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엘리자베스 키스 외 지음, 송영달 옮김 / 책과함께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엘리자베스 키스를 다시 꺼내 봤다. (읽은 게 아니라 그냥 봤다~) 

기어이 옛날에 쓴 리뷰를 다시 정리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쉽게 쓰는 것도 이토록 어려운데, 깊게 쓰는 사람들의 고통은 어떠할까?

 

죽어도 못 빌려 줘




  '책의 소유'에 관한 그간의 내 주장을 철회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법정스님도 아니면서 나는 책 이야기가 나오면 ‘책을 소유하려고 하지 마세요. 책의 효용은 읽는 것이지 가지는 것이 아니랍니다.’ 라고 떠들어대는 편이었다.

  무릇 책이란 우애 있게 돌려 읽고, 과감하게 놓아줘야할 때는 놓아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예외가 있으니 바로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책과함께, 2006)같은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커피얼룩 한 점 묻히지 않았고, 그 좋아하는 밑줄조차 긋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화장실 가는 남편이 이 책을 집어들 때 필사적으로 뺏기까지 했다. - 그건 화장실에서 읽을 책이 아니야! 내 절규에 눈이 휘둥그레진 (그간 이런 일은 없었다.) 남편은 얼른 책을 침대 위로 던져버린다. 혹, 화장실까지 동행한 책에 물기라도 묻으면, 그리하여 군데군데 습기를 품어 책이 부풀기라도 한다면? 이 책이 그런 허술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돼지.

  맨 뒷장 책 정보를 보니 1판 2쇄에 머물러 있다. 출간된 지 몇 년 되었는데도 매출력이 신통치 않다. 이유? 내용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책값이 비싸기 때문이리라. 이만원이란 거금을 내지른다는 것, 책벌레들에게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구성을 보면 절대 그 이하로 책값이 내려갈 수도 없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렸고, 엘스펫 키스(로버트슨 스콧)가 글을 썼다. 둘은 자매이다.  1920 ~ 1940년대에 일본에 거주하던 엘스펫 키스의 소개로 우리나라를 여행하게 된 언니 엘리자베스가 그 시절의 우리나라 산천 풍광과 인물을 섬세하게 복원시켜 놓았다. 이방인의 붓 끝에 녹아난 그림도 개성적이지만 엘스펫의 글 또한 군더더기 없이 매혹적이다. 약자에 대한 연민과 편견 없는 시선이 직조한 그녀의 글들은 내면과 상충한 흔적 없이 담백하기만 하다. 다사로운 눈길 때문에 통찰은 묻혔을 거란 예견도 버리시라. 예리한 감성과 따스한 연민이 동시에 독자들을 그러안는다. 원래 책을 더럽게 보는 나는 마구 밑줄을 그어대고 그 밑줄을 리뷰에다 옮기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책만은 유리그릇 다루듯 읽다 보니 그런 수고를 할 수가 없었다.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을 만나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옮긴이 송영달 선생의 노고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우연히 발견하고, 자료를 수집한 그분의 고군분투가 눈물겹다. 미국에서 행정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그의 학문적 바탕이 미술 또는 글과 그리 가깝지 않은 분이라 더 존경스럽다. 좋아하면 미치게 되고 미치면 이루게 되나보다.   
 

 

   협상은 한참이나 끌었는데 그게 동양식 대화법이었다. 그들과 얘기하려면 용건을 빙 둘러서 해야 하므로 요점까지 도달하는 데 좀 시간이 걸렸다. 내가 스케치하기 시작하니 그들은 곧 중국 고전 얘기를 나누면서 금방 내 존재를 잊어버렸다. 내가 훗날 한국을 다시 찾아왔을 때, 그때도 이런 멋진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50쪽)  


  한국 여자들은 뼈대가 작으며 얼굴 표정은 부드럽다. 인내와 복종이 제 2의 천서이 된 듯하다. 하지만 온순하기만 한 한국 여자들에게도 의외로 완고한 구석이 잇다. 가령 이들에게 새로운 문물을 강요한다든지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의 생각이나 생활 신조를 바꾸려든다면, 차라리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들 허물어 옮기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그러므로 한국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선의 방법은 오직 한국 풍습을 존경하며 끈기와 친절로 대하는 것 뿐이다. (74쪽)

  한번은 동대문 병원에 사타구니에 심한 염즈이 생긴 여자가 찾아왔다. 같이 따라온 친구의 말에 의하면, 지난 번 해산할 때 그 부분이 심하게 찢어졌는데, 동네 한의사가 집안 사람들에게 그 부분을 불로 지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잘 아물지 않아 더 불로 지졌더니 상처가 몹시 악화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무닫응 불렀는데, 무당은 호랑이 이빨과 발톱을 넣어 끓인 물을 환자에게 먹이고, 악귀야 나가거라라고 소리치며 요란스러운 굿을 했지만 별로 신통한 효과는 얻지 못했다.   병원에서 몇 주일을 정성껏 치료한 결과, 그 여자와 갓난아기는 둘 다 건강한 몸으로 퇴원할 수 있었다. (76쪽)

 어느 날 이 노인 영감이 자기 집 앞의 벽에 엄숙한 표정으로 기대앉아 잇는 것을 보고서 스케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의상, 모델을 서주면 돈 1원을 지불하겠다고 말을 건넸다. 모델을 선다고 하지만 그 영감은 평소하던 것처럼 그냥 앉아 잇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노인 영감은 갑자기 자기가 중요한 존재라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머리를 요리조리 움직이면서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그러고는 계속 움직이고 불평하면서 통역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하느냐, 자기를 1원씩이나 주면서 그림을 그리니 저 그림 값은 외국에 나가면 훨씬 더 비쌀 것이 아니냐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급기야는 저 서양화가가 자기 모습을 그려가 미국에서 무려 백 원이나 받을 것 아니겠냐는 말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노인들을 지나치게 공겨하기 때문에 가끔 노인들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78쪽)

 

  이방인 자매의 그림과 글로 남겨진, 일제 강점기 시절의 우리 산하와 생활의 단면을 되새겨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의의는 충분하다. 개화기 이후 서방인이 본 한국을 다룬 책은 많지만, 그림과 글이 함께 어우러진 책은 드물다. 이런 책이 세상 빛을 볼 수 있도록 애쓴 송영달 선생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이 책을 조심스레 다루게 된다.

  누군가 이 책을 빌려달라고 하면 되돌아올 때까지 노심초사하게 될까봐 차라리 한 권 따로 선물해줄지언정 선뜻 빌려주지 않을 것 같다. 인상 깊은 그림과 차진 활자를 기억하고 싶은 독자들은 이 책 사도 그리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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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절대 안 빌려주는 책,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from 엄마는 독서중 2010-03-25 00:42 
    팜므느와르 님의 서재에서  <죽어도 못 빌려줘 - 다시 정리하는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페이퍼를 읽었다. 바로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를 아무도 못 빌려준다는 것.^^  이 책은 아직 못 봤지만, 얼마 전 KBS스페셜에서 방송한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방송일자 : 2010.02.21(일) 8시  
 
 
2010-03-24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4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4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03-24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KBS스페셜에서 어떤 신부님(이름 생각 안나요ㅜㅜ) 다룰 때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그림도 소개됐던 거 같아요. 이런 기억력하고는...
제가 아무도 절대 안 빌려주는 책은 이세 히데코의 그림책이랍니다.ㅋㅋ

다크아이즈 2010-03-24 22:08   좋아요 0 | URL
이세 히데코의 모든 그림책이요? 검색해볼게요.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은 문외한... 님 덕에 이세 히데코를 알게 됐네요. 고맙습니다.

순오기 2010-03-25 01:02   좋아요 0 | URL
제가 소장한 이세 히테코 그림책은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와 나의 형 빈센트 뿐이에요.
일본 서점에서 <1000의 바람 1000의 첼로>란 그림책을 봤는데
일본어를 모르니 사올 생각을 못했던 걸 후회하고 있어요.
전쟁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였는데, 번역본이 나오길 염원하고 있어요.

blanca 2010-03-2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반가워요. 이 책이 정말 소중하게 꽂혀 있는데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소장가치 이백프로의 책이지요. 다시 한 번 봐야겠습니다.^^

순오기 2010-03-24 23:54   좋아요 0 | URL
엇~ 블랑카님까지 가세하시니 4월 도서구입 때 장바구니에 담길 확률이 99.99% ^^

다크아이즈 2010-03-25 18:4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런 책은 무소유가 아니라 소유할수록 좋은데... 소문이 덜 난 상태에서 시들해져버렸어요. 못내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