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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일 년 후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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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는 열린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날씨가 감미로웠고 그녀는 자크가 입구에 자기 외투를 던진 뒤 거실로 급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억누를 수 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자크가 그녀를 보면서 걸음을 멈췄다. 거의 슬픔에 가까운, 그녀와 똑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마침내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가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인 세 발자국을 걷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가 크고, 조금 바보 같고, 화를 잘 내는 그를. 그리고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재빨리 손을 그의 머리카락 속에 넣은 채 이런 생각 말고는 다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난 그를 사랑하고, 그는 나를 사랑해. 이건 믿기 힘든 일이야.' 그때부터 그녀는 무한히 조심스럽게 숨을 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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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읽는 사강의 소설이다. 사강의 소설에는 뭐랄까, 나는 사강을 좋아합니다. 라고 말하기 민망한 길티 플레져가 있다. 그건, 그녀의 말랑말랑한 문장들 때문일까, 포스트잇정도의 떼어내도 별 자욱 안 남는 끈적한, 관계들 때문일까, 아니면, '슬픔이여, 안녕' 을 줄곧 헤어질때의 인사로 알고 있다가, 만날때의 인사라는 걸 깨닫고 괜시리 혼자 배신감을 느꼈던 10대때 그녀를 처음 과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무튼, 사강은 나에게 그렇다. 프랑스 여자에 대한 동경을 내 마음 깊이 심어준건, 아마 뒤라스보다는 사강이었으리라.
이 소설속의 남녀들의 관계를 보자니, 얽히고 설킨 실타래가 떠올랐다. A는 B를 좋아하고, B는 C를 좋아하고, D는 A를 동정하며, B를 좋아하고, 등등등
사실, 이런 복잡한 관계가 나에게는 더 당연하게 느껴진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마침, 그 사랑에 빠진 사람도 나를 사랑할 확률은 나에게는 로또 확률, 사기 확률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고 한다면, 또 다른 사랑에 대한 통념,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덜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반박하고 싶다.
무튼, '사랑= 병'이라고 생각하는데, 지나고 나면, 그것을 '사랑'으로 미화하거나, '사랑'이 아니였다고 부인하거나 그 두 초라한 옵션외에 다른 어떤 옵션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 달 후, 일 년 후, 우리는 어떤 고통을 느끼게 될까요?
주인님, 드넓은 바다가 저를 당신에게서 갈라놓고 있습니다.
티투스가 베레니스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그 얼마나 많은 날이 다시 시작되고 끝났는지요.
라신 <베레니스> 1670中
제목인 '한 달 후, 일년 후'는 라신의 1670년 희곡 <베레니스>에서 따온 말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헤어짐의 고통' 을 이야기한다.
... 이야기하나? 한 달 후, 일 년 후, 오 년 후, 십 년 후...
'어떤 고통'은 점점 스러지고 바래져서 재가 되어 존재했다는 기억만이 남을 것이다.
작품 속의 남녀는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지만, '타협'도 한다.
안 그래도 사랑=병=독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한껏 시니컬한 마음을 심어 준 이야기.
작품 속에서 소설가인 베르나르와 의대생인 자크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조제는
일본 소설/영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그 조제라고 한다. 여주인공이 좋아하는 주인공이었다나.
니콜, 파니, 베아트리스, 조제. 이 책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의 이름이다. 각기 다른 사랑, 이별, 타협을 하는.
아직 읽어보지 않은 그 일본 소설 속의 여주인공이 조제를 좋아했단 말이지. 조제를 좋아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