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를 걸쳐도 좋을 만큼 쌀쌀해졌다. 볼일 때문에 들른 시청사 안의 진열된 화분에서는 막바지 국화향이 진동한다. 창 너머 은행나무 가로수들도 달린 잎보다는 떨어져 뒹구는 잎새가 더 많다.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 계절 속절없이 떠나가고 있다. 이맘때면 백만 번이라도 사과를 다시 하고픈 아이 한 명이 떠오른다.

 

은행잎 날리고, 찬바람 돋던 어느 오후였다. 현관 앞 복도에 세워둔 자전거가 없어졌다. 새 것이기도 했지만, 자전거 타기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딸내미를 위해서라도 되찾고 싶었다. 그 즈음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자주 자전거가 없어졌다. 단순 호기심에서 한 번쯤 해보는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 상습 절도범이 계획적으로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미치자 자전거를 찾고 싶은 것 이상으로 그 절도범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파트 관리실의 협조를 얻어 CCTV를 확인했다. 엘리베이터 안을 비추는 화면에 드디어 자전거 도둑이 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볼수록 화면 속에 비친 얼굴은 내가 열고 있는 논술교실의 회원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모범 어린이였으므로 내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화면을 캡처한 사진을 그 아이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범인이 아니었다. 비슷하게 생긴 다른 애라고 그 아이가 확인해주었다. 너무 큰 실수를 저질러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선명치 않은 CCTV 화질을 믿고 착하디착한 아이를 자전거 도둑으로 몰다니.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었다.

 

사과를 한다고 했지만 내 사과는 충분치 않았다. 사과라는 건 상대가 온전히 받아줄 때까지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진심을 전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몇 년 뒤 한 고등학교 특강 수업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그 아이를 보자 반갑고 미안한 마음에 계속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를 외면했다.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사과를 했지만 상대방이 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사과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었다. 당시 무조건적이고 깔끔한 사과를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한참이나 지난 그 일을 다시 들춰낼 수도 없고, 노란 은행잎 뒹굴고 찬바람 스미는 오늘 같은 날이면 그때 내 큰 실수와 미흡했던 사과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몇 번이고 해도 모자랄 나의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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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0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와르님의 진심어린 사과에도 마음이 안 풀렸다니 힘들겠군요. 마음이란 게 참 그란거 같아요. 진심만이 마음을 열 수 있게한다니 쉬운말로 들리지만 그게 한번으로는 안 풀리나봐요. 페이퍼 제목처럼 천만번 해야될 일도 있고 또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되는 것도 있고요. 사과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저도 참 서툰 부분이에요. 느와르님 진심이 이렇게 느껴지는데도 ᆢ참 안타깝네요. 솔직한 고백 페이퍼에 울컥 ᆢ 토닥토닥^^

다크아이즈 2012-11-08 01:3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평생 마음의 짐이 될 것이예요. 이 아이 엄마께도 충분하 사과를 하지 못했어요. 역지사지해도 저 역시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거든요. 세상에 충분한 사과란 (신이 아닌)상대가 용서할 때까지라는 걸 요즘에야 알겠어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