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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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를 이 책 곁에 두고 싶었다. 

 

  


오래 자다 일어난 것 같은데 어둡다 문득 잠결에 친구의 전화를 받은 기억, 그러나 그 친구 이미 오래 전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은 기억, 죽어놓고도 생전처럼 또 묻던 그 말;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지?) 일어나 불을 켜고 창을 열자 파란불 들어 길을 건너는 인파들처럼 방 안으로 건너오는 눈발들, 눈발들도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지?) 창을 닫자 채 들어오지 못한 눈발들도 창을 치며 창틀에 주저앉으며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지?) 그러다 다행히 새벽 파란불 맞아 다시 촘촘하게 모여 한세상 건너가는 눈발들 새벽빛 스며 새파랗게 마치 풀밭처럼, 아니 적어도 내 눈 속엔 싱그러운 풀밭 소풍을 가 눕고 싶은 새파란 풀밭 다시 창을 열고 받아주기엔 너무나 광활한 풀밭 내가 먼저 달려나가 눕고 싶은 풀밭 그래서 창을 열고 쓰다듬다 손이 빠져 밑을 보니 아주 깊은  

 

깊은


- 신기섭 시집『분홍색 흐느낌』中,「봄눈」전문

짧지 않은 이 시를 여기에 옮기면서 콧날이 시큰하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도, 이 시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도 그랬다. 펑펑 울어버릴 수 없는 슬픔들에 서러웠고, 곳곳에 꽃처럼 만개하던 죽음이 나를 비켜감에 서러웠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면 특별할 것 없이 존재하는 나를 인정할 수 있었을지. 몰아닥치는 삶의 모호함과 내 위로 넘어지던 가족의 무게를 내 몫인 양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덮은 뒤 며칠이 지나 이 시집을 4년 만에 다시 펼쳐 본다. 시인이 등단한 2005년은 내가 대학교 4학년 때였는데 그 해 12월, 새벽 눈길 교통사고로 그는, 평상이며 바닥마다 하얗게 눈을 입고 그를 기다렸을 옥탑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스물여섯, 그의 죽음이 왠지 가슴 깊이 남아 마지막 학기를 정리하던 나를 겨울바람처럼 모질게 흔들었었다. 5개월이 지나 시인을 시집으로 다시 만났다. 죽음으로 다가가는 자신을 위로하듯 펼쳐낸 문장들. 애써 웃는 듯한 그의 문장들 위로 그의 치열했던 생이 겹겹이 베어나고 있었다. 그가 다 누리지 못한 채 놓아야 했던 젊음, 슬픔, 시절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내게 스며들수록 나는 쓸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감정들에 대해 끊임없이 자책했다.
옮겨놓은 이 시가 젊음 안에서 절망하고 분노하고 아파하던 그들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들과 비슷한 시절 안에 쓰인 시인의 시이기 때문일까. 이 두 권의 책을 나란히 포개어 놓는다. 시인에게 조문을 하듯이, 이렇게 하면 그에게 하얀 꽃이 아닌 문장으로, 한 다발의 위로를 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윤, 명서, 미루, 단……  



 그들의 이름을 천천히 적고 보니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이 든다. 저 말줄임표의 뒤엔 내가 있고, 시인이 있고, 작가가 있고, 또 누군가의 젊음들이 빠뜨린 바늘코처럼 줄지어 서 있을 것이다.
젊음이라는 게 기간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 가장 철없이 울고 쉽게 절망하고 분노하고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해 함께 투쟁하고, 무엇에든 치열히 맞서자 했던 때.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고 겹겹이 입은 패배의식에 늘 자책하고, 죽음을 동경했던 때. 그 때가 바로 내가 가장 싱그러웠을 때, 라 회상하게 되는 것 같다. 젊음의 옷이라는 게, 자유라는 게 내 삶을 날아갈 듯 가볍게 만들어 줄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공포감으로 몸 안에 뻗어나가는 불안과 괴로움에 스스로를 얼마나 증오하고 분노하게 되는지. 완전하지 못한 꿈과 완벽하지 못한 스스로를 한없이 잃어버리고 싶던 시절.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느낌, 죽음이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졌던 시절.
‘8년 만에……’ 걸려온 전화가 지나쳐온 어느 시간을 몰고 와 윤 앞에 와르르 쏟아낸 것처럼, 그 때를 떠올려 본다. 그것은 좀처럼 담기지도, 닦이지도 않고 물처럼 천천히 바닥의 굴곡을 타고 나아가 내 발 아래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조용히 웅크린다. 이내 파르르, 불안하게 흔들리는 수면에 마음이 애잔해진다. 그 안에 담긴 눈, 오늘을 상상하지 못했던 그 때의 푸르고 가벼운 눈, 스물이란 경계선을 이제 막 넘은 자의 불안정하지만 기대에 찬 눈, 살아있는 눈, 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는 잘 있노라고, 8년 전의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청춘(靑春),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
손으로 적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활짝 펴지는 푸른 봄의 시절. 모든 것이 가장 아름다운 그 때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매여야만 한다는 것. 삶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상처받고 어수룩하고 뭉툭한 자신을 고통을 참으며 깎고 깎아 진정한 자신을 만들어가는 초입 단계. 그 ‘경계의 시간’ 안에 놓인 윤, 명서, 미루, 단의 이야기는 정상을 알 수 없는 산자락의 초입에서 어떤 등산장비도 구비하지 못한 채 이제 막 한걸음을 떼려는 두려움에 찬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타인일 뿐이었던 서로가 조금씩 서로의 고리를 더듬어 찾고 그 고리 안으로 손을, 가슴을 밀어 넣으면서 그들은 한 덩어리의 세계가 된다. 그들이 보낸 시간은 함께 존재하며 서로를 찾던 그 시간은, 과거를 나누고 상처를 나누던 그 시간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유일한 세계였다. 함께 걷고 읽고 쓰는 행위 속에서 건네는 말들, 무언의 행동과 불현듯 쏟는 혼잣말 등을 통해 그들은 서로의 짐을 나눠진다.

여자에게 가장 큰 버팀목일지 모를 엄마를 죽음으로부터 빼앗겨버린 윤. 언니의 죽음을, 너무나 가까이 존재하는 손의 상흔으로부터 매일 확인해야 했던 미루. 그 죄책감에 동요하며 미루 곁을 지킬 수밖에 없는 명서. 존재의 상실감으로부터, 윤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단. 그들은 스스로의 안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를 끊임없이 헤매듯, 길을 걷고자 한다. 윤과 함께 걷기를 자처한 명서와 미루, 이 세 사람의 눈에 들어차는 세계는 조금씩 넓어지고 희망으로, 서로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지면서도 꼭 그만큼 슬픔과 절망도 함께 늘어갔다.
그러나 삶은 어쩌면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새롭게 돋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청춘을 빛내는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려주고자 했다고, 글을 연재하기 전에 이야기한 바 있지만 글의 곳곳에는 그렇게 죽음이 놓여있다. 마음을 나누던, 거울 앞에 서듯 서로의 앞에 서서 말을 나누던 반대쪽 존재가 사라짐으로 그들은 거대한 상실감의 무게로 휘청인다. 끝없이 기억을 퍼올리며 사라진 존재가 있던 시간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러나 처음과 달리 두 번째에는,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에 대면한 죽음 앞에서는 아직 함께 존재하는 누군가의 아픔을 먼저 바라보게 되고, 그 마저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매달린다. 상실은 곧, 사라질까 두려운 또 다른 무언가를 향한 거센 갈망과 욕망으로 뒤바뀐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자신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시련과 고난의 문제 앞에서 가장 강해지 않는가. 시간이, 사람이 나에게서 소중한 무엇인가를 앗아간다고 느낄 때 가장 예민해지고 민첩해진다. 미루의 죽음 앞에서 윤이 그토록 명서를 붙잡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러나 함께 있어 나눌 것보다 서로에게 앗아갈 것이 더 많았던, 각자의 안에 숨겨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에 대한 벅참이 서로에게 짐이 될 것을 뻔히 알고 있었던 그들은, 각자의 슬픔 안으로 길을 내고 나아갔다. 혼자, 남아서 그렇게, 혼자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귀퉁이를 돌아 보이는 낯선 길 쪽으로, 조금은 삶에 고통에 무뎌진 마음으로 한 해, 한 해를 나아갔다. 
 

- 함께 있으면 너와 나는 아플 거다, 흉측하게 될 거다.

함께 있자는 윤에게 명서는 처음 입을 떼고 이렇게 말하는데, 다시 볼 때마다 내 가슴이 다 철렁 내려앉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데 서로가 흉측하게 변해간다는 것의 진실을, 함께 있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마음을, 그토록 어른스럽게 서로를 놓아야 했던 그 안타까움을 알 것 같아서. 어쩌면, 어떻게든 이 고통엔 끝이 있고,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에 비롯된 이별은 아니었을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윤이 8년 전 갈색노트에 남긴 명서의 말 아래 천천히 한 마디의 의지를 새겨 넣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리운 그에게로 달려갔으리라 믿었다. 그래야만 이 책 밖으로 홀가분하게 나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이 그렇게 풀리지 않는 미로 속에서 얽히고 얽히면서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스스로의 자리에서 8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윤교수’의 존재, 젊음을 짐으로 지고 살아가는 그들을 끌어주는 그의 존재 때문이었다. ‘윤교수’는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권력과 나란히 있지만 유일하게 그들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이었다. 소란스러운 시대 안에서 그들에게 사대 밖의 꿈을 꿀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런 그의 죽음은 어쩌면 이젠 스스로 나아가야만 하는, 청춘의 시절을 벗어난 윤과 명서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들은 이제 용서할 순 없어도 이해할 순 있는, 그런 삶으로 근접해가고 있을까.

나는, 그럼 나는……

미루를 보내고 온 윤과 명서에게 윤교수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인간은 불완전해. 어떤 명언이나 교훈으로도 딱 떨어지지 않는 복잡한 존재지. 그때 나는 뭘 했던가? 하는 자책이 일생동안 따라다닐걸세. 그림자처럼 말이네. 사랑한 것일수록 더 그럴 거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학교를 그만두면서 학생들에게 남긴 윤교수 편지의 마지막 부분, 


-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있으라  


어쩌면 지금의 나는, 청춘을 벗어나는 그 목전에 서서 마지막 걸음을 떼지 못하고 종종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벗어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들을 어설프게 살아내면서, 못다 채운 것과 잃어버린 것과 하지 못한 것에 끝없이 연연하면서 매일 어제를 잊자, 하고 살진 않는지. 그래도 다행히 그 시절은 내 안에 고스란히 쌓여있었고 그렇게 윤과 함께 찾아와 내 지나온 시간들을 위로해주었다. 거기서 고독을 딛고 나아가려 발버둥치던 내 곁의 사람들과 꿈과 강의실에서 맡아지던 풀냄새 같은, ‘언젠가’에 대한 설렘들을 내 안에 다시 ‘보이는 곳’으로 옮겨 둘 수 있었다.

이 글이 연재될 당시는 내가 출산 후 7개월에 접어들 때였다. 청춘소설이란 말에 왠지 모를 거리감을 두었다. 몸이 많이 지친 상태였는데, 그 밝음에 눈이 부시고 내가 더 작아질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누군가는 내가 결혼과 아이 모든 것을 채웠으니 청춘의 끝자락을 망설임 없이 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의 기쁨만큼이나 상실의 아픔을 통과’해야 하듯이 아직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그 형상을 바라보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다. 일년이 지나 이 책을 다시 만나면서 나는 다시 확인한다. 여전히 고독하다는 것, ‘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나눠보지 못했다는 것, 여전히 이해하는 것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다리기로 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아직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일들이 남아있다는 생각. 그것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될수록 나는 성장할 것이며 그것이 언젠가 내게 추억이 되고, 이야깃거리가 되고, 언젠가 꿈을 이루게 해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졌다. 오늘의 무거웠던 시련이 내일의 시련을 가볍게 하고 언젠가 모든 무게가 사라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 기대하고 싶어졌다. 그 믿음 속에서 절망과 분노와 슬픔의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기대감이 오늘에게 지는 마음으로 돌아서는 스스로를 다독여 내일로 건내주는 것 아닐까. 돌아가고 싶었던 그 시간을 만나면서, 혼자이고 싶은 이 마음이 어쩌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 나를 고독으로부터 나아가도록 하는 것은 다가오는 시간, 나를 항해하게 하는 아이, 가족.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은 뒤 앞으로 돌아가 에피소드를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달리 윤의 한 줄의 망설임이, 한 줄의 슬픔이, 한 줄의 진실이 알아버린 그들의 이야기와 얽혀 고스란히 읽혔다. 그리고 다시 이별 앞에서 책을 덮었다. 그들이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누구도 젊음이 남긴 상흔 앞에 휘청이지 않았으면 한다. 강물을 두려워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건널 수 있기를. 내가 나의 가족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줄 수 있기를. 늘 ‘언젠가’를 꿈꿀 수 있었으면 한다.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이들의 얼굴이, 동그란 알전구처럼 머릿속에 빼곡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그들도 지금 이 시간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내고 있겠지. 그리움 속에서 그들이 알게 모르게 나를 이곳으로 밀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 번의 모든 재생이 끝나고, 다시 첫 트랙으로 돌아가 음악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 낯익듯, 낯설듯 그렇게 다시 시작되는.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손끝을 산뜻하게 한다. 계절이 또 다른 계절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나는 오늘을 떠나보내고 또 다른 오늘을 기다린다. 다시 그 때의 푸른 봄철 같은 시간을 껴입고서, 조금은 담담하게, 지금을 살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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