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별 망설임없이 책을 샀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살다보면 누군가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가 되기도 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고급 호텔 사장이 되기도 한다. 가끔 나도 이국적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 경험에 진정성만 배어있다면 중산층 평범한 일상이든, 하류층 곤고한 지옥이든 별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될 수 있으면 파리의 접시닦이가 한 번 되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국적 생활, 특히 파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이 책을 산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는 조지 오웰이 본 파리나 런던의 묘사력에 관한 호기심 때문이었으리라. 단언컨데,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는다. 단,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 구성의 허술함 때문에 지루하게 읽히는 부분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그였다면 분량을 딱 반으로 줄이겠다. 르뽀 형식을 띄고 있지만 클라이막스가 없어 그 얘기가 그 얘기 같다.  등장 인물과 분량만 줄여도 흡인력 있는 읽을 거리가 되어 줄 텐데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파리나 런던에 가지 않더라도 밑바닥 생활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생한 묘사 때문에 파리의 X호텔 레스토랑에 가지 않고서도 그 지하 공간의 온갖 악취를 맡은 듯하고, 런던의 부랑아가 되어 보지 않고서도 강변 벤취를 지나는, 노숙자를 깨우는 기차소리를 듣는 듯하다.  보라, 냉소의 경지를 넘어선 이 적나라한 묘사를.

   주방의 불결함은 더 심했다. 프랑스 요리사는 수프에 침을 뱉는다고 하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단지 사실을 진술한 것뿐이다. 물론 요리사 자신이 먹는 수프가 아닌 경우이다. 요리사는 예술가이지만, 그의 예술은 청결에 있지 않다. 그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더럽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음식이 세련되게 보이려면 더러운 처리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고기를 만지는 수석 요리사들의) 손가락은 모두 이날 아침에 백 번은 빨았던 그 손가락들이다. 이번엔 웨이터가 또 자신의 손가락을 그 고깃국물에 담근다. (중략) 대체적으로 음식 값을 비싸게 치를수록 그 음식과 함께 먹는 땀과 침도 많아진다. (104 ~105p 부분)

  강변 둑길에선 뭐니뭐니해고 일찌감치 잠드는 게 상책이지. 여덟 시까진 벤치를 차지해야 돼. 벤치가 그리 많지도 않고 또 다 차 있을 때도 가끔 있거든. 그리곤 곧장 잠이 들어야 돼. 열 두시가 넘으면 너무 추워 잠이 잘 안 오고 새벽 네 시만 되면 경찰이 내쫓거든. 근데 잠드는 게 쉽진 않아. 염병할 시가전차는 번번이 머리 옆을 날아다니지. 강 건너 옥상 광고 조명은 켜졌다 꺼졌다 해서 눈이 부셔. 추위도 매섭지. 거기서 자는 이들은 대개 신문지로 몸을 마는데, 그게 그리 도움은 안 돼. 세 시간 잤다면 억세게 운 좋은 거야. (278~279p)

   비루한 인간들을 관찰하는 끈덕진 시선은 동물농장과 1984년 같은 작품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비천한 계급도 중산층 사람들과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똑 같은 사회 구성원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으나 언제나 지나친 자기 연민이 문제이다. 일반 여성은 언감 생심 꿈도 못 꾼다.  매춘부를 보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부랑자들을 포착해내는 작가의 그 통찰이라니.  

  자기연민은 그의 성격을 이해하는 실마리였다. 한순간도 불운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듯했다. 그는 긴 침묵을 깨고는 난데없이 '옷가지를 전당 잡히기 시작하면 지옥이지, 응?"하거나 '그 부랑자 구호소의 홍차는 홍차가 아니라 오줌이야.' 하면서 설명했고, 이것 말고는 이 세상에 생각할 것이 없다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더 잘 사는 사람들, 즉 그의 사회적 지평을 넘어서는 부자들은 아니고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을 벌레처럼 비천하게 질투했다. 그는 화가가 유명해지기를 갈망하듯 일을 갈망했다.  (중략)  그는 동경과 증오가 뒤섞인 채로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젊고 예쁜 여자들은 그에게 너무나 분에 넘쳐서 생각도 안 했지만, 매춘부를 보면 그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200 ~201 부분)

    책('소설'이 타당하겠다)을 읽을 때, 설명에 밑줄을 긋지 말고 풍경에 밑줄을 그어라, 고 누군가가 말했다. 아마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읽은 듯한데 그 말은 이 책에서도 유효하다. 설명 이전에 풍경으로 그려지는 그림을 활자에서 맛보는 것이야말로 책 읽기의 묘미이기도 하다.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별이 네 개 밖에 안 뜨는 것은 불필요한 분량과 구성의 지리멸렬에서 오는 지겨움 때문이다. 군데 군데 숨은 보석이 있으니 그것을 찾는 재미로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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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0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날벌레가 추락사 했다고 해서 없는 돈 다 짜내어 산 우유를 버리다니, 그래도 믿을 구석이 있는 궁핍함은 그런가 보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다크아이즈 2006-10-0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아마 완벽한 경험담이라기보단 취재력이 가미된 소설이기 때문에 그런 허술함(?)이 있었지 않을까요?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파리 빠진 우유도 없어서 못 먹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