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화) 1 - 스완네집 쪽으로 - 콩브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화) 1
마르셀 프루스트 원작, 스테판 외에 각색 및 그림, 정재곤 옮김 / 열화당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스무 살 시절 나는 제법 학교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도서기록카드로 대출인을 관리하던, 그야말로 아날로그 방식을 활용하던 때였다. 책 뒷면, 붙여진 봉투 안에 기록지가 있었다. 그 종이에는 책을 빌린 이의 이름과 빌린 날짜, 돌려주는 날 등이 적혀 있었다. 누가 어떤 책을 읽는 지 목록을 보면 훤히 꿰찰 수 있었다. 어느 날 공대생 친구 녀석이 말했다. 

  "도서 기록 카드에 니 이름 와 그리 많이 등장하노?" 

   독서 취향이 비슷했는지 아는 이름이 눈에 자주 뜨이니 그 친구는 반가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반색하는 녀석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녀석의 심정과 무관하게 도둑이 제 발 저렸던 것이다. 빌린 책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사진을 훔친 때문이었다. (고백하자면 카프카의 사진도 훔쳤다!)  혹시라도 도서대여 담당자가 추적 끝에 잘려나간 작가 사진들을 돌려달라고 할까봐 두려웠다. 또한 작가 사진을 오려 가진 이가 나라는 것을 친구 녀석도 알게 될까 찔렸던 것이다.

 

  ((이건 여담인데 오늘 우연히 한겨레 신문을 보다가 김두식의 <고백>코너에서 고종석의 적나라한 고백을 들었다. 나보다 더한 놈(!)께서 출현했다. 고종석 광빠 정도는 아니더라도 엄청 존경하는 글쟁이 중 한 분인데 살짝 실망했다. 그 왈 헌책방 가서 많은 책을 훔쳤단다. 겨울 외투 사이에 갖고 싶은 책을 찔러 넣고 왔다는데 한 두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 정도의 헌책방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보았다. 솔직히 나는 놀라 기절할 뻔했다.당시엔 죄책감도 없었다니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싶다. 인터뷰 뉘앙스를 보니 고종석은 헌책방 주인을 계급의식 관점으로 바라본 듯하다. 헐케 손에 넣어 비싼 값으로 되파는 주인이니 자신이 좀 장기 대여(평생 대여)(?)한들 어쩌리, 하는 맘이 있었던 것 같다. ))

 

  다시 내 얘기로 돌아오자.  책 안에 깃든 주요 정보를 개인이 독점하는  행위는 부도덕하다 못해 파렴치하다. 하지만 그 치기 역시 책에서 배웠으므로 내 죄는 반감되어야 마땅하다! 그 시절, 내 설 익은 감성을 쥐락펴락했던 전혜린이란 에세이스트가 있었다. 너무 오래 돼 지금은 잊었지만 그미가 독일 유학시절 필요한 자료(아마는 어떤 작가의 사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를 도서관에서 슬쩍해왔다는 고백을 읽으면서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도 꼭 한 번 따라해보고 싶었다. 그 때 따라쟁이한 도둑질한 사진이 프루스트와 카프카였다. 내 기억에 의하면 프루스트는 오래 간직하지 못했고, 카프카는 내 좁은 방 미니액자에 담겨 오랫동안 내 우수어린 친구가 돼줬다.  

  그 때 빌린 책이 아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변신'쯤이 되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내게 결국 제목만 원어로 외운 책이 돼버렸다.  '아 라 흐세흐쉐 뒤 땅 뻭뒤(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 A 철자 위에, 악상 그라브 넣는 법은 몰라요. 우쒸~). 어려운 건 용서할 수 있겠는데, 한 마디로 지겨웠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만큼이나 초반부터 질리게하는 마력(?)이 있는 책이었다. 나중에 그 원인을 알아냈다. 젤 큰 원인은 프루스트의 만연체 문체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불어인데, 헤밍웨이처럼 짧고 간략하게 써주면 누가 뭐라나? 끝날 줄 모르는 접속사로 이루어진 복문에 지쳐 버렸다. 독자를 배려해 깔끔하게 잘라서 번역해주면 좋으련만 그도 아니니 인내심 폭발하게 하는 책인 게 분명했다. 해서 누군가 잃어버린 시간~을 완독했다면 마구 안아주고 싶다. 다행인지 주변에는 아직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전문 연구자들조차 다 이해 못한다니 이 책을 못다 읽었다 해서 부끄러워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만화로 된 잃어버린 시간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4권까지 나온 걸 알고 주문했는데, 오늘 보니 5권도 출간되었단다. 배달된 만화책을 펼쳤다. 가장 궁금했던 것이 그 유명하다는 마들렌느 과자 부분이었다. 마들렌느 과자 모양이 너무 궁금했었다. 내 상상 속의 마들렌느 과자는 민무늬 타원형 모양이었다. 하지만 만화책 15쪽, 허겁지겁 찾은 마들렌느는 예상밖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작은 조개 모양이었다.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많이 나는 꼬막 조개처럼 생겼는데 좀 더 커 보였다. 국내 제과점에서도 그 비스킷을 파는지는 모르겠는데, 프랑스에서라면 우리의 국화빵처럼 흔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개인적으로, 만화로 된 이 책의 매력은  마들렌느 과자를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감미로운 행복감이 나를 엄습해와, 어찌 된 영문이지 나를 고립시켜 버렸다. 지금 내 안에는 과자 때문에 되살아난 이미지, 시각적 기억이, 이 맛의 뒤를 따라 내 자아에까지 이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도대체 이 극도의 희열감은 어디서 온단 말인가? 나는 이 희열감이 홍차와 과자 때문에 생겨나긴 했지만, 단순한 감각의 차원을 뛰어넘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은 과자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홍차에 적신 과자가 뭔가를 일깨운 것이다. 그 후 연거푸 열 번은 더 마셔봐야 했는데... 머나먼 과거의 기억이 과연 내 의식의 표면에까지 이를 수 있을지...> (만화판 1권 콩브레 편 15쪽)

   

  만화 장면을 지상 중계해본다. 마르셀이 홍차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식탁 곁에 다가온다. 마들렌느 과자 하나가 담긴 접시 가까이 마르셀의 손이 다가간다. 스푼에 뜬 홍차에 마들렌느 과자 조각을 담근다. 왼쪽 손에 스푼을 든 마르셀은 콧수염 가까이 스푼을 들이대고 그 향을 음미한다. 다시 한 조각을 떼어 스푼 홍차에 찍는다.  

  내 설명으로도 감이 잡히지 않는, 마들렌느 과자 모양이 궁금한 프루스트 독자는 만화로 된 이 책을 사도 좋겠다. 아직 5권까지 밖에 안 나왔다는 게 아쉽다. 나도 나머지 한 권을 장바구니에 담을 생각이다. 원본이나 원본 번역서를 지겨워할 독자라면 이 책만으로라도 제 허영심을 충족시키기엔 충분하다.  

 

 

** 일 년 넘은 리뷰인데, 오늘 한겨레에서 김두식의 <고백> 코너에서

    고종석 인터뷰 한 것 보고 필이 꽂혀 재구성했다.  그나저나 고종석 작가 넘 강도 높은 

    고백이란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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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1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에게 이런 기억이ㅎㅎㅎ 공소시효도 다 지난 일이죠.ㅋㅋ
저도 책을 훔친 기억이 있네요. 대학 도서관 앞 중고도서 가판대 비슷한 곳이었는데
두 권이요. 그냥 가져가도 될 정도로 싼 가격으로 내놓여 있었던 기억인데..암튼요.ㅎㅎ
카프카의 사진은 참 멋지지요. 훔치고 싶을 정도로..
잃어버린시간을찾아서, 얼마전 사놓고 아직이에요.
불어 읽다가 저 지금 너무 웃겨서 막 야단났어요. ㅋㅎㅋㅎㅋㅎ
악상 그라브ㅋ 고등학교 때 불어 배운 게 다인데 참 좋아했더랬는데...
근데 고종석은 절필을 왜 했을까요.

다크아이즈 2012-11-20 02:45   좋아요 0 | URL
팜님...그 시절 누구나 한두 번 겪음직한 일일 것 같아요.
고종석 작가 언젠가는 돌아오겠지요.
진심이 통하지 않는 시간들에 대한 거부일 수도,
귀차니즘을 강조하는 작가답게 그냥 좀 쉬고 싶을 수도...
왠지 둘 다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