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불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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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속하게도 왜 산불은 동시다발적으로 오는지. 삼월 초의 날씨로서는 백여 년 만에 27도에 육박하는, 볕 좋고 바람 많은 날씨였다. 오후가 되자 도시는 멀리서부터 검회색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초여름 같은 수은주를 시샘하는 봄비가 오려나 싶었다. 그게 아니었다. 도시 남쪽과 북쪽에서 잇단 산불로 온 허공이 연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걱정과 우려와 공포가 뒤섞인 호기심 서린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삼십 오층 높이에서의 산불 현장은 한 눈에 잡혔다. 불꽃은 도심 가까운 산허리를 휘감았고, 오가지 못하는 차들은 비상 깜박이로 대로가 주차장화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대형 물바구니를 달거나, 물탱크를 장착한 헬리콥터들은 쉼 없이 강과 현장을 오갔다. 남쪽의 또 다른 산불 현장의 헬리콥터들은 강까지 오지 않고, 근처 저수지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하늘 길에서 혼선을 빚지 않기 위한 나름의 질서 같았다.
헬리콥터는 강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해야만 물을 담을 수 있었는데, 강 표면에 이는 프로펠러 바람 동심원처럼 명치끝에 아찔한 파문이 일곤 했다. 호기심은 금세 사라지고 통증과 공포와 위기감만 온몸에 달라붙었다. 가파른 산과 주택 현장을 누빌 소방관들과 주민들, 관계자들의 수고와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집으로 들어오려는데, 현관문 돌리는 아귀힘도, 신발을 쉬 벗을 기운도 남아있지 않다.
잠깐 봤음에도, 불과의 사투를 지켜보는 일은 맘만 무거운 그 무엇이었다. 모든 말들의 무용함으로서만 이 산불 현장을 말할 수 있었다. 하물며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겪는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입술을 건너 간 말들은 화근(禍根)이 되고, 손끝에서 날아간 불티 역시 화근(火根)이 된다. 이때의 모든 부주의는 유죄이다. 화근의 원인은 순간이나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으니. 길고 힘겨운 불꽃과의 사투는 말줄임표 말고는 제대로 설명할 길 없다.
아, 새 아침이 왔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헬리콥터들의 공중 행렬은 계속 중이다.
2. 상추라는 푼크툼
독서 모임이 좋은 이유는 책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람 이야기도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에 토론한 책이 무엇이었는가는 잘 생각나지 않아도 그날의 에피소드 하나 쯤은 나만의 사진 한 컷이 되어 심상을 맴돌 때가 있다. 이야기보따리를 푼 회원의 핵심 장면을 마음으로 찍고 마음으로 인화해 들여다보면서 짧은 생각 하나를 건져 올린다.
볕 좋은 날, 전원주택 집들이에 친구들이 모였다. 근경으로 집이 보이고, 사진 중간의 야외 식탁엔 노란 앞치마를 입은 섬세한 안주인이 삼겹살을 굽는 중이다. 분주해진 안주인을 도와 누군가는 밥을 푸고, 다른 누군가는 소주잔을 챙기며, 또 다른 치는 수저를 놓고 있다. 오른쪽으론 수돗가가 있고, 왼쪽은 텃밭인데, 그곳에서 한 명은 풋고추를 다른 한 명은 상추를 따고 있다.
바쁜 안주인의 손길과 달리 눈길은 텃밭의 상추녀에게 머물러 있다. 순진한 얼굴의 그녀는 상추의 연한 윗대궁만 톡톡 딴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의 안주인이 충고를 하기엔 거리도 멀고, 사소한 것 때문에 이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도 없다. 그 사진에서 상추 따는 친구는 밑대궁부터 따는 것이 상추나 주인 심지어 자신마저 배려하는 것임을 몰라야 하는 순진한 표정이어야 한다. 그래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주인의 표정에 악의가 없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 사진에서 ‘전원주택에서의 친구들과의 다정한 점심 한때’만 읽는다면 일반적 보편적 시각인, ‘스투디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상추 윗대궁을 따는 순진한 친구와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안주인의 섬세한 표정을 읽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이 된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푼크툼은 하나의 ‘세부요소’이자 ‘나를 토로하는 것’이다.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는 보편타당한 미나 교양이 그 목표가 아니라, 나만의 ‘찌름’, 나만의 ‘영감’의 세계로 이탈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구의 표현 과정이다. 친구들과의 단란한 점심 식사 장면의 일반성보다 연한 꽃대궁을 무심히 꺾어버리는 순진청정한 친구의 특이성이야말로 예술의 모티프가 되는 것이다.
푼크툼은 고상하고 도덕적인 것을 벗어나 엉뚱하며, 은밀한 개별성을 지닌다. 친구들이 한껏 웃으며 포도주잔을 기울일 때 어색한 미소로 여린 상추 윗대궁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안주인의 푼크툼 역시 너무나 비의지적인 ‘찌름’의 세계이다. 이 푼크툼의 구체적 사례들이야말로 예술의 출발점이다.
3. 사슴이 우네
‘녹명’(鹿鳴)이란 말은 고영민 시인의 시에서 처음 들었다. 그의 시집『사슴공원에서』의 표제시 덕에 그 말을 알게 되었다. 기실 나를 울린 것은 ‘사슴 울음 소리’가 아니라 ‘누가 벗어놓은 신발을 돌려 놓았다’라는 구절이었다. 돌고 도는 계절엔 경계가 없고, 나는 먼 곳에 있고, 내 앞의 당신은 침엽수처럼 무표정 하다. 그래도 언젠가 본 책 속의 사슴 공원처럼 우리는 사랑을 꿈꾸고 단비를 기원한다.
시는 내게 읽는 게 아니라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다. 시 속의 저 신발을 돌려놓은 이 누구였을까를 생각하는 충만한 엔돌핀의 시간만큼 독자로서 미소지을 수 있다. 내가 벗어 놓은 신발을 누군가 어여삐 돌려놓는 시간이든,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을 연민 서린 내가 돌려놓는 시간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상황을 포착하는 시인의 다사로운 눈썰미가 있었기에 사슴의 울음으로까지 확장되는 시구를 건질 수 있었으리라.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녹명 부분 시가 나온다. ‘사슴 울어 알리네 / 들에서 다북쑥을 뜯는다고 / 내 반가운 이 와서 / 거문고 타고 생황 부네 / 생황 불며 / 선물 광주리로 받드니 / 이 사람 나를 좋아해 / 내게 바른 도리 일러주네’. 사슴은 다른 짐승들과 달리 먹이를 찾으면 기쁜 울음으로 주변에 알린단다. 주변 친구들을 모아 함께 나누어 먹자고. 어진 임금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좋은 일이 있으면 백성들과 나누라는 뜻으로 지어진 시일 것이다.
사슴 울음 소리를 내는 건 쉽고도 어렵다. 누구든 내 팔 안에 든 것들에겐 그 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배타적 울타리를 치는 자들에게까지 기쁜 울음을 내주기란 참으로 어렵다. 완고하고 고정된 타자의 세계관 앞에서 무한대로 뻗어가는 나의 실존이 울어주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더구나 완고한 세계관과 뻗어가는 실존은 가변적이라 상황에 따라 타자와 자아를 오간다. 따라서 사슴의 기쁜 울음은 온 우주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 만의 울음일 수도 있다. 강한 사자는 제외하더라도 여린 토끼나 비슷한 염소에게까지 할애하는 울음소리가 아니라는 것. 그저 그들만을 위한 울음소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
그 배타성의 한계를 일찍이 시인은 목도하고 ‘사랑이 식기 전에, 밥이 식기 전에’ 사슴 울음 소리 듣자고 서둘러 당신에게 가야 한다고 노래하는지도 모르겠다. 약자라면 누구나 들어설 수 있는 풀밭의 나날을 꿈꾸는 것 그것이 착한 시인의 사명은 아닌지.
사슴 공원에서
고영민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어디까지가 여름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을일까
누가 벗어 놓은 신발을 돌려 놓았다
오늘 나는 아주 먼 곳에 있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은
침엽수처럼 무표정하다
젊은 어느날의 책 속처럼 지금도
사슴 공원 어딘가에선
사랑이 생기고 비가 내리고
멀리 빈 들판엔 철새가 돌아온다
누가 구름을 사라지게 하고
비를 멈추게 할 수 있나
투명 비닐 봉지에 금붕어를 담아 들고
한 소년이 급히 어딘가로
달려간다
공원에 잇닿아 있는 장례식장 마당에서
어느 가족이 늦은 상복을 갈아입고 있다
사슴 울음소리* 들으며
나도 서둘러 당신에게 가야 한다
사랑이 식기 전에
밥이 식기 전에
*녹명(鹿鳴) :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배고픈 다른 사슴을 부르기 위해 내는 울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