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열하일기 - 전3권 ㅣ 겨레고전문학선집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 보리 / 2004년 11월
평점 :
18세기 알쓸신잡, 열하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알쓸신잡!’ 근래 우리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이다. 알쓸신잡은 ‘알아두면 쓸데 없는?(있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줄인 말이다. 지식인들이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 형태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우리의 다양한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인기가 높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문화적 역량과 역사의 교훈이 스며있고,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녹아있다. 당대 시대정신을 이끄는 지식인들은 비록 깊이 숨어있더라도, 반드시 시대가 그들을 세상에 불러낸다고 했다.
이 말은 비단 작금의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고전을 읽다보면, 시대정신을 이끌던 지식인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다만 우리가 눈감고 있기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열하일기’, 18세기 조선의 시대정신을 이끌던 연암 박지원의 중국여행기록이다. 그는 압록강에서부터 청의 수도 북경을 거쳐, 다시 황제의 피서산장이 있는 열하에 도착한 뒤 돌아오는 여정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와 스스로 느낀 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열하일기는 단순한 중국여행기에 그치지 않는다.
열하일기는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강조되던 ‘북벌’이 허황된 것이었음과 18세기를 이끌 시대정신이 ‘북학’임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곧 오늘날 ‘알쓸신잡’과 같은 재미난 이야기의 예능 프로그램과 같지만, 그 이면에 스며있는 날카로운 비판과 발전적인 미래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것이다.
북벌의 대상이던 청나라는 강희, 옹정, 건륭의 3대 전성기를 거치는 과정에 강력한 문화적 힘을 발산했다.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은 이런 시대적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고루한 성리학적 이념에만 사로잡혔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탄탄하게 지키려고만 했다. 변화하는 세상을 제대로 보려는 의지는 없었다. 변화하는 청나라를 보고도, 오랑캐라 비웃기만 했다. 시대정신을 애써 외면한 것이다.
18세기 북학은 허망한 북벌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등장한 사상이다. 권세있는 양반사대부 집안의 자손이었지만, 연암 박지원은 시대정신이 실용을 강조하는 북학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연암은 여행을 하는 동안 경험한 청나라의 다양한 발전상을 양반사대부들에게 이야기해 주고자 했다. 단순한 여행기록만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열하일기는 청나라 사람들의 편리한 수레이용, 실용적인 건축물, 활동성 높은 옷차림, 유용한 상업 활동과 서학을 비롯한 다양한 사상과 자유로운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모두가 발전하는 청나라의 문화적 역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에게 들려주려는 따끔한 외침이 녹아있다.
열하일기는 여행지역의 역사를 말하면서 뒤쳐진 양반사대부의 사상적인 문제점을 고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원성을 지나면서 명나라 충신 원숭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청태종의 실용적이고 참을성 있는 이간책은 명황제로 하여금 충신 원숭환을 죽이게 했다. 이것은 곧 명나라가 스스로를 죽인 것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당시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연암이 옥전현을 지나면서 얻게 된 ‘호질’은 당대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에게 날린 강펀치라고 할 것이다.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고루한 성리학적 이념에 대한 집착 등 사대부들의 고루한 사고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숨어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야기가 호질의 후기에 담겨있다. 박지원은 발전된 청나라의 문화를 수용하자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청제국의 강압적 패권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동시에 하고 있다. 열하일기가 다만 높은 수준의 기교만을 따라 배우자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야 말로, 당대 조선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문화적 결정체라고 할 것이다. 열하일기가 단순한 여행기에 그쳤다면, 결코 당대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의 결정체라는 표현은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열하일기는 관통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다름이 아니다. 발전된 기술과 문화의 주체적 수용, 낡은 허위의식의 타파, 다양한 사상에 대한 존중, 그리고 역사적 교훈에 대한 깊은 공부와 현실적 실용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정신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재미있는 방식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미래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작금의 시기는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격변의 시기이며,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와 같은 급변하는 현재를 지나가고 있다.
청년들은 불안정한 현재를 걱정하고 있으며, 장년들은 화려했던 과거만을 회상하려 한다. 누구도 발전적인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시대정신과 발전적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지식인들의 재미난 이야기가 ‘알쓸신잡’이라면, 18세기 연암 박지원이 피, 땀, 눈물로 쓴 ‘열하일기’야말로 다름 아닌 당대의 ‘알쓸신잡’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