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마이행 단선 기차는 비요로 역 홈을 출발하여 시내를 통과하는 중에 잠시 본선 철도와 나란히 달리게 된다. 유리로 뒤덮인 리조트 본선 특급이 한 칸짜리 기하 12형 기차를 뒤따라와 마치 천천히 뜯어보듯 나란히 달리다 앞질러 가는 것이다.
기차 시각표 상의 장난인지 아니면 도회지 스키어들을 위해 준비된 연출인지, 특급 차창에 조롱조롱 매달린 승객들이 옛 국영철도의 상징인 붉은색 단선 디젤 기차를 구경하는 것이다. 이윽고 호로마이 선이 왼쪽으로 크게 커브를 그리는 분기점에 이르면, 특급의 널따란 차창에서 제법 많은 플래시가 펑펑 터졌다.
18시 35분발 기하 12는 하루에 세 번밖에 운행하지 않는 호로마이 행의 마지막 열차였다.



"쳇, 멋깨나 부리네. 사진까지 찍고 난리칠 게 뭐 있다고. 안 그래요, 역장님?"
젊은 기관사는 눈 덮인 평원을 가르며 내달리는 특급을 흘깃 돌아보다 조수석에 선 센지를 올려다보았다.
"세상 모르는 소릴세. 요새 기하 12가 그야말로 문화재급인 거 모르나? 이거 한번 보겠다고 일부러 먼 데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어."
"근데 왜 이 노선을 없앤대요?"
"이 사람아, 그거야 수송 밀도니 채산이니, 그런 문제 아니겠나."
어련하시겠어요. 기관사는 엄지손가락을 어깨 위로 쳐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달랑 한 칸 달린 객차에 승객 하나 없이 초록색 좌석들만 침침한 형광들 불빛 아래 나란히 놓여 있었다.
"비요로 중앙역 역장임이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왜 못 해?"
"왜고말고, 아저씨, 호로마이 선이 언제 수송 밀도니 뭐니 따져가며 운행했나요? 저도 벌써 사 년짼데, 고등학교 방학 때면 항상 이랬잖아요. 근데 이제 와서 왜 새삼스럽게 노선을 폐지한다고 하느냐구요."
"난들 알겠나, 그런 걸. 지금까지 이렇게 버틴 것만 해도 과거의 실적을 크게 쳐준 거였지. 자네도 호로마이 출신이면 옛날에 이 노선이 얼마나 굉장했는지 생각나지?"

.

.

기관사는 왼손을 들어 "칙칙폭폭 뿌우-" 일부러 기적 소리 흉내를 내보였다.
센지는 자기도 모르게, 페인트를 수도 없이 덧칠해서 이제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기하 12의 운전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센지는 유리에 서린 김을 장갑으로 훔쳐냈다.
기차가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서자 좌우의 능선이 바짝 다가들었다. 짧은 터널을 빠져나갈 때마다 눈은 그 높이를 더해갔다.
"우와, 내일은 제설차를 보내야겠는데요?"
전조등에 비쳐 드러나는 환한 빛의 길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뭔가 알지 못할 이야기의 세계로 달음박질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센지는 배전반에 팔꿈치를 짚고 하염없이 앞으로만 앞으로만 뻗어나가는 빛과 어둠의 세계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저것 좀 봐요, 아저씨. 어째 옛날 이야기 속 같네요."
기차 바퀴가 삐걱이는 소리조차 어쩐지 먼 곳인 듯 아득하게 들렸다. 늙은 호로마이 역장이 눈 퍼붓는 종착역 플랫폼에 칸델라 등불을 켜들고 서 있었다.
"겨우 오 분 늦었는데, 계속 저러고 서 계셨나봐요. 바깥 기온이 영하 이십 도는 될 텐데."
두툼한 국철 외투 어깨 위에 눈을 한 뼘쯤 쌓아놓고, 짙은 남색 제모의 턱끈을 단정히 잡아맨 채 오토마츠는 플랫폼 끝에 우뚝 서 있었다. 기하 12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새삼 등을 꼿꼿이 세워 자세를 바로 하고, 장갑 낀 손가락 끝은 진입선을 향해 반듯하게 뻗어 신호를 보냈다.

도착 정시에서 늦어진 오 분의 분량만큼 얇게 눈 덮인 플랫폼 위를 오토마츠는 장화를 저벅거리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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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지는 마지막 회송 열차를 배웅하는 오토마츠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기도 민망할 것 같아 선로를 가로질러 역사로 향했다. 호로마이 역은 다이쇼 시대에 지어진 모습 그대로 남겨진 훌륭한 건물이었다. 널찍한 대합실은 천장이 높았다. 오래 곤 엿 빛깔의 두툼한 대들보가 몇줄기나 가로질러가고, 삼각형 천창에는 로맨틱한 스태인드 글라스까지 새겨넣었다. 나무로 짜넣은 개찰구 벽 위에는 아직도 국철 표장이 마치 잃어버린 물건처럼 걸려 있다. 벤치는 모두 검은 광택이 도는 옛 물건들이었다.



"오래 기다렸지? 어이, 저기 좀 보게. 기념품 가게도 결국에는 문을 닫아걸었네."
오토마츠는 시린 눈 냄새를 한 짐 등에 짊어지고 역사로 들어오더니 깃발을 말면서 역 앞을 가리켰다.
"어라, 진짜네, 할망구는 어떻게 된 거야?"
단 한 집 남아 버티고 있던 역 앞 기념품 가게는 처마가 기울어진 채 불이 꺼져 있었다.
"아들이 비요로에 맨션을 샀대. 칠십 넘은 할멈을 붙잡을 수도 없고. 자, 이렇게 되니 이제 여기에 담배나 신문 정도는 갖다놓아야 하게 생겼네."

 

 

 

그날 호로마이에는 시간도 장소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큰 눈이 졌다.
낡은 역사는 소리도 빛도 없는 순백의 세계에 파묻혔다. 소녀는 노(老)역장이 말하는 옜이야기를 하나하나 깊이 감동하며 들어주었다. 오토마츠는 자기 스스로도 자기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반세기분의 어리석은 푸념이며 자랑을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겼다.

철도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 대신 호루라기를 불고, 주먹 대신 깃발을 흔들고, 큰소리를 내지르는 대신 호령을 봅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철도원의 괴로움이라면 아마도 그런 것일 것이다.

 

오토마츠는 그날의 여객일지에 '이상 없음'이라고 적어넣었다.
이윽고 한밤중에 눈이 멈추었다. 호로마이 앞산에 은빛 보름달이 떠올랐다.

 

 

 

 

 

 


두 세시간이나 눈을 붙였으려나, 5시 모닝콜이 울리자, 눈을 부비며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삿포로 역으로 간다. JR특급열차를 타고, 그리고, 갈아타고, 또 갈아타고, 마지막의 한량짜리 조그마한 기차를 타고, 영화 철도원의 배경이된 '이쿠토라' 역을 찾았다.

호로마이역은 아마도 없어졌지만,
그와 비슷한 작고, 외진, 한량짜리 기차만 다니는 이 곳은
호각불어주고 깃발 흔들어주는 역장님 없이,
영화가 개봉한지 5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고, 드믄드믄이나마 찾아주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쿠토라 역으로 들어가면,

나가는 문은 '호로마이역'의 앞면이다.
춥고, 배고프다. 온통 눈밭인 바깥. 다음 기차는 한시간 후이다.
이쿠토라역으로 들어가서 호로마이역 앞으로 나온다.

작은 마을을 헤매여 보아도, 맞이하는 것은 끊이지 않고 내리는 눈.
라면집인 듯한 주인없는 가게, 눈을 잔뜩 뒤집어쓴채 작동을 중지한 밴딩머신,
그리고, 영화 속에 나왔던 식당이며, 주점이며, 변소까지( 차마 안 찍었는데, 후에 책 보니, 변소 데려다주는 신이 있었구나) 까지도.

황량한 작은 마을.
[철도원]에는 줄곧 눈이 내리고 있다. 혹은 문장 뒤켠에서 눈을 느낄 수 있다. 그 추위는, 인생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산케이 신문

그렇게 춥고, 배고프게 거리를 거닐며, 철도원으로 살다가 철도원으로 죽은 한 남자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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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로 2006-02-06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사다 지로, 이래도 안 울테냐 작가죠.^^

moonnight 2006-02-0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도원에는 줄곧 눈이 내리고 있다... 맞아, 맞아. ^^ 춥고 배고프게, 그치만 배부르게 만끽하셨을 하이드님만의 분위기에 끄덕끄덕하고 있습니다. 하이드님 사진, 너무 좋아요. >.<

2006-02-06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6-02-06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세트군요. 저 식당 운영하는 덴 줄 알았는데... 영화랑 책 보고 가셨나 보죠?

모1 2006-02-06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보고 그 영화 철도원? 했는데...그곳이었군요. 눈이 너무 많아 보여서 겨울이라 그런지 더 추워보이네요. 으슬으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