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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부룬디 뭉카제 - 10g, 1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1월
평점 :
품절
출근 전이나 출근하고 내 자리에서 드립 커피를 내리는 여유를 부린 때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먼 옛날이 되었다. 실속 없이 바빠져서 믹스커피도 겨우 먹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고도 퇴근 뒤에는 뭐라도 끄적여보겠다고 카페 가서 뭘 한 잔 씩 마시고 오니까... 엄마가 드리퍼와 드립포트를 찬장 안쪽 구석에 치워 놓으셨다. ㅋㅋㅋ 어제 백만년 만에 아직 남아있는 우에우에테낭고 디카페인을 내려먹었다. 안녕 티타늄 도금이 멋진 깔때기야. 스테인리스라면서 금세 녹이 난 주전자야. 잘 있었니. 조상님들 평안한 땅에서 안녕하시죠.
사실은 말입니다...캡슐 머신을 사 버렸다 말입니다...기계 한 대 값이면 원두 일 년치 사 먹는다 안 산다 해놓고선 결국 구름 같은 우유거품 몽글몽글 내주는 기계까지 원두 이 년 치 값 주고 사 버렸다. 거기다 신입 환영을 빙자한 대량 판매 찬스(구매 혜택? 아니죠...)로 캡슐까지 150개 샀다. 커피머신과 함께 닌텐도 스위치와 동물의 숲도 샀다. 추위는 사람 마음을 허하게 하고 옆 사람 통장은 심하게 마이너스 상태인데 그럴 수록 에이 이미 빚쟁이인데 조금 더 써도 티도 안 나 하면서 뭔가 마구 지르는 병약한 날들이다.
그러니 전자책 사고 났는데 왜 적립금 또 줘...이달은 뭐를 살까 누가 낙서 해 놓은 옛 중역판 종의기원을 새 번역판으로 갈아 봐? 하다가 더 먼 기원을 찾으며 이건 애들도 같이 볼 수 있어! 하고 세상을 이루는 모든 원소 118, 이라는 주기율표 도감?백과를 장바구니에 담고 스티커북도 담고 아니 300원 만 더 지르면 3만원 이상 천원 할인 쿠폰을 쓸 수 있잖아, 알라딘에 300원짜리가 어딨어...하다가 신작 커피 맛은 봐야지? 하는 데 생각이 닿아 드립백 한 봉지를 주문했다. 사고 보니 아니 5개 묶음팩 샀으면 커피 쿠폰 쓰는 건데...하면서 소비의 망령이 무한대로 확장....
감귤, 호두까지는 모르겠는데 내려서 한모금 마시니 구운 밤은 끄덕여지는 맛이었다. 식은 뒤에 마시니 감귤도 따라왔다. 다들 늦가을에 만나는 열매들이다. 어려서는 귤이 그렇게 좋아서 제주 갔다 사온 귤을 나 혼자 한 박스 다 먹곤 했는데 요즘엔 그 나이 된 큰꼬맹이가 귤대장이다. 하루에도 몇 번 씩 귤 먹어도 되요? 하고는 제거랑 동생 거 까지 귤껍질 표면을 꼼꼼 씻어 까 먹는다. 세 살 꼬맹이도 귤 까는 재미에 잘 먹다가 요즘엔 터뜨리는 용도로 변경되어 시름... 저만할 때 나는 나름 시골 출신이라 (내가 어려서 살던 동네는 내가 열두 살 까지 군이었다...) 뒷산에 가서 친구들과 밤 한 봉지 씩 주워오곤 했다. 낙엽 사이에서 반짝이는 밤알을 발견하는 일은 보물찾기 마냥 신이 났다. 뾰족한 밤송이까지 신발 신은 발로 챡 벌려 밤알을 꺼내는 게 재미있었는데. 대도시에서 태어난 내 꼬맹이 둘 중 하나는 어려서 산 동네 살아서 도토리만 열심히 주워봤고 또 하나는 어린이집에 등록은 해 놓고 일 년 내내 한 번도 못 가보고 집콕이라 도토리도 못 주워봤다. 에미는 밤맛나는 커피나 홀짝이며 책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엄마는 나보다 책이 더 좋아? 하고 원망하던 큰꼬맹이가 곧 포기하고 스위치를 켜고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 가서 도토리를 줍는다. 나는 여러모로 배신자다. 무난하고 향 좋고 목넘김 좋은 밤향 커피를 뒤로하고 이따가는 뭔 색깔 캡슐을 내려볼까 하고 벌써 궁리중이잖아... 돈을 벌러 나가면 드립 내릴 시간이 없다. 깔때기에서 떨어지는 커피 방울이나 보며 허송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