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무더위,,,,
1994년 김일성이 죽던 해, 그 무더위가 생각난다.
그때는 에어컨이 있는 곳이 별로 없었지,
생수도 많이 없던 시절이었고,
무더위 속에서 비상이 걸려서 아무도 휴가, 외출, 외박도 못감.
다음해, 1995년, 더위는 조금 줄었지만, 비가 오지 않아 고생했던 시절.
그래도 지금처럼 덥지는 않았더랬지..
이번달 관리비가 걱정이다.
상무님은 정부장을 너무도 알뜰 살뜰하게 챙겼다. 사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렇게까지....알뜰하게' 정부장님은 6달 뒤가 정년이었다. 생김새는 작은 체구에 마르고, 핏기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조용한 성품에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일에 성실하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는 모습은 아니다. 승진에 뜻이 없어 보였는데도 부장자리 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몇번의 특별승진 때문인데, 그것도 지난 영업 년도에서야 20년동안의 만년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부장자리에 올라서도 과장때와 달라진 것 없이 성실한 모습으로 묵묵히 일하시고, 이제 정년퇴임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로 우리 회사에서도 정년까지 일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다, 부장님 장모님의 상이 있었다. 나는 갈까 말까 망설였다. 그렇게 친근한 사이도 아니고, 직계부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사내 분위기로 상무님과 사장님이 올 것이 분명했고, 우리 과장님이 같이 가지고 하여 난 봉투에 50,000원 짜리 한 장 넣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부장님의 가족사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왜 그동안 상무님과 사장님이 정부장님을 각별하게 대우했는지 알게 되었다.
분명 정부장님 장모상인데, 부장님의 사모님은 없었다. 부장님의 사모님께서는 28년 전 사별했다고 한다. 사별한 아내의 어머니 장례에 상주가 정부장님이었다.
돌아가신 정부장의 장모님은 정부장님과 함께 아들, 딸 둘을 키워냈다고 한다. 정부장의 사모님은 IMF 때, 유방암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때, 정부장은 회사를 위해 돈을 구하러 여기저기 뛰어다녔다고 했다. 사모님은 마지막으로 당신의 어머니에게 아들, 딸을 눈물로 부탁했다고 한다. 장모님의 전화를 받은 정부장은 세상을 잃은 것 같은 모습으로도 마지막 회사대출을 마무리 짓고 병원으로 돌아가 한참을 아내 옆에서 멍하니 조용한 눈물 만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7살이던 아들은 지금 공군 소령으로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당시 5살이던 딸은 서울대 의대를 나와 의사로 서울아산병원 산부인과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이제 자식 둘 모두 출가를 시키고, 겨우 숨 돌리게 되었는데, 그동안 힘들었던 삶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어느 날 평안하게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고 한다. 당시 정부장님은 장모님을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아이들도 모두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장례에 정성을 다했다고 했다. 너무도 평온한 슬픔으로 외할머니를 보내드렸는데, 당시 지금의 상무님과 사장님 모두 장지까지 자리를 지키셨다고 한다. 얼마 뒤, 정부장님은 승진도 하고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 없이 28년 동안 자식을 홀로 키워냈는데, 사모님께서 병으로 떠나갈 때 막내 딸을 보면서 내가 있어야 예쁘게 클 수 있는데, 여자라야 보살필 수 있는 걸, 어떻게 홀로 배워갈 수 있을지...한 동안 눈물로 딸아이를 바라 보았다고 했다. 당시 딸의 나이가 겨우 5살,,,엄마만이 가르쳐줘야 하는 것이 있다며, 흘리던 눈물을 지금도 가끔 다 큰 딸아이가 엄마의 제사 때마다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5살 때 일이지만, 기억에 생생하다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던 정부장님의 그 멍한 눈빛도 함께 말했다고 한다.
왜 그렇게 사장님도 상무님도 정부장을 그리도 존중하고 고개숙이며 알뜰살뜰 챙겨드리고자 했는지 이해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