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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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1 줄리언 반스.

무지막지하게 잘 생긴 남자가 새빨간 가운 같은 걸 입고 있는 그림. 내 나이 때의 프랑스 부인과-외과 의사 닥터 포치의 초상이다. 줄리언 반스는 이 그림에 꽂혀 포치와 그의 친구, 연인, 가족에 관해 열심히 캐들어갔고 이 책을 썼다.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의 프랑스나 영국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내게 만만한 읽기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논픽션이다 하고 의식하지 않고 읽으면 왠지 모르게 빠져드는 이야기였다. 그럴 만한 요소가 다 나온다.

왕자 에드몽 드 폴리냐크, 백작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페잔사크, 닥터 사무엘 장 포치, 두 퀴어에 한 (숱한 염문에 휩싸인) 이성애자와 그들 주위의 소설가, 시인, 화가들과 그 작품들만으로도 얼빠지게 화려했다. 자기들끼리 친목질하고 그러다가 사소한 걸로 빡쳐서 총칼들고 결투하고 자기가 쓰는 글에 엉망진창 인물로 등장시켜 빡치게 만들고 연애질하는 꼴만 봐도 소위 고전 작가에 대문호로 칭송하던 인간들이 얼마나 찌질한지, 찌질해서 너무나 재미있었다.
찌질이들 사이에서 첫 부인과 딸과 아들들은 잘 못챙기고 연애에 열심이었다는 나름의 흠은 있지만, 부인과 의학의 발달과 외과 수술과 치료, 연구, 예술품 수집 등에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자기 할 일 열심히 하면서 사교활동도 부지런히 한, 그리고 중요한 자리마다 포레스트 검프마냥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닥터 포치라는 인물은 뭔가 사기캐에 가까웠다. 특정 인물을 영웅시하거나 전기를 통해 칭송하는 글을 좋아하지 않는데, 줄리언 반스가 얼마나 이 인물에게 빠져 있는지 느껴졌고, 그저 여기 쓰인 게 픽션이라도 좋고 나열된 게 가상 인물의 일대기라도 좋겠다, 매력뿜뿜이로구나 하고 닥터 포치의 마성에 나도 빠져버렸다… “쇼비니즘은 무지의 한 형태다.”라는 말을 의학 논문에 적을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가산점 먹고 들어가십니다...ㅎㅎㅎ

이 책을 읽으니 아이 참 언젠간 읽어야겠네 하는 책 목록이 늘었다.
위스망스의 ‘거꾸로’, 이 책 읽다 말고 서울시전자도서관에서 빌렸다...픽션의 인물이 실존 인물과 동일시 되는 어리석음?억울함?나도 괜히 작가와 작중 인물 은근슬쩍 엮어 보는 독자였는데 그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하는 걸 안지는 얼마 안 되었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하하하...이웃s모님의 영업으로 올재클래식 10권짜리를 2만9천원이었나?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작년에 집에 들여놓았다. 지금도 일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주황주황 표지를 뽐내며 야 너 쉰살 전에는 읽을 거라며? 하며 나를 째려보고 있다…
플로베르의 ‘살람보’, 나는 ‘보바리 부인’을 정말 좋게 읽었는데, 이 책이 자꾸 여기저기 언급되니 또 읽긴 읽어야지 하지만 언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이거 읽었는데 기억이 안 나. 그리고 이 책에서 자꾸 눈치 없이 영국 법원에서 프랑스 법원 흉내내고 깝치다가 감옥에서 썩는 오스카 와일드 불쌍해서...게다가 이 책이랑 ‘거꾸로’랑 연결고리가 나와서 왠지 다시 봐야 할 것 같다.

예술가 집단의 온갖 퀴어들과 혼외 연애와 인정욕구와 질투와 중독 그런게 남의 이야기라 읽기에는 재미있었다. 저런 애들이 저렇게나 많이 비슷한 시대에 숱한 이야기거리 남기며 살다가 지금은 다 죽었다는 게 흥미로웠다. 지금이 그런 시대에 그런 삶이 아닌 게 다행인지 아쉬운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소설이 남고, 시가 남고, 그림이 남아서 우리는 재미나게 본다. 다만 맥락이 지워지면 미래의 인간들은 저널리스트 초상을 보고도 은행가로 오해한다… 댄디한 데다 능력있는 의사를 보고도 환자나 건드리는 양아치 의사로 오해한다… 그게 줄리언 반스는 되게 안타까웠나 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런 오해와 모욕은 먼저 죽은 죄일 뿐… 늦게 태어난 죄로 아이씨 멋진 건 이미 다 써 버렸어! 하는 건 나의 몫일 뿐…



-집에 있는 닥터 포치. 코트가 아니라 빨간 가운 아닐까.
-내가 역겹게 잘 생긴 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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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11-21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비니즘하면 꼭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폴포트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1-21 23:02   좋아요 1 | URL
저는 폴포트급까지는 안 가도 일상적으로 무지의 한 형태를 자주 마주합니다. ㅎㅎㅎㅎ

NamGiKim 2020-11-21 23:03   좋아요 1 | URL
광화문에도 무지의 한 형태를 한 그분들이 읍읍

반유행열반인 2020-11-21 23:04   좋아요 1 | URL
어디에나 있고 스스로도 언젠가 빠질 수 있는 맹목이니 누구 콕 집지 않으렵니다. ㅎㅎㅎ

2020-11-22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2 0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3 0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3 0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 폐지수집상. 중고책만 이백권 ㅋㅋㅋㅋ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11679&custno=1940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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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웃집 칸트군
누키 시게토 지음, 나가사와 마오리 그림, 김경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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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0 누키 시게토 지음, 나가사와 마오리 그림.

작년말 왜 칸트인가?를 읽었다.고 한다. 칸트?하고 물으면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래서 빌렸다. 만화책으로 칸트를? 솔깃했지만 역시나 쉬운 길은 없고 귀여운 그림만 눈으로 훑었을 뿐 남는 게 없었다. 그리고 서울시전자도서관앱으로는 만화책을 보지 않는 게 좋다. 그림이 엉망진창 깨져서 겨우 봤다 ㅋㅋ
딱 한 마디, 철학을 배울 수 없고 철학하는 것을 배운다는 말만 남았다. 나는 둘다 못 배운 것 같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귀찮아하지 않고 어려운 책도 피하지 않고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ㅋㅋㅋ 왜 마음에 여유가 없을까요.
모에모에한 칸트군 맛보기로 감상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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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1-20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트 정말 젊어지셨네요ㅎㅎㅎ 마지막 그림은 익숙한 칸트 얼굴이라서 더 비교되어요ㅎㅎ 근데 칸트 머리위에 모기향인건가요...?

반유행열반인 2020-11-20 21:34   좋아요 1 | URL
네! 일본에 모기가 많다면서 얹고 다녀요 ㅋㅋㅋㅋ깨알같이 웃긴 부분이 꽤 있었어요.

페크pek0501 2020-11-20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어 보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1-20 22:09   좋아요 1 | URL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재미있을 리가...만화책을 가장한 철학책이잖아요 ㅎㅎㅎㅎ

syo 2020-11-21 1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본애들 진짜 저런거 잘해.... 대단해. 진심으로 칭찬합니다. 왜 여기다가 칭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해요.

반유행열반인 2020-11-21 11:53   좋아요 1 | URL
와따시와 간꼬꾸징데쓰

Yeagene 2020-11-21 1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로 봤는데도 어려워 보여요...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11-21 13:40   좋아요 0 | URL
어려웠어요 ㅠㅠ ㅋㅋㅋㅋㅋ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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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3 이주란.

딱 3년 전 이주란의 첫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를 읽었다. 이주란은 내 친구의 친구이다. 나는 이주란의 소설이 좋다고 친구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고 젊은작가상 수상식 영상으로 그의 얼굴도 알게 되었지만 이주란은 내 존재 자체를 모를 것이다. 첫 소설집은 뭔가 범상치 않은 한과 체념과 서러움이 마구 폭발했는데, 그래서 김애란보다 이주란이 최고라고 혼자 되도 않는 찬사를 보냈었다.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너는 쉽게 말했지만’을 읽었을 때는 뭐랄까, 괜시리 미안해지고 덩달아 슬퍼졌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무슨 서러운 일과 슬픈 일을 더 겪었을까, 소설 속에 자주 나오는 ‘그 일’이란 어떤 힘든 상황이었을까 궁금해질 만큼, 책 속의 인물들은 희망 같은 건 갖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 안 하고 소설만 쓰고 싶다, 했다가 소설 쓰기 싫다, 했다가. 그런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조금 알겠다가, 나는 내가 가진 게 너무 많아서 부끄러웠다.
지지부진이라는 말을 삶 앞에 붙이기에는 껄끄럽지만, 때로는 삶이 그런 때가 온다. 그러면 그만 살고 싶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순간은 정말 지지부진하게 지나가서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다 누워서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너무 많은 것들을 지고 날뛰게 만든다. 그게 좋은 글이나 노래나 그림이 되면 행운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병이 된다. 아, 누구든 병을 앓지 말고 병이 될 것들이 글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내가 읽을게 내가.
그렇게 살지 말라는 말이 꽤나 데미지가 컸는지 이 소설 저 소설에 자주 나온다. 누가 누구한테 이렇게 살라 말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살면 되고 안 되고는 누가 정하나.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는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지 정작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은 몰라서 누군가는 늘 아파야 한다. 조금 더 용기를 낸다면 그 앞에서나 집에서 혼자 울지 않고 너나 잘해 씨발, 할 텐데.
어린 시절 어느 마을에서 자라는 동안 겪은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식으로 쓰인 ‘H에게’라는 마지막 소설이 제일 잘 읽혔다. 촌락에 가까운 경기도 어드메에서 자라고, 작가는 나랑 나이도 같고, 내가 뱉은 건 아니지만 어디선가 떨어져 자란 수박 덩쿨이 있는 골목을 지날 때마다 얼마나 자랐나 지켜보다가 손톱 만한 열매가 노랗게 말라 죽어버리는 걸 본 적이 있어서, 동네에 우루루 몰려다니는 개들이 무섭고 아무데나 싸 놓은 개똥이 짜증난 적도 있어서, 부유한 친구 집에 가서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서, 하여간에 궁상스러움이 너무 와닿았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너무 잘 살게 된 것 같아(나는 마카롱을 아주 많이 먹어봤거든...) 또 괜히 미안해졌다.

+밑줄 긋기
-자신 없으면 자신 없다고 말하고 가끔 넘어지면서 살고 싶다. 무리해서 뭔가를 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긴장하는 것이 싫다.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89)
-여러 경우에 이렇게 생각하면 좀 편했다.
1. 출근을 할 때는 ‘나는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조지영은 실제로 소액이나마 기부를 하는 곳들이 있었고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했다.)
2.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할 때는 ‘나는 배우이고 작품을 찍으러 간다.’(조지영은 내향적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엔 이런 욕망도 있었다.)
3. 운동을 하기 싫은데 해야 할 때는 ‘나는 김연아다.’(이것도 연기의 일종이었다.)
4. 어떤 식으로든 이별을 하거나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죽었다.’(다른 설명이 필요 없음.)
5. 자기 자신이 싫을 때는…… 조지영은 자기 자신이 싫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래서 그냥 싫어했다. 누구든 자기 자신을 싫어할 순 있다. 하지만 그걸 타인에게 말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 165)
-Y는 제가 독후감을 써주는 대신 제게 돈을 주었습니다. 만원이었는데요, 당시 버스비가 백오십원인가 백칠십원인가 했던 기억이 납니다. Y는 상을 타고서 제게 부럽다고 말했고 저는 만원으로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신발주머니에 숨겨두었다가 어머니에게 빗자루와 파리채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슈퍼에서 도둑질을 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저는 실비아와 빼빼로를 샀었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머니에게 끝내 사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H에게, 253, 나도 실비아 알아!!!레몬맛 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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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1-20 0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앞에서나 집에서 혼자 울지 않고 너나 잘해 씨발, 할 텐데.˝ 그러니까요. 제가 그걸 못해가지고 한 십년 있다 터졌잖아요. 스물일곱살이던 저에게 가서 속삭여주고 싶네요. 울지 말고 그냥 욕을 해 ㅋㅋㅋㅋㅋㅋㅋㅋ 뭘 다르게 살어. 이렇게 사는 것도 조따 힘들어따 진짜.. ㅋㅋㅋ ˝병이 될 것들이 글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내가 읽을게, 내가˝ 이런 마음 너무 훌륭하네요. 나도 내일부터 해봐야지. ‘나는 김연아다‘. 추워요. 막 비도 추적추적 오고 그르든데 잘 지내셨나요? (나도 실비아 알아!!!)

반유행열반인 2020-11-20 07:01   좋아요 1 | URL
하나님 잘 계시나 공연갔다 술병 나서 뻗은 거 아닌가 노심초사(사실 제가 며칠 전에 어느 뒷풀이 갔다 술병 나서 ㅋㅋㅋ) 하다보니 한 주가 휘릭 갔네요. 나는 ‘그 사람은 죽었다’를 십대 쯤 배웠어야 했어 ㅋㅋㅋㅋ

하나 2020-11-20 11:29   좋아요 1 | URL
좋겠다. 아 술병 나고 싶다 ㅋㅋㅋㅋㅋ원래 잘 안나는 편이긴 한데, 코로롱 이후로는 하이볼만 몇 잔 마셨네여.. 아쉽... 저는 혼자 가서 곱게 공연 보고 왔고요 밀린 잡일들을 휘리릭 처리하고 왔어요 ㅋㅋㅋㅋ 그건 나도 십대 때 배웠어야 했네...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11-20 13:16   좋아요 1 | URL
코로롱 꺼졋 ㅋㅋㅋ별 걸 다 부러워해요. 전 다시는 안 그러기로...(술병도 죽은 사람 만들기도 ㅋㅋㅋㅋ)

하나 2020-11-20 13:3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음주 문학의 정수 김영승 시 생각나네요. 저도 다시는 안 그러기로 오조오억번쯤 다짐했었는데 ㅋㅋㅋㅋㅋ

반성 16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드립백 부룬디 뭉카제 - 10g, 1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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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 전이나 출근하고 내 자리에서 드립 커피를 내리는 여유를 부린 때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먼 옛날이 되었다. 실속 없이 바빠져서 믹스커피도 겨우 먹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고도 퇴근 뒤에는 뭐라도 끄적여보겠다고 카페 가서 뭘 한 잔 씩 마시고 오니까... 엄마가 드리퍼와 드립포트를 찬장 안쪽 구석에 치워 놓으셨다. ㅋㅋㅋ 어제 백만년 만에 아직 남아있는 우에우에테낭고 디카페인을 내려먹었다. 안녕 티타늄 도금이 멋진 깔때기야. 스테인리스라면서 금세 녹이 난 주전자야. 잘 있었니. 조상님들 평안한 땅에서 안녕하시죠. 
 사실은 말입니다...캡슐 머신을 사 버렸다 말입니다...기계 한 대 값이면 원두 일 년치 사 먹는다 안 산다 해놓고선 결국 구름 같은 우유거품 몽글몽글 내주는 기계까지 원두 이 년 치 값 주고 사 버렸다. 거기다 신입 환영을 빙자한 대량 판매 찬스(구매 혜택? 아니죠...)로 캡슐까지 150개 샀다. 커피머신과 함께 닌텐도 스위치와 동물의 숲도 샀다. 추위는 사람 마음을 허하게 하고 옆 사람 통장은 심하게 마이너스 상태인데 그럴 수록 에이 이미 빚쟁이인데 조금 더 써도 티도 안 나 하면서 뭔가 마구 지르는 병약한 날들이다. 
 그러니 전자책 사고 났는데 왜 적립금 또 줘...이달은 뭐를 살까 누가 낙서 해 놓은 옛 중역판 종의기원을 새 번역판으로 갈아 봐? 하다가 더 먼 기원을 찾으며 이건 애들도 같이 볼 수 있어! 하고 세상을 이루는 모든 원소 118, 이라는 주기율표 도감?백과를 장바구니에 담고 스티커북도 담고 아니 300원 만 더 지르면 3만원 이상 천원 할인 쿠폰을 쓸 수 있잖아, 알라딘에 300원짜리가 어딨어...하다가 신작 커피 맛은 봐야지? 하는 데 생각이 닿아 드립백 한 봉지를 주문했다. 사고 보니 아니 5개 묶음팩 샀으면 커피 쿠폰 쓰는 건데...하면서 소비의 망령이 무한대로 확장....

  감귤, 호두까지는 모르겠는데 내려서 한모금 마시니 구운 밤은 끄덕여지는 맛이었다. 식은 뒤에 마시니 감귤도 따라왔다. 다들 늦가을에 만나는 열매들이다. 어려서는 귤이 그렇게 좋아서 제주 갔다 사온 귤을 나 혼자 한 박스 다 먹곤 했는데 요즘엔 그 나이 된 큰꼬맹이가 귤대장이다. 하루에도 몇 번 씩 귤 먹어도 되요? 하고는 제거랑 동생 거 까지 귤껍질 표면을 꼼꼼 씻어 까 먹는다. 세 살 꼬맹이도 귤 까는 재미에 잘 먹다가 요즘엔 터뜨리는 용도로 변경되어 시름... 저만할 때 나는 나름 시골 출신이라 (내가 어려서 살던 동네는 내가 열두 살 까지 군이었다...) 뒷산에 가서 친구들과 밤 한 봉지 씩 주워오곤 했다. 낙엽 사이에서 반짝이는 밤알을 발견하는 일은 보물찾기 마냥 신이 났다. 뾰족한 밤송이까지 신발 신은 발로 챡 벌려 밤알을 꺼내는 게 재미있었는데. 대도시에서 태어난 내 꼬맹이 둘 중 하나는 어려서 산 동네 살아서 도토리만 열심히 주워봤고 또 하나는 어린이집에 등록은 해 놓고 일 년 내내 한 번도 못 가보고 집콕이라 도토리도 못 주워봤다. 에미는 밤맛나는 커피나 홀짝이며 책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엄마는 나보다 책이 더 좋아? 하고 원망하던 큰꼬맹이가 곧 포기하고 스위치를 켜고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 가서 도토리를 줍는다. 나는 여러모로 배신자다. 무난하고 향 좋고 목넘김 좋은 밤향 커피를 뒤로하고 이따가는 뭔 색깔 캡슐을 내려볼까 하고 벌써 궁리중이잖아... 돈을 벌러 나가면 드립 내릴 시간이 없다. 깔때기에서 떨어지는 커피 방울이나 보며 허송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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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17 02: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300원짜리가 어딨어?!!! ㅋㅋㅋ 빵터졌는데. 근데 밤맛 나는 커피라니......저 밤에 환장하는데 ㅠㅠ 도대체 밤맛 나는 커피는 무슨 맛일까? 먹고싶어지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11-17 06:30   좋아요 0 | URL
구운 밤향(기분 안 나쁜 약한 탄향)에 조금 고소한 정도이구요 (말린 밤 우린 맛?! ㅋㅋㅋ) 식으면 산미도 강해져서 감귤 붙였나 봐요. 바밤바나 밤라떼 같이 기름지고 단 맛있는 밤맛은 아니에요ㅋㅋ맛과향은 너무 주관적 영역이라 대체로 좋다고들 하시는데 탄맛 싫다고 200그램 사서 한 번 먹고 버렸다는 분 보고 놀랐어요(나한테 버려....)

반유행열반인 2020-11-17 06:32   좋아요 1 | URL
아!!그리고 예전에 300원 주고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라는 책을 샀던 것 같아요 무려 알라딘에서!!! 중고 땡처리가 있었는데 굳이 1500원짜리 드립백 산 건 역시 새 커피가 먹고 싶었나 봅니다 ㅎㅎ

하나 2020-11-20 0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카하시 겐이치로 왜 그렇게까지 땡처리 되고 있어...ㅋㅋㅋ 아니 무슨 커피 후기 이렇게 재밌게 써여. 동숲 요즘은 구할 수 있나봐요. 여름에 되게 갖고 싶을 때 프리미엄 심하게 붙어서 참았는데, 지금 따라 사면 다시는 알라딘 마을에서 저를 보실 수 없겠죠? ㅋㅋㅋㅋㅋㅋㅋ 엄마한테 배신당하면 동숲켜서 도토리 줍는 어린이라니 열반인님 사랑받고 계시네요. *_*

반유행열반인 2020-11-20 06:59   좋아요 1 | URL
저도 게임 시작하면 식음전폐할까 싶어 다른 가족들에게 양보만 하고 있어요 ㅋㅋ게임기나 타이틀 여기저기 팔긴 팔더라구요. 땡처리라 사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습니다 ㅋㅋㅋ일본야구는 커녕 한국야구도 잘 몰라서...그러면서 머니볼이니 이런 거 잘도 주워 모아둠 ㅋㅋ

하나 2020-11-20 11:2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식음전폐 ㅋㅋㅋ 저는 전적이 있어요 예전에 동생 초딩 때 바람의 나라 중독 하도 심해서 그게 뭐길래 그러나 싶어서 접속해봤다가 (촙)지존찍고 끔... 난 초딩도 아니고 대딩이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박박 우겼지만 동숲 사면 뇌를 그 섬에 업로드 할 인간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