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이런 식으로 노력을 자주 비껴갔다. 단일 선택지가 선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병렬적으로 쌓이면 악행으로 치닫기 쉬웠다.  - P64

선량함을 고집하기 위해 지켜온 선택들이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순간, 미래에 남는 건 원하지 않던 삶이라는 모순. 이남자를 사랑하지 않고, 이 남자와의 미래가 저주라 생각하며, 내가 해온 모든 일이 쓸모없는 짓거리로 전락하는 순간을 예측하는 지금의 끔찍함. - P81

그래서 나는 쉬운 선택지를 택했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보다 일상에 모순을 더하는 일이 쉬웠다.
같은 정당이라면 아무리 멍청한 소리를 해도 지지하는 정치인을 머저리다 욕할 필요가 없다. 친구가 장사하면, 아무리 바보 같은 물건이라도 좋다고 홍보해 주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다 욕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다 그렇게 살고 있다. 사람다움의 본질은 때때로 얄팍하다.
하지만 사과 씨를 심은 곳에서 오렌지 나무가 자라면 그것만큼 황당한 일이 없듯이, 기대로 쌓은 관계가 틀어질 때, 그때는 괘씸함에 배신감까지 추가되어 되돌릴 수 없는 적이 태어난다. 멍청한 소리까지 지지해 줬던 동료 정치인이 돌아설 때 가장 큰 적이 되고, 바보 같은 물건을 홍보해 줬던 친구가 돌아서면 가장 곤란한 민원인이 되는 것처럼. 나 또한 은주에게 그런 적이 되어주기로 했다. - P124

스스로를 이 꼴로 만든 게 무척이나 기뻐서 빠른 속도로 불안해졌다. 이 기쁨이 뇌에 새겨진 이상 두 번은 써먹지 못할 거다. 내일은 무엇으로 행복의 역치까지 도달해야 하는가. 쾌락이 커질수록 그 뒤편에 파인 구덩이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 P1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년 전에 찍어놓은 사진을 보며 그때는 참 젊고 좋았다고 그리워한다. 정작 그때도 지금만큼의 스트레스가 있었겠지만, 시간이 추억으로 이름을 바꾸면 제법 찬란한 것으로 포장된다.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대부분의 실수가 그럭저럭 자랑할 법한 인생의 트로피처럼 느껴지는 반면, 현재는 아무런 특색 없이 쌓이기만 한 폐지 묶음 정도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폐지도 시간이 지나면 트로피가 된다. 3년 후에는 오늘을 추억할 것이고, 5년 후에는 오늘을 갈망할 것이고, 10년 후에는 오늘이 찬란했다는 평을 남기겠지. - P18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킬 때는 주저하지 말고 숨을 쉬자. 타인을 실망시켰다는 절망이 목을 조여 오지 못하도록, 들이쉬고 내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 P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안에 모든 것이 너무 많아........ 그게 내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어. 마크 트웨인이 했던 말 알지?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도록 시간이 존재한다고. 내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이 지금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지루할 틈이 없어. 난 모든 사람을, 모든 것을생각하는 중이야.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고, 당신도 이 속에서 나와 함께야." - P498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당신의 일부나 마찬가지일 때 그 사람의 부재는 당신의 DNA, 당신의 뼈, 당신 피부의 일부가 된다. 찰리와 실비의 죽음은 이제 줄리아를 구성하는 일부였다. 상실감이 그녀 안에서 강물처럼 흘렀다. 이렇게 오랫동안 떠나서 동생과 함께하는 시간을 포기하다니 줄리아는 바보였다. 줄리아는 실비의 삶의 시작과 끝을 겪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 P5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제 실비는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욕조처럼 배수구가 있음을 알았고, 그 배수구로 에너지가 점점 빠져나갔다. 실비는 더이상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없었다. 단념해야 했다. 실비는 죽음이란 하나씩 차례로 단념하는 연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 P438

시간의 흐름, 그리고 어떤 순간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만들고 어떤 순간은 온데간데없이 흩어지게 만드는 그 세세한 부분들이 실비와소용돌이치는 그녀의 삶과 함께 걸어다녔다. - P4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비는 벽화를 보면서 용감함은 상실과 맺어져 있는 걸까 생각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 P333

그녀는 자기가 만든 정적 속에 살면서 그 속으로 점점 가라앉는 자신을 느꼈다.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 P334

실비는 어떤 이야기든 여러 번할수록 부정확해진다고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인간은 쉽게 과장한다. 지루하다 싶은 부분은 점점 빼고 재미있는 부분을 점점 더 첨가한다. 이야기를 반복하다보면 세부적인 내용과 시간 순서가 바뀐다. 그러다보면 이야기는 진실보다 신화에 가까워진다. 실비는 자신과 윌리엄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안 하는지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둘의 사랑 이야기는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음으로써 온전하게 남았다. - P3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