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 보름달문고 23
김려령 지음, 노석미 그림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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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슴에 징하게 새겨진 상처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아니다. 사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수십년을 살아오면서 상처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그 무게와 고통은 본인만이 가늠할 수 있는거라고 알아왔으니까.
남들은 함부로 누군가의 가슴의 상처를 이야기 할 수 없다.
그 누군가의 가슴이 ’하늘이’처럼 공개 입양된 아이의 가슴이고, 
그 가슴에 심장병 수술로 인한 해마 모양의 상처가 있다면.
더더욱 함부로 이야기 할 것은 아니다.


신기하게도 내 기억 속에 4학년 이전의 기억은 별로 없다.
아주 짧은 단편 단편들로 이루어진 사건들, 친구들의 아스라한 얼굴, 집 주변의 단편적 풍경 뿐.
5학년 이후로 전학을 오고 나서 5,6학년 때의 기억은 바로 어제라 할 만큼 생생하다.
어떤 친구와 어떤 느낌의 소통을 했는지, 어떤 시간엔 어떤 행동들을 했는지...
소소한 내 감정과 느낌들이 여전히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그때가 자아를 찾아가는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라는 존재에 눈을 뜨고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내 생각과 감정이 중요해 지던 시기.

그때, 우리 엄마는 병상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 뒷수발을 하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할머니 댁에 가 계셨다.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손은 거부하시고 오직 큰 며느리인 우리 엄마만 찾으셨다.
착한 우리 엄마는 어린 우리 셋을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매일 아침 일찍 나가셨었다.
매일 힘없이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 옆모습,
그리고 쪼르니 달려가 엄마의 볼에 입을 맞추던 그 느낌,
그리고 엄마의 옅은 화장품 냄새까지도 생생하다.

나의 엄마지만 그렇게 나갔다 들어오는 모습이
내 마음에 왠지 모를 횅함과 지긋한 답답함으로 다가왔었다.
허전한 느낌. 버려진 느낌. 이해는 하지만 섭섭한 느낌.
답답하고 지긋지긋해 하는 엄마의 느낌이 한 마디 말 없이도 전해져 숨 막히는 느낌..

   
  나는 태어난 지 한 달도 안돼서 우리 집에 왔다고 한다. 그러니 친부모와 헤어지던 때를 기억할 수 없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통과하는 순간이 있다. 버려진 강아지를 볼 때, 혼자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볼 때, 덩그러니 떨어진 낙엽을 볼 때도 그렇다. 아마 내 어딘가에 헤어짐의 기억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슬픔, 생각할수록 화나고 서운한 슬픔. p.20  
   

친부모에게 완전히 버림 받은 하늘이에 비하면 나의 느낌은 철없는 투정에 불과하겠지만
이 구절을 읽는데 나의 그 시절이 떠올라 나 역시 서늘한 기운에 잠시 몸을 감쌌다.
고작 6학년 짜리가 ’덩그러니 떨어진 낙엽’에 서늘한 기운과 헤어짐의 기억을 더듬다니...

하늘이는  공개 입양된 자리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복해 보이는 아이지만
혼자 자신만의 집을 만들어 가듯 내면적으론 고독한 아이이다.
공개입양아로 사는 것, 많은 사람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것 이전에 근본적으로
이 사람들이 나의 친부모가 아니라는 것과 어딘가에 나를 품었던 친부모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
서로를 원하고 사랑하지만 감정적, 정서적으로 괴리감을 느끼는
엄마와의 보이지 않는 갈등 묘사는 하늘이의 서늘함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 서늘한 기분을 얼마전 어떤 아이에게서도 느꼈었다.
5년 전 병으로 친 엄마를 잃은 중학교 1학년 여자 아이.
2년 전 참 친절하고 좋은 새 엄마를 두었다고 했다. 
적극적이고 표정도 밝은 그 아이가 멀리 서 있는 새엄마를 ’엄마!’하고 부르는데
왜 내 마음이 그렇게 서늘해 졌을까.
잠깐의 순간이었지만 그랬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서
낙엽이 뒹굴어 가는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거다.
친엄마와 딸 사이의 멀어지는 순간, 새엄마와 딸 아이의 가까와져야만 하는 순간,
이 책 속 하늘이처럼 공개 입양한 유명인 엄마와 딸 사이의 긴장감을 깨뜨려야 하는 순간...
’가족’이 되려면 그렇게 깨뜨려야 할 서늘한 순간들이 있는거다.
가슴에 새겨진 해마조차 가족이 되려면 깨뜨려 다시 안아야 할 순간들이 필요하다.

난 아쉽게도 그런 기회를 십수년이 지난 후에 얻을 수 있었다.
이 책 속 하늘이는 다행히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얻게 된다.
물론, 앞으로도 다시 깨뜨리고 품어야 할 순간이 많이 오겠지만 
그렇게 가족이 되어가는 순간은 차츰 차츰 서로를 더 가깝게 만든다.

사춘기를 시작하는 아이들,
앞으로 가족 때문에 가슴에 서늘한 상처 하나씩 떠안게 될 아이들에게
이 책은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할 것 같다.
진짜 가족이 된다는 것은, 서늘한 상처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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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5-11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우아한 거짓말』을 읽고 '권하고 싶지 않는 이야기, 그러나 시작했다면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썼어요.

얼마 전에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를 읽고 '그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은 있어요'라고 썼구요.

내일이나 모래 『완득이』를 읽을건데, 세 번 째 책에 와서야 저는 김려령,이라는 작가를 완전히 기억하게 되었다,고 쓸 수 있을것 같아요.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는, 별 다셧개 주셨군요! 『완득이』 다음에 읽어볼께요. 님의 리뷰를 읽으니 느낌은 왠지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5-11 20:49   좋아요 0 | URL
아...그러니까 저 책들이 이 작가가 쓴거였군요..이런 무식한 저 같으니!
다른 책들은 읽어보지 못했어요.

별점은요, 제가 후한 편이예요.
메리포핀스님의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리뷰 보고 왔어요.
비슷한 느낌일 듯도 한데...
이 책은 그렇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요.
내면적인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아이들 책이라 무겁게 다루지는 않았어요.

포핀스님 덕에 다른 책도 찾아봐야 겠어요^^

마녀고양이 2011-05-1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제 맘도 서늘해졌어요... 아까 그 순간을 읽을 때.

현맘님 또 찌찌뽕~
저는여 초등 2학년 때 전학왔는데, 그 이전은 기억나는게 거의 없어요.
그런데 전학 온 그 순간부터 기억이 아주 생생해요. 신기하더라구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비단 가족 뿐 아니라
조금씩 가까와지는, 세월을 함께 하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인거 같아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5-11 20:50   좋아요 0 | URL
우리는 공통점이 많네요! ㅎㅎ
'전학'이라는 건 그 나이때의 아이들에게 참 큰 문화적 충격이예요. 그죠..
전학 첫 날의 느낌, 만났던 아이들, 선생님 얼굴은 아직도 서늘한 느낌으로
잊혀지지가 않으니 말예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죠.
지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수용!! 우리두요!

감은빛 2011-05-12 01:11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랑도 똑같아요!
저도 2학년때 전학왔어요.
그런데 저는 그 전의 기억도 생생합니다.
아니 오히려 너댓살쯤 무렵의 어릴때 기억이 오히려 더 생생해요.

제가 가장 기억안나는 건 오히려 전학 직후의 시기예요.

마녀고양이 2011-05-14 01:30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이 이상하신거죠!
네댓살 정도에 사람의 기억 방식이 바뀐다는 사실 아세요?
아마..... 감은빛님은 저희보다 진화된 상태일지도, 에헴,
뇌 검사를 한번 해봅시다.............. ㅋㄷㅋ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