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남자랑 십구 년째 살고 있다. 그럭저럭 그 많은 시간을 별탈없이 건너온 것은 전적으로 그 남자 덕분이다. 이런 밑지는 고백을 하는 건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계바늘이 세 시를 향해 가고 있고, 아무래도 이 시간은 이성의 머리칼이 곧추 서기보다는 감성의 손끝이 예민해질 때니까. 이런 틈을 타 양심고백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비록 내일 한낮 멀쩡한 정신이 되었을 때, 이 글이 손발 오그라들게 한다며 지우게 될지라도.
천성이 게으르고,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공주과인 나는 그 남자 때문에 전업주부로서의 자생력을 점점 잃어 가고 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 볼품없는 살림솜씨는 십구 년째 자발적 퇴화 진행 중이시다. 번듯한 직장이 있어 시간에 쫓기는 것도, 쌈박한 재테크 솜씨로 큰 소리 칠만한 상황도 아니면서 어쩌자고 뻔뻔하게 주부로서의 직무유기를 행하고 있는지지 불가해하다. 하지만 그 답을 나는 정작에 알고 있다. 십구 년 산 남자의 이해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 대신 포기, 라는 말이 더 적확하겠지만 그 표현 쓰면 너무 서글퍼질 것 같다.)
오늘 저녁에도 변함없이 내 할 일(딱히 할 일이랄 것도 없지만, 여기서 <내 할 일>이란 가사노동을 제외한 내 개인적인 모든 활동을 말한다.)을 하고 있는데, 그 남자는 자신의 출근복과 와이셔츠를 한무더기 가져다 놓고 내 옆에서 묵묵히 다리기 시작한다. 괜히 계면쩍고 미안해진 나는 '히야, 언제봐도 당신은 뜬 구름보다 쉽게 바지주름을 잡네.'라고 딴에는 유머랍시고 한마디 했다. '괜히 미안한 척 말도 안 되는 멘트 안 날려도 된다. 속 보인다'라고 그 남자가 멋대가리 없게 받아친다. 지기 싫어 나도 모르게 또 다음 멘트를 날린다. '뭐,꼭 전업주부라고 옷 다리라는 법 있냐?' 그 말은 안 하는 게 나았을까? '어이구, 니가 전업주부면 내가 옷 다리겠냐?' 이런 비아냥을 들었으므로. (그 비아냥거림 속에 숨어 있는 그 남자의 속 깊은 신뢰를 발견하는 재미는 글로 표현하기엔 벅차다)
그 남자 아니라면 '직장없는 취업주부' 행세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까탈스런 남편 만나 몸과 맘을 다친 친구가 있다. 하루 다섯 건씩 과외하면서, 삼수하는 아들 뒷바라지 하는 것도 모자라 배려없는 남편 때문에 힘들어 하는 친구와 통화할 때, 실수라도 그 남자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는다. 그저 언제나 그렇듯, 미뤄둔 <남편 흉보기>대회에 참가한 것처럼 과장해서 그 남자의 단점을 읊어댄다. 어쩌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그 남자이지만 입장 바꾸면 내 단점은 그보다 훨씬 더하다. 따라서 이만하면 감사한 일이라고 오늘 같은 감상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컴맹인 마누라를 위해 엑셀 수식을 만들고, 깔끔하게 자료를 재배치하느라 잠자리에 늦게 든 그 남자, 지금 옆에서 열심히 코 골고 있다. (자료 만들어 주면서도 어찌나 잘난척을 해주시는지 당장 컴퓨터 배우러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꾹 참았다. 삐지면 회복하는데 일주일 이상 걸린다. 이런 우라질리아~) 늦게까지 잠 못 들고, 서재질이나 하고 있는 마누라의 무서운 밤을 위해 불 끄지 않고서도 마누라 곁에서 잠드는 습관을 들인 그 남자. 잠들기엔 너무 밝다고, 다른 방으로 결코 피신하지 않는 그 의리야말로 십구 년이 낳은 미운 정 고운 정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 앞에서 숱하게, 오묘하게 변덕스런 내 본심은 더도 덜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코 고는 그 남자의 콧머리를 한 번 비틀어주고 곧장 베개 끌어 안고 잠이나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