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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ㅣ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잠결에 뉴스가 들린다. 알람으로 맞춰놓은 텔레비전 아침 일곱 시 뉴스. 천안함 침몰 현장에서 수거한 알루미늄 조각이 너무 작아, 외부 공격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물로 단언할 수 없다는 국방장관의 말을 전해준다. 여기까지만 들었으면 좋으련만 해군참모총장이 보복의지를 밝혔고,이에 장관마저 ‘동의한다’고 말했단다.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고 싶진 않다. 분노하는 국민들에 대한 심정적 대변쯤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원인 규명도 명확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이런 멘트는 불편하기만 하다.
그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 (이후, 2004)이 오버랩 된다. 우리는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에 대해 각자의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하는 그 타인의 고통은 항상 연민이나 배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 고통은 유흥거리가 되어 우리 눈을 유혹하거나 이미지 조작의 실체가 되기도 한다. 전쟁 있는 곳의 육체적 고통이 그런 흥밋거리와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고, 우리가 그런 전쟁의 불필요성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이 책은 경고한다. 전쟁에 수반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수잔 손택은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인류는 전쟁의 역사였고, 그것은 남성성의 욕망 속에 전쟁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손택은 보고 있다. 종군 기자들에 의해 유포되는 전쟁의 참사 현장은 사실성을 담보할지는 모르지만 진실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타인의 고통마저도 우리는 소비 지향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한 편의 자극적인 영화 같은 전쟁의 이미지들은 관음증적인 소비 주체자들의 구미를 끌어당긴다.
전쟁 종군 기자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도 실제로는 이미지 조작을 한 것도 있다. 수잔 손택은 통찰한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쟁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 중 아군의 육체적 고통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강화에 한몫을 담당한다. 갈기갈기 찢긴 사체나, 팔다리가 잘린 병사들, 입 돌아가고 한 쪽 눈이 사라진 고통 받는 피사체가 그들이 아닌 내 쪽 사람이라면 우리는 동정보다 분노가 먼저 인다. 저런 죽일 놈들, 당장 나아가 더한 복수를 하리라. - 이런 인지상정의 정서를 이용하는 쪽은 다름 아닌 집권자들이다. 그들에게 국민들의 순수한 분노야말로 집권 이데올로기적 연대를 강화하는 데 더할 나위없는 보탬이 되는 것이다. 수잔 손택은 말한다. 이런 순수한 분노야말로 무지하고 천박한 것이라고.
이데올로기의 강화 못지않게 전쟁의 이미지가 주는 또 다른 왜곡은 유흥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사진이란 텍스트가 이미지 조작에 쓰인 것은 아니었다. 각종 전쟁 사진이나 다큐멘터리의 출발은 당연 인류에게 말 걸기, 라는 순수성에 있었다. 전쟁의 참상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이었을 게다. 그리하여 인류 공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라도 전쟁이란 괴물을 찬미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 전쟁 사진의 용도는 변질되었다. 타인의 고통은 나와 무관한 오락거리가 되어 버렸다. 구경꾼으로 전락한 나는 타인의 시련과 고통을 즐기기에도 벅찬 것이다. 왜냐면 다양한 미디어가 전하는 그 고통들은 나와 먼 동네의, 한 편의 영화 같은 볼거리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과 전쟁에 대한 고통은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무지가 영혼을 잠식하는 동안, 우리는 전쟁 참상의 심각성을 놓쳐버리게 되었다. 보복을 꿈꾸는 전쟁이야말로 또 다른 고통을 양산할 뿐이다. 세상 갈등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소통을 모색해나가려는 모든 시도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다. 전쟁의 본성에서 인간 연민의 한계를 채찍질하는 이 책이야말로 전쟁의 불필요성을 낮은 목소리로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