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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윤대녕은 윤대녕에서 한발자국도 넘어서지 않는다. 내게 처음 느낌 그대로인 지점에서 진척이 안 되는 작가는 윤대녕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감상의 걸음이 퇴보하거나 전진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지 않나? 실망하거나 혹하거나가 없는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딱히 누가 묻는다면? 나는 그(의 작품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해야 할 것 같다.
그의 레퍼토리 (순전히 내 느낌임)
1. 작가이거나 프리랜서이거나 (고급)백수인 남자는 여행을 떠난다.
2. 그곳에서 여자를 만난다. 미리 약속되었거나 우연이거나. 이번에는 약속된 만남이 많네.
3. 남자는 하나 같이 60년대 대화체를 애용한다. 설사 남자가 1990년대 말에, 스물 아홉이고, 만나는 여자가 스물 일곱일지라도 여자에게 ~하오, 체를 쓴다.
4. 남자와 나이 차이 별로 없는 여자 주인공은 항상 남자에게 경어를 쓴다. 그것도 모자라 항상 남자보다 적극적이다. 남자가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알아서 약속 장소를 정하고, 알아서 방(호텔)을 구하고, 알아서 음식까지 척척 마련한다. 이런 우라질~ 대개 유부남, 유부녀 이거나 유부남에 미혼인 경우가 많은데, 저렇게 적극적일 때까지 남자는 그저 묵묵히 여자를 따를 뿐이다.
하오체를 쓰는 나이 차 나지 않는 남자에게 경어를 꼬박꼬박 써가며, 주체적으로 남자를 리드한다. 그런데도 어쩐지 별로 주체적인 것 같지 않아 기분 꿀꿀하다. 남자는 잘 나서, 혹은 소심해서, 아님 귀찮아서 그런 여자를 잘 따라 주는 걸까.
꿈에라도 윤대녕이 그리는 남자상은 만나고 싶지 않다. 현실에서 윤대녕이 그리는 여자가 있을까봐 짜증난다. 가만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데, 옛 여자가 전화해서 만나자니 한 번 만나 봐야지, 하는 남자 보다는, 옛 여자가 만나고 싶으면 쿨하게 전화하는 남자가 낫다. 물론, 안 하는 남자가 더 낫다!
참 쉽게 쓴다. 매우 빨리 읽힌다. 소설은 원래 이렇게 쉽게 써서, 대중에게 먹혀야 한다. 자고로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기능은 재미와 예술성이다. 재미도 있고, 예술성도 있으니 소설의 기능면에서는 만점이지만, 텍스트를 이루는 캐릭터들이 나는야 억지스럽게 보이누나. 내가 선호하는 캐릭터들이 아니라서 그런 걸 작가에게 원망해봤자 뭐 하랴. 보리의 수경도 내겐 와닿지 않는다. 왜 첫번째로 실었을까? 보리, 한 작품만 보고도 실망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여자를 소설 속에 가두어 두려는 걸까? 작가는 여자를 여자만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쓴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