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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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오늘은 어제의 집합체이다. 내일 없는 오늘은 있어도 어제 없는 오늘은 신생을 제외하곤 없다. 오늘 내가 하는 모든 몸짓과 생각은 좋든 싫든 어제의 결과물이다. 앙다문 입술, 조심성 없는 매무새, 무심한 위로의 말, 주춤거리며 멀어지는 발길, 재바른 손놀림, 자주 흘리는 눈물, 위선에 찬 악수, 쏘다녀 비릿해진 머릿결, 전의를 상실한 눈빛……. 이 모든 것들은 축적된 어제가 내보낸 오늘 삶의 무늬들이다. 오늘을 이루는 이 무늬결이 단단하거나 부서지는 건 어제 역시 단단하거나 부서지기 쉬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늘을 산다고 믿지만 실은 어제에 갇혀 산다. 오늘을 버리고 싶다는 것은 어제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고, 오늘을 부여잡는 건 어제로 돌아가고 싶다는 완곡한 바람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였으므로.

 

삶이란 이처럼 어제와 오늘이 얽힌 유기적 총체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소설『어제』에서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는 지난한 삶을 무심한 듯 냉정한 필치로 그린다. 장식 없고 건조한 그녀의 문체는 화려하고 다사로운 문체보다 훨씬 더한 감동을 준다. 창녀의 딸이라는 과거도, 노동자라는 현재도 연인에게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주인공의 막막함. 거기다가 연인과 같은 아버지를 뒀다는 혼자만의 비밀까지 감당해야 하는 주인공은 스스로를 제외하곤 어디서도 제 운명을 이해받지 못한다. 끝내 고통스런 어제인 연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

 

독자로서 가슴이 아픈 건 운명의 가혹함이라는 신파가 아니라 산다는 것의 비루함에 이야기의 초점이 가 있기 때문이다. 결코 과거를 파먹으며 자학하지 않는다. 사랑을 포기한 그 자리엔 현실이란 오늘이 배치되어 있다. 말하자면 죽도록 사랑했던 연인이 떠나도, 더 이상 꿈꿀 이유가 없어도 인간은 어떻게든 현실과 타협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다만, 어제에 발목 잡힌 오늘이 그 어제를 영원히 밀어내지는 못한다.

 

  어제에 저당 잡히는 걸 견딜 수 있는 건 그것이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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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08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렇게 멋진 리뷰를 보게 되다니... 대박 대박!!!!!!!
제가 이런 글을 보게 된 것이 대박이란 뜻이어요. 키득~~~

'나도 요런 글을 써 봐야징.'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2-11-09 09:16   좋아요 0 | URL
간결함 속에 담긴 서늘하고, 섬찟하고, 초연하고, 냉랭하고 그리고 그리고
담대하게 담담한 그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해내고, 저는 바라보고, 페크님은 과한 유머로 화답하시고... 이래저래 이 가을, 또 절망입니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