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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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곤 실레의 인물들이 표지모델로 은근 인기가 있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던가 거기에서도 본 것 같고, 민음사의 또 다른 책 도둑일기(장 주네), 도 에곤 실레표 표지이다. 문득, 궁금하다. 표지모델로 쓰인 그의 그림 저작권은 누가 갖나? 공짜로 마구 써도 되나?  인간실격만큼 에곤 실레가 어울리는 표지도 없다.  

  사흘 간 집 비우고 물 건너 갔다 왔다. 한밤중에 들어왔는데, 집안이 훤하다. 마눌님, 어마마마 없는 사이에 둘 부자 살뜰히도 집안을 치워놨다.  딸내미도 지가 알아서 기숙사에 가져갈 딸기 사가지고 떠났단다. 브라보! 암만, 그래야지. 과자와 초콜릿과 필기도구를 부려 놓는데, 순정한 아들놈, 해맑은 눈빛을 마구 쏘아보내준다. 눈물난다. 이런 식구들에게 내가 해준 건 거의 없다. 

  일만 안 벌여도 다행이다. 오늘도 한 건했다. 아들녀석 학교에서 사흘 연수 떠난 사이, 학원 데려다 줘야 하는 파트너 집에 전화하는 걸 잊어버렸다. 오늘은 우리집 당번이다. 당연히 깜박했다. 오후에 그집 엄마랑 통화까지 했는데도, 픽업 당번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우라질 정신머리라니!  이 추운 밤에 십 분 이상 아이를 떨게 한 내 죄는 그 어떤 변명으로도 부족하다.   

  내 건망증을 알기에 울집 아저씨가 잘 챙기는데, 오늘따라 늦게까지 업무에 찌드느라 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단다. 잘 나신 울 아저씨 잔소리에 무조건 내 잘못을 반성했다. 문제는 반성에서 그친다는 거다. 내일이면 또 다른 한 건이 기다리게 될 것이다. 건망증엔 약도 없다. 이 병적인 건망증은 단호하게 말하는데, 무성의에서 오는 습관이다. 식구들을 세심하게 챙기지 못하는 더러븐(!) 이기주의. 지 생각 속에만 갇혀 있는 동안 사소한 주변을 챙기는 걸 깜박하는 것이다. 사소한 게 얼마나 중요한데. 제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떠나고, 기억해야 할만한 것들은 꼭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자이 오사무까지 갈 것도 없이 나야말로 인간실격이고나. 

  피곤한 몸으로 일어나, 아침부터 잡무에 시달리느라 오후 다섯시에야 책을 집어 들었다. 내일 당장 토론 수업해야 하는데, 번갯불 위 콩이 따로 없다. 책은 쉽게 읽혔다. 너무 늦게 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맘에 쏙든다.  밑줄그을 통찰이 많은 예민한 작가의 고뇌가 눈에 잡힌다. 누구나 다자이 오사무처럼 쓰면 큰일 나겠지만, 다자이 오사무라면 '인간실격'이어야만 한다. 희망을 말하는 게 작가적 소명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작가의 섬뜩한 통찰이야말로 소설가의 기능이 아니겠나. 작가는 관찰하고 기록하고 재해석하는 부류이지, 섣부른 희망 따위로 독자의 입맛을 사탕발림화 하는 것이 다가 아니란 말이다.    

  나름 정리한 수업 자료를 덧붙여본다. 죽을만큼(은 아닌가?) 피곤하다. 

 

* 토론 도서 -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 토론 목표 - 순수함을 갈망하던 젊은이가 자신을 둘러싼(포함한) 위선과 잔인함에 의해 파멸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직시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고 달랜다.      

* 형식 - 액자소설. 어린시절, 청소년시절, 성년시절, 스텐드바 마담으로부터 수기를 입수한 내가 요조 이야기를 공개하는 형식. 자서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이야기는 이런 형식으로 민망한 자의식을 포장할 수 있음. 결국 금세 들통 나더라도.

*등장인물   

 

나(요조) - 폐쇄적, 냉소적, 자기모멸, 인간 실존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 인간에 대한 공포.

다케이치 - 주인공의 인간 냉소에 대한 반항과 허위의식을 최초로 갈파한 친구   

 

호리키 - 도회적 인간의 표상. 대학친구.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 세상은 개인인 아닐까  -92, 93쪽

서로 경멸하면서 교제하고 서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그런 것이 이 세상의 소위 ‘교우’라는 것이라면, 저와 호리키의 관계도 교우였음은 틀림없습니다. (주인공의 독백)  


쓰네코 - 가마쿠라 바다 사건, 술집 여자.

넙치 - 아버지 지인, 보증인, 가마쿠라 사건 이후 칩거 때 보살핀 이

시즈코(딸 시게코)-여기자, 더부살이, 모녀의 행복을 위해 떠남.  

스텐드바 마담 - 조악하고 음란한 만화가 시절의 정부 노릇. 나중에 이 소설 원고 보관인

요시코 - 담배가게 아가씨. 단번에 결정한 결혼. 만화 편집인과 자는 요시코 보고 인간에 대한 절망 다시 되새김. 요조는 수면제 복용. 기쁨도 주지만 세상은 단번 승부 따위로 하나부터 열까지 결정되는 손쉬운 곳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됨.

약국 여자 - 몰핀에 빠지게 됨. 요양소 감. 결국 요조는 인간 실격.  


<밑줄긋기>

*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으니까요. -27쪽  


*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 41쪽  

 

*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 93쪽  


* 인간 관계의 본성 -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 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97쪽  


*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 134쪽  


*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 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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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미 2010-04-02 0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팜므님은 뭐라도 하시면서 이기적이신듯. 식구들이 요즘 저에게 바라는 건, 아무 것도 안해줘도 좋으니 그저 웃음진 얼굴로 행복하게 곁에 있어 주는 거래요. 팜므님의 글 읽으니 팜므님 식구들이랑 우리 식구들 함께 놀러가면 참 좋을 것 같단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 팜므님 딸있어 좀 부러워요. 전 아들만 둘.

다크아이즈 2010-04-27 00:47   좋아요 1 | URL
꼼미님 잘 계시나요? 미시건에도 봄이 왔나요? 전 복사꽃 보러 가야 하는데... 그곳에 혹 자카란타 꽃이 피나요? 보랏빛 그 꽃이 왠지 미시건에는 필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