수임의 이화여전 동창생인 시인 모윤숙의 회상기에 나온다. 딸이 전쟁 직후 대전형무소에서 총살된 뒤에 시신을 수습한 것도 할머니, 미군 헌병사령관이 버리고 떠난 혼혈아를 고등학교 때까지 거두어 기른 것도 그 할머니였다. 그는 입양기관의 도움으로 십대 소년을 넘기고 나서 미국에 도착했다. 그가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받았을 여러 어려움은 침묵 속에 다 들어 있었다.

피난지 학교에서도 적응이 어려워 할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나는 곧 귀국하여 구속되게 되는데 미국을 떠나기 전에 로스앤젤레스에 망명하여 '한국청년연합'을 꾸려가던 광주사태 수배자 윤한봉에게 그와 연락하라고 전해 두었고, 뒤에 들으니 그는 평화시위나 연대활동에 적극적인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도 지금쯤은 늙었을 게다.



이러한 일화는 내가 너무나 많이 겪은 일이라 끝이 없다. 예를 한 가지만 더 들어보면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한 세대나 지나서 작가 방현석과 김남일의 소개로 알게 된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은 <전쟁의 슬픔>이라는 작품을 써서 유명한데, 그는 전쟁 당시에 17세의 소년병이었다. 시간대를 맞추어 보니 그는 플레이쿠와 호이안 전선에 있던 월맹 정규군이었고 바로 같은 시각 나의 맞은편에 있던 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시아의 평화를 얘기하는 친구다.

아아, 정말 끝이 없고 장황하다. 한 가지가 백 가지라고 요즈음의 <요코 이야기>에서 또 한 번 씁쓸한 회한의 느낌이 감돈다. 나는 당시에 만주를 거쳐 평양을 지나 서울까지 내려오면서 부모님, 누나들과 함께 개성까지 와서 피난민 수용소에 있던 기억도 남아있다. 당시 해방된 뒤인 48년에 남한에서 유명했던 베스트셀러가 <내가 넘은 38선>이라는, 지금 요코라는 아이의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아무런 편견 없이 '인간의 이름'으로 겪은 고초의 기록이 모든 이에게 감동적으로 읽혔다. 염상섭도 같은 소재로 당시에 단편소설 두 편인가를 썼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일은 당연히 그냥 책이 아니라 부교재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소동을 보면서 나는 어느 낯선 공항에 서있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에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자의식에 빠진다. 우리의 이 복잡한 정체성과 단순하지 않은 표정을 어떻게 하리.

내가 '민족'의 이야기를 이렇듯 길게 공들여 쓰는 것은 우리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런 종류로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마을과 골목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그다드나 이스탄불이나 파리에서도 벌어진다. 그런 나는 모국어를 지고 다니니 어디로 튀랴.



'우리 민족끼리'가 중요하면 그건 식구들의 공간인 저 안쪽에 안방 쪽이라 할 '6·15 민족문화협의회'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민족'의 헛것에서 놓여날 때에 통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얻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미 유럽이나 아메리카와 대등한 '아시아 공동체'를 꿈꾼다. 이제 젊은 후배들은 '제3세계' 연대로 80년대의 한계와 범위를 시원스럽게 넘어가고 있다.

07.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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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우리시대의 명저 50

연초부터 각 매체마다 책읽기에 유난한 관심들을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의 '사회적 독서' 운동에 이어서 한국일보에서는 '우리시대의 명저 50' 시리즈를 연재한다고 한다. '명저'라고는 돼 있지만 목록을 보면, 당대의 베스트셀러들도 많이 망라돼 있다. '명저'라는 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책이란 뜻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한 듯싶다. 아무튼 이 50권에 대한 해제가 다 게재되면 올 한해도 다 가는 게 아닌가 싶다(하냥 섭섭할까?). 50권의 면면들을 구경해볼까라는 '무모한' 욕심도 품어봄 직하지만, 이미 펌글에 도서(상품) 이미지를 집어넣지 말도록 재차 당부를 받은 터라 자제하기로 한다(이러한 펌글도 가급적 자제할 예정이다). 맨숭맨숭하긴 하지만, 목록만을 한번 일람해보는 것으로 '책구경'을 대신해야겠다(시간이 남아서 좋긴 하군).  

한국일보(07. 01. 04) 우리시대의 명저 50

우리 저술의 숲은 건강하고 우람했다. 지성의 숲을 거니는 일은, 굳이 한 그루 한 그루의 결을 더듬고 껴안아보지 않고서도, 황홀하고 뿌듯했다. 책의 전문가들이 전해온 목록의 갈피에서 밀려오던 희열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또 저자와 책이 갖는 이름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기획팀은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 고통마저도 행복했다.

추천ㆍ자문단과 기획팀은 선행 연구로 불모의 땅을 일군 선구적 저서와 학문적으로 고전의 무게를 지닌 책, 지식 대중화를 선도한 책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또 특정 저서의 가치 못지않게 해당 저자가 우리 지성사에 미친 영향을 높이 산 경우도 있다. 시대적 담론과 이슈의 중심에 섰던 문제적 저작들도 놓치지 않으려고 고심했다.

식민지 사관과 실증 사학을 넘어 지배집단의 교체라는 독자적 사관으로 한국사를 정립한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고난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로 나아가고자 했던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서양 신학과 전통 종교사상을 대비하며 우리 문화의 보편적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한 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재야 학자로서 학문적 엄밀성과 함께 역사의 빈틈을 성실히 메워준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 서양고대철학 연구의 수원지로 여전히 마를 기미 없이 푸르게 출렁이는 박홍규의 <희랍철학논고>, 우리 역사에서 ‘자생적 근대화론’ ‘자본주의 맹아론’의 학술적 근거를 실증해 그 문제 의식을 지금까지 이어온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 해당 분야에서 아직도 이들의 업적을 넘어서는 저작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김두종, 전상운, 김용준, 유민영 등의 노작들이 그렇게 선정됐다.

암울한 군사독재의 억압을 뚫고 비판적 저널리즘의 시각에서 지성의 균형점을 잡아준 리영희, 1980년대의 질곡에 <민중신학>이라는 독보적인 신학적 응답을 제시했던 안병무, <전태일 평전>으로 1970년대와 80년대 변혁운동의 맥을 이어준 조영래, 마당극이라는 전통 연희의 현대적ㆍ변혁적 연구와 실천으로 당대 문화의 큰 정신을 구축했던 채희완, 억압의 시절을 몸으로 살았고 몸의 고백으로 시대를 움직인 서준식 정수일 홍세화의 저작들도 놓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로 꼽혔다.

경제학이 강단을 벗어나 어떻게 현실과 만날 수 있는지를 가슴으로 보여준 정운영의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고도의 과학 전문 연구분야를 대중적 글쓰기로 선도한 최재천의 <개미 제국의 발견>, 20세기 신화 열풍을 주도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동양미술의 오주석, 서양미술의 이주헌, 한시의 정민, 미학의 진중권 등은 인문학 대중화의 전범으로 꼽혔다. 또 우리 글과 우리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아프게 일깨운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우리 문학의 오랜 딜레마였던 ‘근대’의 숙제를 성실히 풀고자 한 김윤식 김현의 <한국문학사> 등도 목록에 들었다.

기획팀의 어두운 눈과 선택의 편의로 막판에 누락된 소중한 책들도 수두룩하다. 이들 책에 대한 응당한 예우는 눈 밝은 독자들의 몫으로 넘기고자 한다. 우리는 저자들이 먼저 닦은 저 편한 길을 최대한 힘들여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고자 한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지성의 독자들과 함께.

● 추천 위원 기고: 무엇이 책을 숨쉬게 하는가

광복 이후 '나라 세우기'와 상응하는 '학문의 토대 쌓기'는 광복 직후의 혼란상과 한국전쟁의 상흔 탓에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두종의 <한국의학사>, 김원룡의 <한국미술사>,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 등이 대표적이다. 수용자, 즉 독자 측면에서 보면 60년대는 전집 출판의 전성기였다. 외판원에게 구입한 문학이나 사상 전집을 거실에 꽂아두는 허영심이 팽배했으나, 그 허영심이란 바꿔 말하면 일종의 지적 허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의 60년대는 배만 고팠던 게 아니다.

특기할 만 한 것은 1970, 71년에 나온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다.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내발적(內發的) 근대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고 김현, 김윤식의 <한국문학사>도 김용섭의 연구 성과에 크게 자극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70년대는 근대화의 기치 아래 개발 독재와 정치적 억압으로 점철된 시대였고, 출판과 책도 그러한 시대 상황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회과학의 시대로도 불리는 1980년대에는 좌파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많은 지식인들이 정당성 없는 권력의 폭압적 전횡에 맞서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한완상의 <민중사회학>, 이진경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되찾은 우리 글과 말로 토대를 쌓고 틀을 짓는 시기, 어떤 의미에서는 각 분야에서 개척자적 노력이 요구되었던 시기가 1950, 60년대라면 1970, 80년대는 학문과 출판과 책이 시대와 현실의 요청에 충실히 응답하려 했던 시기다. 무너뜨려야 할 우상도, 싸워야 할 대상도, 이뤄야 할 목표도 분명했던 시대, 그래서 일종의 전선(戰線) 시대라 칭해도 좋을 그런 시대였지만 1990년대가 되면서 전선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잃은 것은 전선이었고 얻은 것은 다양성이었다. 우리 출판과 책의 지형도는 매우 다채로워진 것은 물론 훨씬 더 독자 지향적으로 바뀌었다. 개성 넘치는 문장 스타일, 입말에 가까운 글쓰기, 엄숙한 강의가 아니라 정겨운 수다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저자들이 부각됐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미학 오디세이>의 진중권이 그러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윤기가 그러했다.

최근 들어와 많은 이들이 책을 걱정한다. 그들이 보기에 독자들은 더 이상 책의 존엄을 경외하지 않는다. 어떤 주제의 얼개와 뜻을 깊이 파고드는 책은 좀처럼 환영 받지 못한다. 책의 위기, 책의 죽음까지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출판과 책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책은 위기였다. 다만 위기 속에서도 시대의 중추를 정확히 건드리며 한 획을 그은 소수의, 아니 극소수의 책들이 있었기에 책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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