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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방 ㅣ 동문선 문예신서 326
롤랑 바르트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책 좀 읽으려고 폈다하면 벤야민이 어쩌고, 괜찮은 사유들을 들출라 치면 바르트가 저쩌구(이것들 뿐이랴, 들뢰즈, 레비나스, 데리다, 푸코, 하이데거, 심지어 고진까지...).... 저마다 이러는 통에 무식한 독자는 머리가 터질라 칸다. 이참에 저 위대한 것들이 연필로 뭔 짓을 해놨길래 글 좀 쓰는 자들은 저토록 저들의 이름을 들먹이는지 알아봐야겠다 싶다.
우선 롤랑 바르트의 <밝은방>과 이미지 컷으로 된 <롤랑바르트, 필립 소디, 김영사>를 샀다. (물론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도 뒤늦게 샀다.) 금세 읽었다. 뭔 말인지 모르겠다. 내 독해력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역자를 원망하고 싶다. 실은 뭔 말인지 모르겠는 게 아니고, 역자가 뭔 말인지 모르도록 번역해 놨다고 보면 된다. 충분히 공부하고, 담뿍 이해하고 연필(아니 자판)을 내지를 것이지... 역자 후기만 읽어도 역자에 대한 신뢰감이 떨어진다. 어려운 텍스트를 번역한다는 게 얼마나 힘겨운지는 알겠으나, 역자 스스로 먼저 번역되어 나온 책(카메라 루시다)을 참고했다고 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안타깝다. 비문이라도 좀 덜 생산하는 역자를 만나고 싶다. 절판되었다는 카메라 루시다를 구해서 비교해 보고 싶다.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개념을 이해하게 된 건 그나마 다행이다. 나남 할 것 없이 특정 사진에 대해 떠오르는 공통된 심상, 또는 작가의 의도 등을 스투디움이라 한다면 구경꾼 개별자의 폐부 깊숙이 찌르는 뭔가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푼크툼이라 부를 수 있다. 전자가 객관적이고, 평면적이고, 대중적이며, 이해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입체적이며, 개별자적이며, 소통 부재해도 되는 것이다.
...어떤 '세부 요소'가 나를 끌어당긴다. 나는 그것이 다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사진 읽기가 변하고 있음을, 또 내가 바라보는 것이 훌륭한 가치가 새겨진 새로운 사진임을 느낀다. 이 '세부 요소'는 푼크툼(나를 찌르는 것)이다. -59쪽
스투디움이 의식적이라면 푼쿠툼은 무의식적이다. 스투디움이 대중적 갈망의 표현이라면 푼쿠툼은 개별자의 숨겨진 욕망이다. 갑자기 생각난 것 두 가지. 아주 먼 옛날 사진들을 하나하나 불러내 나만의 푼크툼을 섬세하게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푼크툼은 사금파리로 팔뚝을 문질렀을 때 생기는 상처 같은 것이므로 아, 생각만해도 서늘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마추어 말고 식자입네 하는 사진가들 대개가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생각하며 사진 작업을 하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