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 독서회 청춘들과 함께 한 책이다. 영화도 책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영화는 정우성이 주연한 <비트>의 스코틀랜드 버전으로, 책은 제이 디 셀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 영국식 버전으로 읽혔다. 영화는 <비트>보다는 나았고, 책은 <호밀밭의 파수꾼>에는 못 미쳤다.

 

   <비트>보다 나은 점은 폭력의 강도가 훨씬 약한 데다 개연성을 확보했다는 점이었다. 대사 처리 또한 비트에서처럼 오글거리지 않고 현실적이라 공감이 갔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이런 현장성을 획득한 게 아닌가 싶었다.

 

   <호밀밭의 파수꾼>보다 못한 점은 구성 면에서 문학적 성취를 의식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컸다. 경험에 근거한 책 내기에 조급했을까. 온갖 등장인물이 내레이터로 나오는 방식을 취해 따분하고 혼란스러웠다. 이런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다이내믹한 상황 설정이나 심오한 반전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구성을 무시한 일상적 기록의 서사 방식을 택한 것은 아쉬웠다.

 

   병영 청춘들에게 공감하는지 진솔한 의견을 물었다. 상황은 이해하겠는데 구체적 장면에서는 우리 현실과 너무 달라 당황스러웠다고 하나 같이 말한다. 아무리 하위문화라 해도 뒷골목에서의 마약, 섹스, 폭력이 일상화되는 청춘을 대한민국에서 상상하기는 어려우니까. 병영 청춘들은 말한다. 담배, 피시방이나 노래방, 술집 정도에 해당 되는 우리의 말들이 에딘버러에 가면 마약, 섹스, 폭력으로 치환된다고. 범죄와 가까운 그 행위들이 거기서는 단순한 일탈처럼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게 의아하면서도 부럽다(?)고 했다.

 

   청춘들에게도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인 것만은 분명했다. 청춘의 불행한 일상을 암울하게만 그린 게 아니라 경쾌하고 도덕연하지 않게 틈을 주고 그려냈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다. 청춘의 하위문화가 시사하는 점, 이를 테면 세태 비판이나 방향타 잃은 청춘에 대한 묘사, 젊음의 폭발적(폭력을 포함한) 에너지 등에 대해서 성찰하게 된 점은 의미 있었다. 일탈의 쾌감과 불안을 헤매면서도 그들이 가야할 방향타를 찾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소설이다. 중류 계급의 허위의식에 대해서 시종일관 콕콕 찔러대는 것도 인상적이다. 도덕연한 허세, 따분한 잘난 척, 포장된 자기기만 등등.

 

   그럼에도 이 책(영화도 마찬가지)의 가장 큰 약점은 남성적 시각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는 점. 이건 어빈 웰시의 기질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인 어빈 웰시는 왠지 마초적이고 냉소적인데다 비판적 성향이 강해 보인다. 작년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됐을 때 가장 심한 악담을 퍼부은 작가 중의 한 사람이 어빈 웰시였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 생각에 대한 작은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밥 딜런 팬이지만 이번 상은 노망 나 헛소리나 씨부렁거리는 히피들의 썩은 전립선이 향수에 쩔어 주는 상이다.” 트레인스포팅을 쓴 작가답다는 생각에 마구 웃어젖혔다.

 

  다만, 이 책과 영화가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련다. 솔직히 어떤 책이라고 말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좋다고 말하는 이와 아니라고 고개 흔드는 이가 반반이라 내 생각에도 막이 생겨버렸다. 맨 부커 상 후보에 올랐을 때도 난상토론이 이어졌다니 위안이 된다고나 할까. 내 취향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참고로 <트레인스포팅2>가 영화로 나왔다, 우리나라에도 모 영화제에서 상영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일반 극장에서도 상영했는지는 모르겠다. 주인공 렌턴 역인 이완 맥그리거를 비롯해 식보이 역의 조니 리 밀러 외 주요 등장인물 네 명이 그대로 20년 세월을 넘어 뭉쳤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식보이 역의 조니 리 밀러의 모습이 영화에서 어떻게 그려지는지 궁금하긴 하다. 트레인스포팅 영화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이완 맥그리거가 아니라 조니 리 밀러였다. (아시다시피 조니 리 밀러는 안젤리나 졸리의 첫 번째 남편이었다. 트레인스포팅2 관련 인터뷰에서 그는 졸리와 여전히 친구처럼 지낸다고 말했다.)

 

   *‘트레인스포팅이란 기차역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 역에 들어오는 기차의 번호를 적는 행위로, 영국에서는 이러한 편집증적 기벽을 가진 사람들을 트레인스포터라고 한다. 이 소설에서 어빈 웰시는 트레인스포팅이라는 단어를 기찻길을 연상시키는, 팔의 정맥 위에 일렬로 자리 잡은 주사바늘 자국들을 가리키는 헤로인 중독자(정키)의 메타포로써 사용하고 있다.

    

 

 

 

책 밑줄 긋기

49다른 걸로는 나의 이 빌어먹을 가슴팍 한가운데에 쑤셔 넣은 주먹 같은, 커다란 블랙홀을 메울 수 없어.

72따스한 마음을 가진 반항아들. 이 땅의 소금과 같은 사람들. --축구 리그 같은 것은 바보 같고 엉뚱한 난센스이며 노동 계급의 단결을 방해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주도권이 도전받지 않게 해주는 안전장치에 불과하다. 스티비가 혼자 생각해낸 이론이다.

83레슬리는 꼼짝 않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며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뼈마디가 뒤틀리고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손댈 수 없다.

 

83내가 눈꼴시게 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자신이 미웠다. 나도 다른 놈들이 나한테 그러면 역겨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일단 막강한 위치에 오르고 나면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는 진리를 부정할 만한 성인은 없다. --자식들, 너희들 차례는 아직 멀었어. 레슬 리가 먼저야. 그리고 레슬리보단 내가 먼저야. 당연한 이야기 아냐?(마약 조제를 하는 렌턴의 마음)

84그래도 엄마를 사랑한다. 너무 사랑해서 엄마한테 나 같은 아들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아들을 찾아내다가 엄마한테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변할 수 없으니까.(렌턴)

119신화:벡비는 훌륭한 유머 센스를 갖고 있다. 현실:벡비의 유머 센스는 타인의, 대개는 동료의 불운이나 실수, 약점이 노출된 경우에만 발휘된다. 신화:벡비는 강철의 사나이다. 현실:(뾰족한)무기를 갖고 있지 않을 때의 벡비는 그다지 뛰어난 싸움꾼이 아니다. 신화:친구들은 벡비를 존경하고 있다. 현실:친구들은 벡비를 두려워하고 있다. 신화:벡비는 친구들을 감싸준다. 현실:--멍청이가 그러면 두들겨 패준다. 하지만 진짜 미치광이가 친구들을 괴롭히면 내버려둔다. 우리보다 그런 사이코들과 벡비는 더 친하기 때문이다. (렌턴이 본 벡비)

 

125바늘을 찌를 곳을 몸에서 필사적으로 찾아야 하다니 정말 싫다. 어제는 하는 수없이 페니스에다 놓았다. 내 몸 중에서는 정맥이 가장 똑똑히 보이는 곳. 이런 버릇은 들이고 싶지 않다. (렌턴)

196들어가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가지 않을래? 좋지. 렌턴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으나,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커피 뿐이야. 다이앤은 그렇게 덧붙였다. (다이앤이 렌턴에게)

252닥터 포브스:애버딘의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 : 대학 자체입니다. 교수,학생, 모든 것이 다요. 모두 중류 계급의 따분한 녀석들이었죠. (렌턴의 상담)

 

259-260내가 모든 이론을 철저히 알고,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그 위에 건전한 정신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래도 나는 헤로인을 맞으려고 생각할까? --인생을 선택하라. 하지만 나는 인생을 선택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다. 해리 로더는 노래했다. “이 길이 계속되는 한, 나는 오로지 전진하리라…….”

278나는 리스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코틀랜드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영원히. 지금 즉시.(렌턴)

423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너희들? 트레인스포팅이라도 하나, ? (벡비 아버지가 일당에게) -기차역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 역에 들어오는 기차들의 번호를 적는 행위. 영국에서는 편집증적 기벽을 가진 사람들을 트레인스포터라고 한다.

467렌턴이 정말로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스퍼드였다. 그는 스퍼드를 좋아했다. --렌턴이 단 한 사람에게만 보상한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스퍼드일 것이다.

 

468아이러니컬하게도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벡비였다. 벡비에겐 동료를 배신하는 일은 사형에 해당하는 가장 무거운 죄이다. 렌턴은 벡비를 이용해서 스스로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벡비가 있기 때문에 그는 이제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원하던 일을 해냈다. 리스에도, 에든버러에도,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조차 이제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영원히. 그곳에 있으면 지금의 자신 이외는 될 수가 없다. 모든 것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된 지금이라면, 되고 싶었던 자신이 될 수 있다. 쓰러지든지 일어서든지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불안하기도 하고 흥분이 되기도 했다. 렌턴은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될 새로운 인생을 똑바로 응시했다.

 

영화 밑줄긋기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 렌턴, 이완 맥그리거

*영국은 무슨! 우리는 지진아 중의 지진아들이야 쓸모없는 쓰레기들이고, 비참하고 불쌍한 쓰레기들 말야. 문명이 나은 사생아! - 렌턴, 이완 맥그리거

*마약은 우리 삶에 원동력이다. - 렌턴, 이완 맥그리거

*신의 가호로 이 끔찍한 고통을 이겨내보도록 하죠. - 렌턴, 이완 맥그리거

*아쉬울 것이 없는 삶이므로, 결코 풍요로울 수 없는 삶이다. - 렌턴, 이완 맥그리거

*독특한 개성은 찾아 볼 수 없고 규율만 찾는 나라. 지랄 같은 나라가 영국이라고 신선한 공기가 다가 아니라고. - 렌턴, 이완 맥그리거

    

트레인스포팅, 트레인스포팅2, 어빈 웰시, 이완 맥그리거, 조니 리 밀러, 판단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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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7-07-31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레인스포팅은 아주 재밌게 봤던, 그보다 충격적이라고 생각하며 봤던 영화였어요. 2편이 나왔다고 들었지만 왠지 보고싶지 않아서 안봤는데... 1편의 강력한 인상을 못따라 갈까봐~~~그 영화에 대한 순정이라기는 뭐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