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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평점 :
-20201113 이주란.
딱 3년 전 이주란의 첫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를 읽었다. 이주란은 내 친구의 친구이다. 나는 이주란의 소설이 좋다고 친구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고 젊은작가상 수상식 영상으로 그의 얼굴도 알게 되었지만 이주란은 내 존재 자체를 모를 것이다. 첫 소설집은 뭔가 범상치 않은 한과 체념과 서러움이 마구 폭발했는데, 그래서 김애란보다 이주란이 최고라고 혼자 되도 않는 찬사를 보냈었다.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너는 쉽게 말했지만’을 읽었을 때는 뭐랄까, 괜시리 미안해지고 덩달아 슬퍼졌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무슨 서러운 일과 슬픈 일을 더 겪었을까, 소설 속에 자주 나오는 ‘그 일’이란 어떤 힘든 상황이었을까 궁금해질 만큼, 책 속의 인물들은 희망 같은 건 갖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 안 하고 소설만 쓰고 싶다, 했다가 소설 쓰기 싫다, 했다가. 그런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조금 알겠다가, 나는 내가 가진 게 너무 많아서 부끄러웠다.
지지부진이라는 말을 삶 앞에 붙이기에는 껄끄럽지만, 때로는 삶이 그런 때가 온다. 그러면 그만 살고 싶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순간은 정말 지지부진하게 지나가서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다 누워서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너무 많은 것들을 지고 날뛰게 만든다. 그게 좋은 글이나 노래나 그림이 되면 행운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병이 된다. 아, 누구든 병을 앓지 말고 병이 될 것들이 글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내가 읽을게 내가.
그렇게 살지 말라는 말이 꽤나 데미지가 컸는지 이 소설 저 소설에 자주 나온다. 누가 누구한테 이렇게 살라 말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살면 되고 안 되고는 누가 정하나.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는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지 정작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은 몰라서 누군가는 늘 아파야 한다. 조금 더 용기를 낸다면 그 앞에서나 집에서 혼자 울지 않고 너나 잘해 씨발, 할 텐데.
어린 시절 어느 마을에서 자라는 동안 겪은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식으로 쓰인 ‘H에게’라는 마지막 소설이 제일 잘 읽혔다. 촌락에 가까운 경기도 어드메에서 자라고, 작가는 나랑 나이도 같고, 내가 뱉은 건 아니지만 어디선가 떨어져 자란 수박 덩쿨이 있는 골목을 지날 때마다 얼마나 자랐나 지켜보다가 손톱 만한 열매가 노랗게 말라 죽어버리는 걸 본 적이 있어서, 동네에 우루루 몰려다니는 개들이 무섭고 아무데나 싸 놓은 개똥이 짜증난 적도 있어서, 부유한 친구 집에 가서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서, 하여간에 궁상스러움이 너무 와닿았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너무 잘 살게 된 것 같아(나는 마카롱을 아주 많이 먹어봤거든...) 또 괜히 미안해졌다.
+밑줄 긋기
-자신 없으면 자신 없다고 말하고 가끔 넘어지면서 살고 싶다. 무리해서 뭔가를 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긴장하는 것이 싫다.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89)
-여러 경우에 이렇게 생각하면 좀 편했다.
1. 출근을 할 때는 ‘나는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조지영은 실제로 소액이나마 기부를 하는 곳들이 있었고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했다.)
2.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할 때는 ‘나는 배우이고 작품을 찍으러 간다.’(조지영은 내향적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엔 이런 욕망도 있었다.)
3. 운동을 하기 싫은데 해야 할 때는 ‘나는 김연아다.’(이것도 연기의 일종이었다.)
4. 어떤 식으로든 이별을 하거나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죽었다.’(다른 설명이 필요 없음.)
5. 자기 자신이 싫을 때는…… 조지영은 자기 자신이 싫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래서 그냥 싫어했다. 누구든 자기 자신을 싫어할 순 있다. 하지만 그걸 타인에게 말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 165)
-Y는 제가 독후감을 써주는 대신 제게 돈을 주었습니다. 만원이었는데요, 당시 버스비가 백오십원인가 백칠십원인가 했던 기억이 납니다. Y는 상을 타고서 제게 부럽다고 말했고 저는 만원으로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신발주머니에 숨겨두었다가 어머니에게 빗자루와 파리채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슈퍼에서 도둑질을 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저는 실비아와 빼빼로를 샀었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머니에게 끝내 사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H에게, 253, 나도 실비아 알아!!!레몬맛 가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