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내 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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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7 마르그리트 뒤라스.

 

 맞지 않는 책을 아깝다고 읽지 말자…

 

(주로 욕으로 끝나니까 뒤라스 팬은 조용히 돌아가시거나 저한테 뒤라스 할머니 대신 욕을 날려주세요…)


  샀을 나름 인상 깊었다. 중고판매자는 모든 하나하나를 종이 재질 완충재로 감쌌고, 책마다 앙증한 북마크가 하나씩 꽂혀 있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제’ 김연수 에세이에서 보았던속담 인류학‘을 사려다가 이거저거 담고 뒤라스도 ... 맞던데 망설이다 그냥 담았다.


책 낱권마다 꼼꼼한 종이 포장재+종이 테이프


미공개 중고 책탑 (24년 10월 19일)…시험 전부터 나중 읽을 책 모으던 나새끼…


책마다 꽂힌 앙증한 책갈피는 덤. 인상 깊은 중고 판매자였다.


 작년 10월에 책을 펼친 ...얇아 보여서? 시나리오라고 들었는데 분량이 적어서 금방 읽겠지 싶어서… 망했죠… 오래도록 읽었다. 그리고 재미가 너무너무 없었다.

 오늘 저녁엔 프랑스에서 펼쳐진 무슨 갈라 어쩌구 공연 라이브 영상들을 보았다. 풀밴드에 오케스트라까지, 편곡도 그럴싸하고 관객도 많고 무대도 멋지게 꾸며놨는데, 출연진 많은 가수들이 한국 사람이라 신기했다. 나랑 동갑인 케이티페리는 살을 많이 뺐는데 성대폴립 수술이라도 받고 왔는지 특유의 음색이 사라지고 맑은 발성을 쓰며 여전히 쩌렁쩌렁한데도 ...내가 알던 소리가 아닌데...혼자 그러고 있었다. 내가 젊어 보고 듣던 가수, 연예인들이 늙거나 변한 모습을 쟤들이 정도면 얼마나 늙은 거냐...새삼 노화를 자각한다.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 가득한(배경이 자꾸만 프랑스야) 한국 작가 소설집을 적도 있고, 영화도 드라마도 파리 배경으로 하면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제목부터 파리 내세우는 많았던 같다. 파리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그렇게 파리 패리스 하는데, 프랑스인들은 그럼 어느 도시를 창작 배경으로 삼고 싶을까...싶은데 뒤라스는 히로시마를 택했다.

 ’ 개의 태양보다 밝은‘이나 영화오펜하이머‘에는 히로시마의 광경이 묘사되지는 않는다. 자기들이 연구하고 개발하는 무언가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건강과 터전을 순식간에 소멸시킬 제대로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어렴풋이는 알았을 같다. 그래서 그런가, 시나리오 프랑스 여자(부록에서 ’리바‘라고 부른다. 일본 남자 이름은 끝내 나온다. 여자가 히로시마…한다) 계속 알아요, 봤어요, 하면 일본 남자는 몰라, 봤어, 한다. 서사는 없다. 둘이 불꽃 튀어서 하룻밤을 보내고, 남자는 여자한테 반해서 계속 쫓아다니면서 만나고 싶다, 머물러라 하지만 여자는 파리로 돌아갈 거야, 하면서 첫사랑이던, 적군 독일인이던 죽은 남자를 떠올리고 그에 관해 일본 남자에게 말해준다. 사실을 들은 일본 남자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러고는 여자가 떠나는 장면은 나왔지만 파리 거라고 했으니 갔겠지.

 부록에선 여자가 느베르에서 사랑하던 독일군 병사의 죽음을 겪고, 독일인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붙잡혀 삭발을 당하고, 가족에 의해 지하실에 갇히고, 미쳐 날뛰고, 그러다가 머리가 다시 자라고 느베르를 떠나 파리로 가는 이야기가 자세하게 묘사되는데, 이건 다른 영화 같다. 실제 시나리오에선 이런 배경이 깔려 있을 잠시 잠깐 느베르가 비춰지긴 하는데 자세하게 시시콜콜 보여주지는 않는 같다. 반대로 남자의 서사는 그렇게 자세하게 짜여져 있지 않다. 그냥 어떤 캐릭터인지 글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내가 읽는다 소리 들은 친구가 책표지나 영화 포스터를 건지 우와, 남자 되게 서양 사람 같네, 했는데 뒤라스는 일부러 일본 사람 같지 않고 서구적인 남자 캐릭터를 지시했다. 동양의 신비, 그딴 걸로 사로잡힌게 아냐! 이러면서 세계시민주의 구는데… 그냥 괜찮고 잘생긴 남자라 좋아한 거야...하여간에 좋은 남자임 이러쿵저러쿵 괜찮게 자란 사람임… 그렇게만 그려놨다. 시나리오에서는 자신은 전쟁에 참여한 중이었고, 가족들은 히로시마에 있다 죽었다는 잠시 언급하는데. 전쟁 파병도, 가족의 핵공격 희생도 인생 뒤틀어버릴 사건이라 생각하는데 시나리오 안에도, 캐릭터 묘사에도 뒤라스는 그걸 하나도 고려 했다. 그냥 첫사랑이 죽었고 사랑했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게도 삭발 당했어… 그런 충격과 절망만 묘사한다. 철저히 프랑스 여자 관점이다. 프랑스 중심을 벗어날 것처럼 지시했지만 이거 뭐… 초점 인물은 어디나 있어야 이야기가 중심이 잡히겠지만 남자는 그냥 납짝했다. 여자한테 반해 따라 다니는 소품 같았다. 잘생긴 액세서리 같았다. 히로시마라는 도시 자체가 그냥 이런 참상에 관해 자세히 보여주지 않고도 그걸 사람들이 생각하게 만들고 싶어, 하면서 사실 자기 하고 싶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도 보고 영화에선 삭제된 부분까지 포함된 시나리오만 보고 너무 예단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시나리오만 봐도 영화도 더럽게 재미없을 것 같아…

 제목은 히로시마 사랑인데, 히로시마, 사랑이 아니었다. 일본 남자를 사랑한다고는 하는데 사실 사랑 하나도 모르겠고 히로시마에서 오래 사랑에 파묻혀 그걸 계속 곱씹고 그러면서도 계속 살아간 여자가 중심이었다. 대부분 이야기엔 주인공이 있고, 어떻게 이끌어갈지는 쓰는 마음이지만, 자기 이야기 안에서는 그래서 전능이겠지만, 마음이다, 하겠지만… 뒤라스 진짜 나랑 맞아. 이제 진짜 그만 봐도 된다. 삭이지도 못할 대작가한테 자꾸 얼쩡대다 퉤퉤 거리지 마라...ㅋㅋㅋㅋ마찬가지로 아니에르노도 집에 엄마가 둔게 보따리 있어도 더는 읽지 않는게 좋겠다. 둘이 비슷한 결은 아닌데도 묘하게 독서가 나한테는 재미없고 읽기 싫어서 꾸역꾸역 그래 뭐라 하나 끝까지 보자, 하고 참다가 아이시발, 하고 끝난다.

 

+밑줄 긋기

-그들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영화에서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서나 사람들은 만난다.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이런 만남들 이후에 이어지는 일이다. (9)

 

-비가 무서워지죠.

 태평양 바닷물에 비처럼 내리는 .

 태평양 바닷물이 생명을 앗아가요.

 태평양 어부들이 죽었어요.

 음식이 무서워져요.

  도시 전체의 음식을 내버려요.

  도시들이 전부 음식을 파묻어요.

  도시 전체가 분노해요.

  도시들이 전부 분노해요. (32-33)

 

-: 프랑스에서 당신에게 히로시마는 뭐였어요?

-그녀: 전쟁의 , 그러니까, 완전한 끝이요. 사람들이 그런 일을 감히 하려 들었다는 게…...경악스럽고…... 일을 정말 해냈다는 경악스러웠어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없는 공포의 시작이기도 했죠. 그리고 무관심, 무관심에 대한 공포이기도….... (55)

 

-그는 아주 단호하게 자기 의견을 말한다.

 : 그렇군요, 마침내. 여기 히로시마에서는 평화에 대한 영화를 우습게 여기지 않지요. (76, 서래씨, 아니 찬욱씨, 마침내. 혹시 영화가 출처인가요? ㅎㅎㅎ아님 말어...)

 

-그녀: 하루가 지나고 밤이 새도록 나는 그의 시신 곁에 있었어요. 다음 아침 사람들이 와서 시신을 거둬 트럭에 실었어요. 그날 느베르가 해방됐어요. 생테티엔 대성당의 종이 울리고…... 울리고….... 래에서 그는 점점 차갑게 식어 갔어요. ! 죽는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언제냐고? 정확히 몰라요. 나는 사람 위에 엎드려서…...그래요….... 사람이 죽은 순간은 정말로 기억에서 달아나 버렸는데, 왜냐하면…...왜냐하면 바로 순간에도, 그리고 그다음에도, 맞아, 그다음에도, 나는 죽은 사람 몸과 몸이 조금도 다르게 느껴지지가 않았으니까….... 몸과 사이에는 같은 점만…...명백하게 같은 점만 있었다고요, 알겠어요? 내 첫사랑이었다고…....( 소리로 외침). (117)

 

-그녀: ! 때로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정말 얼마나 좋은지.

  사람은 아주 천천히 서로 떨어진다.

 : 맞아요.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대면서.) (123)

 

-그녀: 세상이 우리 앞에 내놓는 이런 난관들을 가끔 생각하지 말아야 해요. 그러지 않고는 완전히 숨이 막혀 버릴 거예요.

(마지막 문장을 말할 바람’이 불게 한다.) (126)

 

-그녀:[나는 이제 조국이 없었으면 좋겠어. 아이들에게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가진 악의와, 무관심과, 영악함과, 애국심이 어떤 건지 가르칠 거야.] (134)

 

-그녀: 당신을 만나요.

 당신을 기억해요.

  도시는 사랑에 맞게 만들어져 있네요.

 당신은 몸하고 맞게 만들어져 있네요.

 당신은 누군가요?

 당신은 나를 죽여요.

 나는 굶주리고 있었어요. 배신과, 불륜과, 거짓말, 그리고 죽음에.

 오래전부터.

 어느 앞에 당신이 불쑥 나타나리라 짐작하고 있었어요.

 한도 끝도 없는 조바심 속에서 조용히 당신을 기다렸지요.

 나를 삼켜 버려요. 당신 모습대로 나를 바꿔 버려요. 당신 이후 어떤 남자도 그렇게 엄청난 욕망이 내게 휘몰아치는지 알지 못하게.

  사랑, 우리 둘만 남을 거예요.

 밤은 끝나지 않을 거예요.

 아무에게도 이제 날이 밝아 오지 않을 거예요.

 절대. 다시는 절대. 마침내.

 당신은 나를 죽여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좋아요.

 우리는 지나간 옛날을 마음을 다해 애통해할 거예요.

 지나간 옛날을 애통해하는 외에 우리는 이상 아무 것도 일이 없을 거예요.

 시간이 흘러갈 거예요. 오직 시간만이.

 그리고 시간이 오겠지요.

 시간이 거예요. 우리를 이어주는 것이 무언지 우리가 이상 이름을 없게 되는 시간이. 이름은 우리 기억에서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거예요.

 그런 다음 완전히 사라지겠지요. (135-136)

 

-거기에서 사랑은 용서받지 못한다. 느베르에서 사랑은 죄가 된다. 느베르에서 행복은 죄악이다. 권태는 허용되는 덕목이다. (156, 부록한밤의 명백한 일들‘ )

 

-도시에 있는 남자들은 모두 독일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전쟁은 끝이 없었다. 젊음도 끝이 없었다. 나는 전쟁에서도, 젊음에서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여러 종류의 윤리 도덕들이 이미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175, 부록느베르’ )

 

-그녀가-히로시마에서- 일본 남자에게 내어 주는 , 그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진 가장 귀한 , 현재 시점의 그녀 표현을 따르자면, 느베르에서 자신의 사랑이 죽고도 살아남았음이다. (186, 부록프랑스 여자의 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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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없는데이터 2025-02-08 01: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는 내내 뒤라스가 얼마나 철저히 프랑스 중심적인 시선을 유지하는지 다시금 실감했어요. ‘히로시마‘라는 거대한 상징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정작 히로시마 자체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흥미롭네요. 일본 남자의 존재도 결국 프랑스 여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할 뿐, 하나의 인물로서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는 느낌이고요. 뒤라스와는 정말 끝까지 안 맞으셨군요. ㅎㅎ 하지만 덕분에 이 작품을 직접 읽지 않아도 그 답답함이 생생하게 전해졌어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2-08 01:17   좋아요 2 | URL
후진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그런데 이 작품(시나리오 영화 모두) 이 작가 아끼는 분들 많은 거 보면 저라는 거울, 렌즈, 신뢰할 만하지 않아요. 뒤라스는 F!!!! 했는데 전 TTTTTTTTTTTT!!!!! 이러고 갬성에 공감을 못했으니...(그런데도 INFJ라 하면 아무도 안 믿음 너 티발 씨야? 이럼...) 책취향이란 참 다양하고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안 좋아하는 작가들은 노벨상도 잘 받아요. 그러니 대작가가 되고 싶으면 내가 싫어할 글을 쓰자!!! (죄송합니다...제가 뭐라고 ㅋㅋㅋ)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9 07:59   좋아요 1 | URL
이 댓글을 읽으면서 내내 웃었어요. 😂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겸손하게 자신의 취향을 객관적으로 조망하려는 태도가 느껴지네요. 그리고 님의 지적 겸손(intellectual humility)이 글뿐만 아니라 댓글에서도 잘 드러나는 게 인상적이에요! 😂😂 문장이 너무 재밌고, 책을 읽지 않아도 덕분에 읽은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전달될 정도로 필력이 좋습니다. 계속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2-09 09:09   좋아요 0 | URL
아니 근데 데이터님 댓글이나 글 다실 때 늘 챗지피티 퇴고 돌리고 올리시는 거 아니죠? ㅋㅋㅋ말이 글이 구질구질 저랑 달리 너무 정갈하셔서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 꾸준히 글 잘 올리시는 분들을 몇 년째 oo님 알라딘이 개발한 AI설 이러고 다니네요…)
부족해서 부족하다 다른 분들께도 늘 말씀드리는데 그런 부분도 장점처럼 금가루 뿌려주시니 그저 감사하고 데이터님의 아량과 너그러움 느껴집니다. 착한 AI 인정!!! ㅋㅋㅋ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9 09:24   좋아요 1 | URL
아니 어떻게 알았죠?! 사실 저는 글 올리기 전에 제 안의 챗지피티한테 한 번 퇴고를 맡기는 편입니다. (네, 저도 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깔끔한 글을 쓰고 있긴 하죠…😂) 반유행열반인 님의 착한 AI 인정받아서 영광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인간입니다, 아마도…?) 앞으로 AI라고 불러주세요. 너무 나갔나요?😆😆

유부만두 2025-02-09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뒤라스의 동양이 그런 느낌이라 블편해요. 다른 소설들에서도. 실은 저도 욕을 함께…

반유행열반인 2025-02-09 09:11   좋아요 0 | URL
지아딘인가 동남아시아 출신이라는데 사는 내내 겪었어도 막 아파르트헤이트 마냥 다른 아시아를 살았나 봐요. 나 아시아 신비롭게 안 봐 그냥 거기 남자들 중에 멋진 애들도 있단 뜻이야-하면서 사실 자기가 가진 다른 장소에 대한 프레임 엄청 드러냄 ㅋㅋㅋㅋ이탈리아 휴가가는 소설이 처음 읽은 건데 거기서도 뭔가 장소에 의미 부여 많이 해서 신기했어요. 내가 워낙 방구석 처돌이라 여기저기 다닌 이야기에 공감을 못한 것인가…
 

5단 회전 책장을 샀는데 책상에 올려 놓다보니 세 칸만 쓰게 되었다. 부품이 일부 남았고, 문득 2단 짜리 하나 더 사면 남은 걸로 4단이 쌉가능이구만… 참아, 질러, 참아, 질러, 참…

…지 못했다.


5단+2단을 사서 3단+4단 만든 셈인데, 판매 가격 보면 처음부터 3+4를 사는 게 더 합리적이었다. ㅋㅋㅋ 다만 인기가 좋은지 2단 말고는 재고 다 털어서 이달 중순이나 입고된다고… 


 작은어린이에게 서점 놀이를 하자 했다. 거실에 있는 책이나 시리즈 중 마음에 드는 걸 고르면 주문하신 책을 님 책상 바로 옆까지 배달, 진열해 드리겠습니다- 했더니 신나서 주로 만화책으로다 3, 4층을 꽉꽉 채웠다. 1,2층은 막 꾸부리고 불편하니까 엄마 책 놓을게- 찡긋?



 안 읽은 책들 위주로 앞쪽에 도열?하고 필립 로스 재고분(?)도 한 코너 가득하니 왠지 기분 좋고 ㅋㅋㅋ

 복직 준비의 심란함과 스트레스, 불확실성, 불안과 울화가 증폭되어 옷장 정리도 하고, 구슬도 꿰고, 책상, 책장 조립도 하고, 책장 정리도 하고 별짓을 다 한다. 얘도 그래서 135cm짜리가 덩그러니 안방 한 켠에 기둥처럼 우뚝 섰다. 하나 아니고 두 개구만… 눈대중으로 헤아리니 6단까지도 쌉 가능이네…(정신 차릴래?) 회전이 되니까 뒤에 가려진 책장 책들도 그리 어렵지 않게 뽑을 수 있다. 좋다. 좋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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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2-07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모든 것이 복직 싫어!!!! 의 외침이었군요…🤣

반유행열반인 2025-02-07 18:42   좋아요 0 | URL
싫어! 싫어! (주섬주섬 구슬을 꿰고 책장을 조립하고 책을 넣다 뺐다 반복한다...)
 

아직 대온실 수리 보고서도 못 읽었는데 김금희 소설가가 남극에서 지내다 왔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궁금했다. 칼로리 없는 곤약밥 같은 디카페인 콜드브루도 사고. 우주점에서 눈독들였던 양안다 시인 산문집과 펄프헤드도 한 군데에서 겟.
팔찌도 또 많이 많이 만들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원치 않으면서 돌아가는 길은 또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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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5-02-05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왕 책장 이렇게 조금씩 보여주시면 좋더라고요. 에브리맨 제목만 봐도 어질하네요 펄프헤드 재밌었는데 다 못보고 반납(왜 재밌다고 하니?)ㅋㅋ 읽는 게 없다.. 비즈 주문제작 바쁘신 와중에 페이퍼 굿굿

반유행열반인 2025-02-06 00:18   좋아요 0 | URL
에브리맨 시계방 필립 로스 치곤 슴슴한 걸요 ㅎㅎ 유수님이 재밌다니 기대된다!!! 구슬 그만 할래요...시각 장애 거지 될 듯....

공쟝쟝 2025-02-06 0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희작가님 ㅋㅋㅋ 박정민이랑 콜라보하는 소식도 있다구요!!
저거 저거 박. 상. 륭 (영 아님)

반유행열반인 2025-02-06 20:37   좋아요 1 | URL
박상륭 한 권은 1가 1셋 갖춰야 책 좀 본다 할 수 있는 거 아입니꺼
금희언니 요즘 덜 사랑했는데 남극 갔다니 뭔가 짠해지기도 부럽기도 (남극 아무나 못 가니까)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채석장 시리즈
주디스 버틀러.프레데리크 보름스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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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3 주디스 버틀러, 프레데리크 보름스

 

 

 주디스 버틀러의 사상에 관해 빼놓지 않고 대략적으로 소개하는 젠더, 퀴어, 페미니즘 책들을 보면서 그의 사상을 맛이라도 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마침 전자도서관에권력의 정신적 삶’이 있어 빌렸지만, 번째로 빌렸지만 모두 서문에서 으아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되겠다 안녕...하고 보내줬다. 그러다가 책에 별로 미련 없어진( 이게 열반 아닌가) 친구가 가질 가져, 하고 구판 젠더트러블을 줘서 다시 주디스 버틀러 선생을 영접...하기는 겁이 나던 차에 태양계 실제 비율 마스킹 테이프를 준다고 해서, 다른 굿즈 최소 금액 채워야 되서, 그런데 보니까 책이 얇고 비싸서 어쩌다 보니 들이게 되었다. , 그래도 이건 다른 저작들보다는 대담이라 어렵다는 소리도 있어… 힘을 내…

 


 얇지만 괜히 내적 묵직함 때문에 서문 들어가면서 , 주요개념을 먼저 정리하고 숙지하고 가면 좋겠군! 하면서 그지 손글씨로 딴에는 또박또박 정리를 했다. 서문만도 일곱 바닥이 나와서 뭐여 이새끼야 이게 요약이냐 필사냐...했는데 2018 4월과 2022 4월의 대담 내용을 이어서 보니 이건 그냥 스포일러였다. 그러고서 이해 못했을 독자를 위해 역자 선생님이 해제로 뒤에다 요약해주신다. 선생님의 대화도 아주 차근차근 서로 가지고 있던 사상적 바탕과 개념부터, 이거가 너가 말하는게 맞지? 거기는 나도 동의해,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도 동의해, 이러면서 차이와 공통점을 섬세하게 짚어가고 예시도 자세히 들고 그래서 생각보다 읽기 아주 어렵진 않았다. 사실 사람이 하고 싶은 멍청이더러 후려치라면모두의 만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연대, 구조, 조건 보장을 위해 투쟁!!!!!!’ 이렇게 수도 있지만 서로의 주장에 대한 동의를 바탕으로 결론에 도달하는 똑똑이 선생님들의 대화를 직접 읽는 것도 흥미로웠다. 원래 인터뷰집이나 희곡이나 대담집 누구누구의 같은 읽던 나새끼도 이제 주디스 버틀러 선생님이랑( 근데 처음이지만 말하는 보기만 해도 똑똑미 넘침) 프레데리크 보름스 선생님( 선생님은 엄청 꼼꼼 섬세 정확 차분하게 개념과 주장들을 확인하고 짚고 넘어가심. 돌봄 강조하는 보니 괜히 따뜻한 보름달 같은 느낌의 선생님ㅋㅋㅋㅋ) 어떤 개념들을 강조하는지 쥐톨만큼 맛은 보게 되었다.

 

 겨우 148 짜리 책인데 이거 옮겨 놓은 보면 1/10 베껴 같아서...원래 제가 필사란 하는데 자신 없을 왠지 멋있어 보이는 말은 놔요...나중에 다시 보면 그땐 알까 하고...그러고선 8할은 다시 안 보지만… 그래도 동굴에 처박힌 나놈한테 따콤한 꼴밤 연타로 때려주셨는데 그게 엄청 아프진 않고 시원한 같고 그런데도 당장 행동이고 연대고 하고 가까운 사람들이랑이나 지냈으면, 당장 복직할 직장에나 적응 잘했으면… 나아지게 하겠다고 싸우고 깝치고 다니지 말았으면...하는 비굴함에 서글퍼지기도 하는 독서였다.

 

+서문 요약(하기만 했지알아볼 수 있다곤 안 했다…)



+밑줄 긋기

-보름스: (…) 하지 않은 삶은 우리 몸이나 삶의 생명의 조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종의 중단을 겪는 것입니다.솔직히 말해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자아의 파괴를 수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할 있다면 그것은 죽음보다덜한less"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worse것인데, 왜냐하면 삶이 계속 되는 데도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거나 누군가가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분명 죽음과 유사한 것이기도 하고 죽음보다 나쁜 것이기도 한데, 삶을 사는누군가“가 없는 상태로삶“이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만하지 않다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생명의 중단과 같고, 우리의 생기적 조건의 중단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도의 구분이 아니라 종류의 구분이어야 하며,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이고 비판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39)

 

-보름스: (…)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아도르노와 리오타르에 따라 ”죽음보다 더한 것“이라고 부른 것으로 나아갑니다. 만하지 않을 아니라 죽음보다 나쁜, 죽음과 유사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만하지 않은 삶은 죽음보다 나쁜데, 이런 삶은 지속된다고 해도 사람이 삶을 자신의 삶으로 없고, 오직 생중사로만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극적인 임종 선택과 정치적인 문제들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죽음과 죽음보다 더한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딜레마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기술할 수가 없고,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경험을 기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경험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만하지 않은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들의 만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정의상 그런 삶에 대해 말할 없는 사람들의 삶을 기술할 의무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음보다 나쁜 것이 있다면, 삶보다 나은 것도 있고, 만한 삶보다 좋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만한 삶이 어떤 궁극적인 규범은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히 만한 삶만 살고 싶어 하는 아니라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만한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동할 능력이나 죽지 않을 능력 이상의 , 누군가의 삶에서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주체가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45-46)

 

-버틀러: (...질문들) 만한 삶과 만하지 않은 삶을 구분하는 문제에 있어 가지 질문, 쉬운 질문은 이런 것이겠죠. ”어떻게 있는가? 만한 삶과 만하지 않은 삶의 차이를 어떻게 있는가“ 하지만 저는 문제를 다음과 같은 질문 더미로 재구성해보고 싶습니다. 이런 구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만한 삶과 만하지 않은 삶을 구분할 , 구분을 위해서 사용되는 판단은 어떤 것인가? 누가 구분을 하고, 누구와 관련하여 구분을 하는 것인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런 판단을 계속하는, 다시 말해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는 상황이나 장면 어떤 것인가? (48)

 

-버틀러: (오시비엥침 수용소 생존 작가 샤를로트 델보)델보는 살아 있었고 글을 쓰고 있었어요. (…) 그가 망가지지 않았나요? 사람들이 망가질 만한 조건이 아니었나요? 설령 망가졌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갑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만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 전혀 그렇지 않지요. 그러니 망가진 사람이 과거의 트라우마를 서술할 있고, 서술 자체가 이렇게 망가진 것을 복원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라면, 망가진 사람이 그런 망가진 관점에서 서술한다면, 우리는 만하지 않은 역시 여러분과 함께, 동시에 살아가는 조건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살아가기는 자아의 생존과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가고 있지만, 만하지 않은 삶은 그것이 언제 끝날지 없는 채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살거나 동행합니다. 삶이 끝나야만 만하지 않은 삶도 끝이 납니다. 여러분에게 남은 삶이 무엇이든 그것은 만하지 않음과 함께 살게 됩니다. 삶의 동반자로서, 혹은 삶을 구성하는 잔해로서, 어쩌면 삶과 떼어낼 없는 견디기 힘든 동행으로서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것이 반드시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하지 않은 삶과 더불어, 만하지 않은 속에, 만하지 않은 삶을 계속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52-53)

 

-버틀러: 회복탄력성이란 용어는 물론 특정한 종류의 인도주의 단체 인권 단체에서 고난을 극복할 자원을 찾고, 심지어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은 뒤에도 예전의 삶을 재개할 가능성, 영어로는되돌아갈bouncing back"가능성을 말하고자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파괴와 궁핍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어휘에 속합니다. 용어는 사람들이 결코 완전히 망가지는 일은 없다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삶이 망가지거나 파열되는 같은 것은 없다고, 그리고 누군가가 망가지거나 어떤 삶이 파열된다 해도 아마 사람에게 내재하는, 다시 일어나 삶을 긍정하고 재개할 능력에는 결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회복탄력성 담론이 어떤 생명력의 해석에 근거를 두건, 그것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보장으로, 낙관주의에 재빨리 의지하는 것으로, 어쩌면 일종의 부인denial 거짓말로 작동합니다. 우리는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비정부기구에 주어지는 공공 정책의 지침에 등장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용어가 인간이라는 개념을 유연하고 구부러지며 끊임없이 부활 가능한 존재로 선동하는지 있습니다. 어떤 파손이나 상실은 돌이킬 없어서, 삶에 대한 감각을 파괴하면서 평생 그들과 함께 가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때일수록 말입니다. 그들이 삶을 계속 살아간다 해도, 만하지 않은 삶과 더불어 계속 산다는 것은 회복탄력성과 같다고 없습니다. 아니요, 전혀 다른 것이지요. 사실 제가 우려하는 것은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가 현실을 부정하고 트라우마를 억압하는 작용을 해서, 이상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분명한데도 너무 급히 회복의 가능성을 보고 회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요. 어쩌면 이것은 격론을 일으킬 만한 여담이겠죠. () 우리가 지금 살만하지 않은 경험을 주체, 그런 경험을 겪는 중에 혹은 겪은 후에 경험에 이름을 붙일 있는 주체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가정 말입니다. 주체가 경험에 이름을 붙일 언어를 박탈당했거나 경험을 명명할 언어를 찾느라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은, 경험이 살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징표일 있습니다. 그렇다고 반대의 경우가 사실인 것은 아니지요. 때로는 만하지 않은 삶을 표현할 언어가 있을 있는데, 그렇다고 경험이 만한 것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하지 않은 경험을 각각의 사람에게 경험이 똑같은 방식으로 기록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만하지 않은 경험을 타인과 공유할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 만하지 않은 경험을 함께 공유한다면(각자 다르게 공유한다고 해도), 덕분에 조금이라도 만한 것이 될까요?

(...소통 네트워크와 상호 의존 양식 생산 ) 이런 조건들을 함께 평가하거나 이해할 있게 된다면 만하지 않은 경험을 겪는 중이거나 겪어온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만들어지거나 혹은 만들어지기 시작할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가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체의 조건은, 프레데리크 선생님의 용어로 말하자면 주체성의 조건은, 또한 상호주체성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현상학적으로 상호주체성을 말할 그것은 모든 차이가 지워진 집단적 주체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공동의 상황을 함께 겪으면서 공동의 상황을 평가하고 이해하게 차별화된 네트워크 혹은 차별화된 집단을 가리킵니다. () 제가 보기에는 누군가와 공유된 만하지 않음이 있다면,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무엇이, 식량과 보호소와 이동성과 법률 상담에 대한 의존이, 그래서 인간의 사회성의 기능과 같은 만함에 관한 무엇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생각에 삶을 살만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의 측면들입니다. 만함을 보호하고 촉진하려는 규범에 따라 조직된다면 말이지요. (55-58)

 

-버틀러(주체 시작의 관점 대안): 우리는 사회성이라는, 경제와 정치라는 넓은 문제들을 다루는 모델로서 처음 유아기 자녀 양육의 심리적 장면에서부터 논의하기 시작하는 것일까요? 물론 유아는 형성됩니다. 선생님도 유아를 형성하는 생기적 관계들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유아의 형성을 도와주는 부모도 유아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언어와 사회 속에서 형성됩니다. 그러니 어디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까요? 주체의 형성에 대해 생각할 방법은 수없이 많고 출생도 그중 하나지만, 출생에 앞선 역사가 완전히 다르듯, 출생을 이끌어낸 장면도 완전히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 말은 주체의 삶의 시작이라는 이야기를 시작할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누가 여러분을 상상했나요? 누가 상상하지 못했나요?(75-76)

 

-보름스:(…) 오히려 반대로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사랑이 있고 사랑의 양극성이 있습니다. () 우리는 지뢰밭에서, 위험 지대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삶의 끝“ 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질병에 대해서나 난민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이 사실입니다. 확실히 저는 취약성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사실 취약성은 제가 비판하는 개념이지요. 하지만 취약성의 장면들은 인생의 과정에 걸쳐 나타나면서, 삶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는 위험한 장면입니다. 취약성의 장면은 가장 위험한 장면이며 우리가 다시 논의를 시작할 출발점이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76, 버틀러의 동의와 함께 2018 4 파리의 대담이 끝남. 이제 시작하는 같은데서 끊겨서 어리둥절. 다음부터는 팬더믹 이후 2022년의 후기-두번째 대담?-이어짐)

 

-보름스:(누군가 유발한 위태성에 관한 버틀러의 동의에 이어)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고통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고통의 상태에 대해 생각 중인 ”우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당장 프로이트를 화제로 꺼내셨는데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이런 사람들, 예컨대 난민들이나 수용소에 관한 증언이 기술하는 바와 우리를 동일시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상황과 우리를 차별화하려는 충동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알기로는 타인이 만하지 않은 상황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강력한 충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누군가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버틀러 동의)(…위태성 상황에 대한 반응의 양가적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질문)

 버틀러: , 하지만 선생님은 또한 만하지 않은 삶에 대한 무언가 때문에 우리가 상황을 외면하게 되고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보름스: 그리고 물론 이때 ”우리“나“는 누구인지도 심문해봐야 합니다.

 버틀러:(“우리” 범주에 포함되는 문제는 잠시 보류…) 만하지 않은 삶에 대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외면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우리도 그런 상황에 처할 있다고 상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요.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일은 고통을 크게 만들고요. (보름스 동의…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상황) 말은, 러시아 군의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새끼 : 대한민국도 계엄령이랑 군인들이 국회 쳐들어가는 장면을 회상/상상만 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생각에는 이것이 우크라이나가 유럽을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죠. 잠깐만, 저게 우리잖아. 이게 우리라고? 이런 일이 우리한테도 일어날 있는 거라고?(보름스 동의...) 선생님은 또한 외면하는 것이 상황을 확대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돌아서면, 그렇게 돌아선 자리에 그대로 있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죠? 외면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거부하지 않으면서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양가성 또한 상황을 확대하는 부분입니다. (85-89)

 

-보름스:(…) 다시 한번 “우리“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펜데믹을 끝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의 무언가가 끝나기를 원해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충동이든 죽음 충동이든 간에 이것은 복잡한 문제입니다.

 버틀러: , 삶을 향한 빠른 움직임인데, 그것이 부인에 기반한 것이라면 많은 죽음을 초래합니다.

 보름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아주 적절히 덧붙이셨는데요,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우리에게는 끝났다고 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취약한 사람들, 아직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선생님은 말하고 싶은 것이지요. () 기후 문제와 펜데믹 경우 모두, 우리는 이것을 겪었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거나, 그게 아니라 일부 사람들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공통된 취약성common vulnerability이라는 생각입니다. 공통된 취약성이란 펜더믹이고 기후 문제이며 심지어 우크라이나 전쟁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지구상 어디에서도 취약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참을 없음이지요.

 버틀러: , 맞아요. 취약성을 극복한다는 환상은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환상이 참을 없는 상황과의 대면을 막고 있기도 합니다만 여전히 그런 현실을 입증하는 것이죠.

 보름스: 동시에 정치적으로 있는 유일한 해답은 이러한 공통된 취약성이 ”우리“그들“을 생각할 새로운 방식을 만들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생기적으로 말해서 팬데믹을 끝내고 싶은 욕망이 합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끝내려는 욕망을 결국 죽음을 의미하는, 일종의 평온을 향한 수동적 충동에서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보다도 펜데믹을 끝내고 싶은 욕망이 부정적 요건() 맞서 싸우려는 욕망이라면, 특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취약하며, 우리는 보호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깨뜨리게 것입니다. (93-95, 외면하지 말고 불의와 맞서 싸워라! 라고 하는 선생들...)

 

-버틀러: (…)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이런 자기보호는 특정한 집단이 해주는 것인데요. 집단은 전반적 상황에 맞서서 혹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맞서서 자신들을 보존하고자 하는 특정한 집단입니다. 그리고 집단은 스스로를 일반화된 “우리” 분리함으로써 세계의 일부가 버려지고 거기서 유독성이 생겨날 있으며 펜데믹이 발생할 있는 상황을 실제로 확대하고 강화합니다. 자신의생존”을 위해 불평등의 심화에 의지하는 것이죠. 그러니 이것은 삶의 충동일까요, 아니면 죽음 충동일까요? 바로 선생님이 설명하신 양가성, -죽음의 충동성이 작동하는 순간입니다. ()“우리” 그런 장소(백신 미보급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눈을 돌리고, 자신을 보존하려는 집단적인 “우리”주변에, 문자 그대로의 장벽 혹은 은유적인 장벽을 쌓아서 우리 자신을 보존합니다. 우리는 파괴의 확대에 일조하거나 방조하지 않으면서 이런 파괴로부터 거리를 없습니다. 그것은 파괴와 상실을 수반하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을 심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것은 독성화와 파괴가 여기에서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는 발생해도 괜찮다고 허용하는 죽음정치의 논리necropolitical logic(나새끼 : 내가 애들이 하는 싫어하는 - 바임? 알바노) 것입니다. “거기” “여기” 부인과 유기가 일어나는 가운데 안정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 누구라도 그러한 근본적 불평등이 확정 또는 편향되어 재생산되는 세계의 모습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보존하려 하고, 그렇게 보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이들이 외면하는 타인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타인에게 의존하며, 이들 혹은 우리는 그런 타인과 관련을 맺는데, 타인들은 말하자면 파괴가 바로 눈앞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눈길을 돌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논리에 따르면 자기 보존은 파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해석하면 이렇게 되죠. “나는 나를 보존하기 위해 파괴할 것이다. 전쟁에 나가지 않을지라도, 나는 편파적이고 특권적이고 보호받는 집단을 보존하기 위해 파괴를 지속할 것이다.”

(98-100)

 

-버틀러: 그런데 우리는 진보를 이루고 있는 중일까요? 그리고 진보는 여전히 목표일까요, 아니면 문제가 되는 부분일까요?

 보름스: 서양 철학에 나타난 역사 재현에서 있듯이 우리는 진보의 감각에 익숙합니다. 아직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며, 계속해서 취약한 사람들을 돕는 쪽으로 나아갈 테지요. 동시에 우리는 불의가 점점 커져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불의의 상황을 비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기본적인 글로벌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또한 어떤 면에서 여전히 진보의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글로벌 상황-고통과 박탈이라는 상황- 여전히 우리의 상황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02)

 

-버틀러:(…) 국경은 사실 글로벌 수준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생산함으로써 문제를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글로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글로벌 운동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 운동의 기본 규정은 어떤 것인가? 지구상의 모든 인간 생명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누구든지 그것을 얻게 있을까?’ (105)

 

-보름스:(…) 글로벌 의료 서비스는 인간의 삶의 모든 차원에 걸쳐 철저히 글로벌해야 합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음식과 등의 것들이 필요하지만 나아가 성생활, 지적인 생활, 도덕적 생활, 정치적 생활도 영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최소한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요. (108-109)

 

-보름스:(…)우리는죽음보다 나쁜”상황이나 속의 죽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상황에 직면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요점은 이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시점에 이르러 죽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국가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지구적인 것의 지역적 실행이라고 기술한 것에다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는데-선생님의 수많은 연구 작업으로 돌아가는 듯하지만-국가의 국경선은 외부에만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내부에 있습니다. (버틀러 동의)

 취약성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고 싶을 , 인구 집단 안에 하나 혹은 여러 경계선을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쪽과 저쪽을 분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지구적으로 공유되는 조건은 지역적입니다. 취약성에 있어서의 여러 차이는 국가 안에, 도시 안에도 있고, 심지어는 우리 이웃이 사는 동네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

-버틀러: 돌보지 못한 것은 돌봄의 조건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서입니다. 누구도 돌봄의 조건을 마련하는 충분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117-119)

 

-버틀러: (…) 그리고이건 나의 삶”이라는 말은 따라서 다른 사람의 삶과 분리된 삶이죠.

 보름스: “나의 삶”이라는 거죠. 그러니 “내가 원한다면 죽게 내버려둬.”

 버틀러:“내가 원한다면 죽게 내버려둬”라고요. 하지만 보통 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 또한 죽게 내버려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생각에 개인의 자유라는 발상에는 일종의 죽음 충동이 작용하고 있었던 같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죽음 충동은 대개 도망자처럼 행동합니다. 죽음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다른 것에 붙어서, 심지어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122-123, 자유를 죽음 충동, 도망자, ‘삶의 이름으로 가하는 위해’ 연결 짓는 것에 놀람. 워우. 뒤에선 미국식 총기 소지 자유 비판하듯 부연함.)

 

-보름스: 상실과 슬픔도요...슬픔은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비판적 생기론의 경험입니다. 지금 슬퍼하고 있다면 당신은 죽은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가 죽은 것이지요.

 버틀러: 맞아요. 슬픔은 살아 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보름스: 그리고 사람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물론 애도의 슬픔은 탄생의 반대편에, 새로운 생명을 환대하는 것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탄생 또한 생명이 다른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탄생은 슬픔과 반대편에 있을 있고 반대편에 있어야 하며, 일종의 환대일 있고 환대여야 합니다. (129)

 

-보름스:“이건 나의 삶” 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삶이라는 필요할 사용할 수도 있고 처분할 있는 재화, 어떤 객관적인 재화인 여기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죠? 당신의 삶을 내게 보여주세요! (버틀러 동의) () 나는 삶을 가지고 뭔가를 하고 싶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그건 어디에 있죠? 삶을 꾸미고, 삶을 만들라니, 그럴 수는 없어요! 삶은 이야기입니다… (…) 나는 삶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

 버틀러: (…) 그리고 어쩌면 선생님이 우리에게 함께 나아가자고 요청하고 있는 방향, 그리고 저도 동의하는 방향은 나의 , 너의 , 우리의 , 타인들의 삶에 대한 관계적인 이해이고, 나아가 파괴와 죽음의 가능성이 바로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살아 있는 삶을 정의하는 투쟁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삶은 결코 수도 없고, 수도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삶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나의 것이든, 우리의 것이든, 다른 누구의 것이든 죽음과 파괴를 한쪽으로 밀어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만함의 조건을 확립하기 위해 죽음의 힘에 반대해야 합니다. (보름스 동의)

(130-131, 여기에서 상호의존성, 상호주체성을 옹호,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주의를 우위에 두는 구나 싶었다.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나새끼는 읽는 내내 똑똑이들 둘한테 둘러 싸여 뚜드려 맞는 기분이었다. 이새끼 혼자만 사는 세상 아니거든? 뚜쉬뚜쉬 아야야...)

 

-돌봄은 단순히 생명 유지의 조건을 넘어 사회적 인정과 주체성의 형성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둘다 인정하게 되고 이제 돌봄은 삶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그에 따라 생명의 내재적 규범성과 상호주체적 관계성이라는 차이가 서로 보완되면서, 생명의 물리적인 복합 조건이 충족되어야 생명이 보장되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사회적 인정과 보호도 필수적이라는 새로운 이해가 열린다. (146-147, 선생님의 정반합을 깔끔하게 요약 정리해 버리는 번역자 선생님...친절하게도 서문에서 , 해제에서 내용 스포?ㅋㅋ요약? 해준다. 그래도 그거만 읽으면 재미없고 이해 되니까 분이 나누는 고품격의 논리적 대화 전개를 직접 보시라고 책이 나온 것인가…)


+책 읽기 지레 무서워 막 독서대 사진 찍고 딴짓하고… 주말 동안 천연석 팔찌만 몇 개를 만든 거야…이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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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25-02-05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필사까지 하며 읽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열반님 최고!!!!!!!!! 넘감사해요!! 저도 읽으려고요

반유행열반인 2025-02-06 00:05   좋아요 1 | URL
꺅 ㅋㅋㅋㅋㅋㅋㅋㅋ 엎드려 절받기 성공 ㅋㅋㅋㅋㅋㅋ감사합니다. 덕분에 훌륭한 대담을 읽었네요. 게을러서 몇 년 뒤에
보거나 못 볼 뻔 했는데 ㅎㅎ

2025-02-0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6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6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 실격.사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250131 다자이 오사무.

무뚝뚝한 아버지를 웃겨보겠다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던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먼저 봤고, ‘에구구구’하는 노래를 부르는 요조를 먼저 알았고, 이토준지가 만화화한 ‘인간 실격’을 먼저 보았다. 왜 이 소설을 여태 미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다자이 오사무보다는 더 나이 먹고 읽고 싶었나 보다. 난 한 달 전에 40년을 채웠으니, 이제 누나라고 부르도록 해. 사실 소설들 읽을 때마다 난 그냥 이미 쓰여진 소설들의 필사를 살고 있는 걸까, 싶을 때가 너무 많다. 늦게 태어난 자의 비애...가 아니고 이미 여러 오답이 마련되어 있어 참고할 수 있으니 완전 러키비키잖아?!!!(한 해 지나 식어버린 긍정의 떡밥 아직도 우물우물)

‘인간 실격’의 요우조우가 스물일곱의 이른(?) 나이에 평안하게 늙기 전까지의 삶이란 극도의 불안, 강박, 거기에 압도당해 다른 이들처럼 느끼거나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요즘은 우울증 약도 잘 나오고 조울증 약도 있고 마약까지 안 가더라도 온건하고 효과 좋은 향정신성 물질들이 많이 개발되었는데 말이야...요우조우가 백 년 쯤 늦게 태어났으면 그 은혜로움으로 약물 샤워를 하고 자살 사고를 줄일 수 있었을지, 오히려 더 쑝 보내는 펜타닐에 빠져서 좀비가 되었을지 난 모르겠다. 그리고 이토준지 이 녀석… 이거 원작 맞는 거였나… 전혀 기억도 안 나고 다른 책 새로 읽는 기분이라 오히려 그렇게 밍숭하게 그려준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사양’은 처음 듣는 소설이라 곁다리인가 했는데, 이쪽이 더 재미있었다. 남자 작가가 여자 화자의 입을 빌리는 건 때론 제법 연구했군, 할 때도 있고 이새끼, 이나중 탁구부의 마에노였나, 자꾸 다리 사이에 거시기 뒤로 감추고 여자 흉내내던 그런 장면이 떠오를 때도 있다. 이 소설은 가즈코 목소리인 부분도, 일기도, 편지도, 이거 삼십대후반까지 앓던 중이병이면 이정도까지 나오는구나...싶은 오글거림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문장도 많아서 여러 형식마다 다 읽을만 했다. 마침 뱀의 해인데 죽음과 뱀의 이미지가 반복 교차되는 것도 작위적이지만 분위기 조성 제법이고, ‘나는 귀족이다’ 하면서 밀란 쿤데라가 소설 속에서 언급한 똥 때문에 전기 철조망에 몸 던져 죽은 황태자 아들이었나 누구였나랑 비슷한 나오시도, 내가 인민의 품에 가까이 가려고 그렇게 허랑방탕 기를 쓴 거야 약도 하고 술도 하고...하는 걸 보며 아… 이런 새끼들을 이 작가 소설들 계속 읽다보면 수두룩 빽빽 만나겠구나 싶었다. 우에하라인가 하는 놈도 나중에 해설 보니 작가랑 비슷하게 엮어놨던데 좀 흐리멍텅하게 캐릭터 잘 안 드러나게 그려놨지만 찌질한 건 도쿄출신 귀족이든 시골출신 자수성가 예술가든 만만치 않고… 차라리 애라도 하나 가져서 투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하는 가즈코가 제일 낫게 보였다. 미친놈들중에 그나마 생산적으로 미친년? ㅋㅋㅋ 그건 내가 저 비슷한 생애주기에 했던 선택과도 겹쳐서 더 호의적으로 보는 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애들이 우릴 살리지… 우리가 애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진 않았으면 하는 게 미친년들의 만성적 불안이고…

‘살 만한 삶’에 대해 엄청 좋은 머리들을 굴리며 대화하는 책을 서두만 약간 보는 중인데, ‘인간 실격’이란 구절을 읽다보니 생각했다. 저 말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살 만한 삶과 안 살아도 그만인 삶이 나뉠 수 있는 것인지. 가치 없는 삶이니 죽어! 하고 스스로나 남에게 외치는 건 진짜 병이 아닌지… 나는 그 병을 천천히 고치는 중이지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고 맛난 것,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짓이나 하다가, 시간 되면 어차피 다 죽으니까 최대한 천천히 제때 얼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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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나는 그 어둠침침한 방 끝자리에서 차가움에 부들부들 떨려옴을 느끼면서, 입으로 밥알을 조금씩 옮겨가며 혼자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어째서 하루에 꼭 세 번씩 밥을 먹는 걸까. 정말 모두들 엄숙한 얼굴로 밥을 먹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의식 같은 것으로, 온 가족이 하루에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어둠침침한 방에 모여 앉아 나이 순서대로 밥그릇을 늘어놓고, 먹고 싶지 않아도 군말 없이 밥알을 씹으며, 고개를 숙이고 집안에 깃든 혼령에게 기도를 하기 위해 이러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15)
-무슨 짓이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을 웃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 인간들은 내가 그들의 이른바 ‘생활권’ 밖에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게 되지 않을까. 아무튼 그 인간들의 눈에 거슬리면 안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람이다. 허공이다. 이런 생각으로 겉을 둘러싸고, ‘우스운 행동’으로 가족들에게 웃음을 주며, 나아가 우리 식구보다 더 알 수 없고 무서운 존재인, 하인들과 하녀에게까지 필사적으로 같은 서비스를 제공했던 겁니다. (19)
-내겐 속이면서도, 결백하고, 명랑하게 살고 있는, 혹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 자체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사람들은 끝내 내게 그 묘책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 방법만 알았더라면, 난 인간들을 이렇게 두려워하고 또 필사적인 ‘서비스’를 하는 일 없이도 살 수 있었겠죠. 인간 생활과 대립해서 밤마다 지옥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도, 지낼 수 있었겠죠. (26)
-내게는 남자보다 여자가 몇 배나 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 그땐 사실 살얼음을 밟는 기분으로 그 여자들과 어울렸던 겁니다. 나는 거의 그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존재들이라, 그 수모의 정도가, 또, 남자들에게서 받는 채찍질과는 달리, 예를 들면 내출혈같이 극도로 불쾌하게 내부로 파고들어, 좀처럼 치유가 되지 않는 상처였습니다. (34)
-아아, 내게 냉철한 의지를 주십시오. 내게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시오. 인간이면서 인간을 밀어젖힌다 해도 죄를 묻지 마시고 내게 분노의 마스크를 주십시오. (…) 나는 신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신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신이 내릴 벌만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신의 채찍을 받기 위해, 심판대를 향하여 무릎 꿇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어도, 천국의 존재는 아무리 애써도 내겐 보이지 않았습니다. (89-90)
-세상이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요. 인간들의 집단을 말하는 걸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는 걸까요. 그 실체가 뭐가 됐든, 강하고 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였지만, 호리키에게 그런 소릴 듣고 나니 문득 “세상이란 건 널 두고 하는 말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튀어나왔습니다. 하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꾹 참았습니다. (…)
‘세상이 아니야. 날 매장하는 건 바로 너 아니냐?’
너는 네 안에 들어 있는 악마성, 괴기스러움, 악랄함, 능구렁이 같은 기만성, 요망함을 깨달아라! 갖가지 말들이 다 가슴속에서 솟아 나왔지만, 난 그저 얼굴에 배어나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식은땀이 다 나네”하고 웃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부터 난 ‘세상이란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닌가’라는 철학적인 관념을 갖게 됐습니다. (92-93)
-개인과 개인 사이의 싸움에서, 나아가 바로 그 자리의 싸움에서, 거기서 이기면 되는 것이며, 인간은 결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 존재로 노예조차 노예 나름의 비굴한 앙갚음을 하는 법이니 인간에겐 ‘한판 승부’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는 생존해 나갈 길이 없고, 대의명분 따위를 내걸고 이루고자 노력한 목표는 반드시 개인으로 귀결되고, 개인을 딛고 일어선 다음에도 다시 개인을 향하므로 세상의 불가사의는 개인의 불가사의고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을 말하는 것이라는 관념을 갖고 나니, 난 세상이라는 큰 바다의 환영을 두려워하는 버릇에서 약간은 해방되어, 이전만큼 이것저것 오만 가지 일에 걱정하는 일 없이, 눈앞에 닥친 필요에 따라 어느 정도는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법을 익히게 됐던 겁니다.(97)
-나는 점차 세상에 대해 경계하지 않게 됐습니다. 세상이란 그렇게 두려운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공포감은 봄바람이 불면 백일해균이 수십만, 대중탕에 가면 눈을 멀게 하는 세균이 수십만, 이발소에 가면 탈모를 일으키는 세균이 수십만, 기차 손잡이에는 옴을 일으키는 벌레가 우글우글, 또 생선회, 설 구운 돼지고기나 쇠고기에는 촌충의 유충이며 디스토마균을 비롯한 세균들의 알이 반드시 숨어 있고, 또 어떤 경우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에 유리조각이 박혀서 그 파편이 몸 속을 돌고 돌아 눈동자를 뚫고 실명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는, 이른바 ‘과학적 미신’에 늘 가슴 조렸던 거였습니다. 확실히 수십만이나 되는 세균이 공기 중에 떠돌고 날 음식 안에 잠복해 있는 건 ‘과학적’인 사실이겠죠. 허나 그와 동시에, 그 존재를 완전히 묵살하면, 그것은 나와는 일말의 연관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과학적 유령’에 불과하다는 점도 나는 알게 된 겁니다. (98, 그걸 알아도 쉽게 불안과 강박이 가시진 않잖아...요우조우놈이 하는 저런 걱정 다들 안고 사는 거 아니었나요? 나랑 쟤랑 병자들만 저런가?)
-순진한 신뢰는 죄입니까?(118)
-도쿄에 큰눈이 온 밤이었습니다. 나는 술에 취해 긴자의 뒷골목을, 여기는 내 고향에서 몇백 리, 여기는 내 고향에서 몇백 리, 하고 작은 목소리로 되풀이해서 되풀이해서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도 계속 쌓여갈 것만 같은 눈을 구둣발로 걷어차면서 걷다가, 갑자기 구토를 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첫 각혈이었습니다. 눈 위에 커다란 일장기가 그려졌습니다. 나는 잠시 웅크렸다가는,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양손으로 퍼올려 얼굴을 닦으며, 울었습니다.
여긴 어느 골목이지?
여긴 어느 골목이지? (122-123)
-죽고 싶다. 당장에 죽고 싶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어떤 일을 해도,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난 구렁텅이로 빠져들기만 한다. 수치에 수치를 더할 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초록 잎들이 소용돌이치는 곳을 구경하는 일 따위, 난 이제 감히 바랄 자격도 없다. 그저 추잡한 죄에 야비한 죄를 더하고, 고뇌는 부풀고 더 강렬해질 뿐이다. 죽고 싶다. 죽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의 씨다.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도, 역시나 아파트와 약국 사이를 반미치광이가 되어 왔다 갔다 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128, 자살 사고에, 약물 중독에, 불륜에, 난리가 났다...에휴…)
-이제 내겐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갑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아왔던, 이른바 ‘인간’ 세상에서 단 하나 진리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단지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간다.
나는 올해 스물일곱이 됩니다.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 사람들은 40대 이상으로 봅니다. (133)

<<사양>>
-정말로 손으로 먹으면 더 맛이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나 같은 고급 거지가 어설프게 그걸 흉내내면 그야말로 진짜 거지꼴이 되어버릴 것 같아 그만두었다. (144)
-지난해엔 아무 일이 없었다.
지지난해엔 아무 일이 없었다.
그전 해에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178)
-데카당?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지. 그런 말들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보다, 죽어! 하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고맙다. 그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인간은 좀처럼 죽어! 라는 말은 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쩨쩨해. 꿍꿍이로 배불린 위선자들아! 정의? 이른바 말하는 계급 투쟁의 본질은 그런 데 있는 게 아니야. 인도? 헛소리 마. 나는 알고 있다고. 그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일이야. 죽여버리는 일이야. 죽어! 하고 내리는 선고가 아니라면, 그게 뭐냔 말이야. 사람을 기만하면 안 되지.
하지만 우리 계급에도, 제대로 된 노예가 없다. 백치, 유령, 수전노, 미친 개, 떠벌이. 그렇습네다, 구름 위에서 뿌리는 오줌.
죽어! 하고 말하기조차 아까워. (201)
-불량하다는 건 다정다감한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212)
-세간에서, 좋은 평을 듣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고, 위선자란 걸 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믿지 않습니다. 불량하다는 꼬리표 달린 것만이 제 편입니다. 꼬리표 달린 불량자. 저는 그 십자가에 만큼은, 매달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만인에게 비난받더라도 전 목청껏 응수해줄 수 있습니다. 너희들은 꼬리표가 붙지 않은 정말로 위험한 불량자들 아니냐고. (230)
-지금까지 이 세상 어른들은 이 혁명과 사랑, 두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흉측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주입시켜, 전쟁 전이나 전시에나 우리는 배운 대로만 알고 있었는데, 패전 후, 우리는 이 세상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뭐든 그 사람들이 말하던 것과는 반대로 하는 것이 진정 살 길이라 여기게 되어서,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고 맛난 것이고, 그러니까 좋은 일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못된 심보로 우리에게 설익은 포도라 이르며 거짓말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245-246)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굳건히 살아남아야 하고,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라, 인간으로서의 영예라고 하는 것도 꼭 그런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죽는 게 죄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아. (282)
-인간은, 모두, 똑같다.
이 얼마나 비굴한 말인가. 인간을 혐오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경멸하고, 일말의 자존도 없이 모든 노력을 포기해버린 말. (285)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내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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