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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사양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250131 다자이 오사무.
무뚝뚝한 아버지를 웃겨보겠다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던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먼저 봤고, ‘에구구구’하는 노래를 부르는 요조를 먼저 알았고, 이토준지가 만화화한 ‘인간 실격’을 먼저 보았다. 왜 이 소설을 여태 미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다자이 오사무보다는 더 나이 먹고 읽고 싶었나 보다. 난 한 달 전에 40년을 채웠으니, 이제 누나라고 부르도록 해. 사실 소설들 읽을 때마다 난 그냥 이미 쓰여진 소설들의 필사를 살고 있는 걸까, 싶을 때가 너무 많다. 늦게 태어난 자의 비애...가 아니고 이미 여러 오답이 마련되어 있어 참고할 수 있으니 완전 러키비키잖아?!!!(한 해 지나 식어버린 긍정의 떡밥 아직도 우물우물)
‘인간 실격’의 요우조우가 스물일곱의 이른(?) 나이에 평안하게 늙기 전까지의 삶이란 극도의 불안, 강박, 거기에 압도당해 다른 이들처럼 느끼거나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요즘은 우울증 약도 잘 나오고 조울증 약도 있고 마약까지 안 가더라도 온건하고 효과 좋은 향정신성 물질들이 많이 개발되었는데 말이야...요우조우가 백 년 쯤 늦게 태어났으면 그 은혜로움으로 약물 샤워를 하고 자살 사고를 줄일 수 있었을지, 오히려 더 쑝 보내는 펜타닐에 빠져서 좀비가 되었을지 난 모르겠다. 그리고 이토준지 이 녀석… 이거 원작 맞는 거였나… 전혀 기억도 안 나고 다른 책 새로 읽는 기분이라 오히려 그렇게 밍숭하게 그려준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사양’은 처음 듣는 소설이라 곁다리인가 했는데, 이쪽이 더 재미있었다. 남자 작가가 여자 화자의 입을 빌리는 건 때론 제법 연구했군, 할 때도 있고 이새끼, 이나중 탁구부의 마에노였나, 자꾸 다리 사이에 거시기 뒤로 감추고 여자 흉내내던 그런 장면이 떠오를 때도 있다. 이 소설은 가즈코 목소리인 부분도, 일기도, 편지도, 이거 삼십대후반까지 앓던 중이병이면 이정도까지 나오는구나...싶은 오글거림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문장도 많아서 여러 형식마다 다 읽을만 했다. 마침 뱀의 해인데 죽음과 뱀의 이미지가 반복 교차되는 것도 작위적이지만 분위기 조성 제법이고, ‘나는 귀족이다’ 하면서 밀란 쿤데라가 소설 속에서 언급한 똥 때문에 전기 철조망에 몸 던져 죽은 황태자 아들이었나 누구였나랑 비슷한 나오시도, 내가 인민의 품에 가까이 가려고 그렇게 허랑방탕 기를 쓴 거야 약도 하고 술도 하고...하는 걸 보며 아… 이런 새끼들을 이 작가 소설들 계속 읽다보면 수두룩 빽빽 만나겠구나 싶었다. 우에하라인가 하는 놈도 나중에 해설 보니 작가랑 비슷하게 엮어놨던데 좀 흐리멍텅하게 캐릭터 잘 안 드러나게 그려놨지만 찌질한 건 도쿄출신 귀족이든 시골출신 자수성가 예술가든 만만치 않고… 차라리 애라도 하나 가져서 투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하는 가즈코가 제일 낫게 보였다. 미친놈들중에 그나마 생산적으로 미친년? ㅋㅋㅋ 그건 내가 저 비슷한 생애주기에 했던 선택과도 겹쳐서 더 호의적으로 보는 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애들이 우릴 살리지… 우리가 애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진 않았으면 하는 게 미친년들의 만성적 불안이고…
‘살 만한 삶’에 대해 엄청 좋은 머리들을 굴리며 대화하는 책을 서두만 약간 보는 중인데, ‘인간 실격’이란 구절을 읽다보니 생각했다. 저 말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살 만한 삶과 안 살아도 그만인 삶이 나뉠 수 있는 것인지. 가치 없는 삶이니 죽어! 하고 스스로나 남에게 외치는 건 진짜 병이 아닌지… 나는 그 병을 천천히 고치는 중이지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고 맛난 것,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짓이나 하다가, 시간 되면 어차피 다 죽으니까 최대한 천천히 제때 얼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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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나는 그 어둠침침한 방 끝자리에서 차가움에 부들부들 떨려옴을 느끼면서, 입으로 밥알을 조금씩 옮겨가며 혼자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어째서 하루에 꼭 세 번씩 밥을 먹는 걸까. 정말 모두들 엄숙한 얼굴로 밥을 먹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의식 같은 것으로, 온 가족이 하루에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어둠침침한 방에 모여 앉아 나이 순서대로 밥그릇을 늘어놓고, 먹고 싶지 않아도 군말 없이 밥알을 씹으며, 고개를 숙이고 집안에 깃든 혼령에게 기도를 하기 위해 이러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15)
-무슨 짓이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을 웃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 인간들은 내가 그들의 이른바 ‘생활권’ 밖에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게 되지 않을까. 아무튼 그 인간들의 눈에 거슬리면 안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람이다. 허공이다. 이런 생각으로 겉을 둘러싸고, ‘우스운 행동’으로 가족들에게 웃음을 주며, 나아가 우리 식구보다 더 알 수 없고 무서운 존재인, 하인들과 하녀에게까지 필사적으로 같은 서비스를 제공했던 겁니다. (19)
-내겐 속이면서도, 결백하고, 명랑하게 살고 있는, 혹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 자체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사람들은 끝내 내게 그 묘책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 방법만 알았더라면, 난 인간들을 이렇게 두려워하고 또 필사적인 ‘서비스’를 하는 일 없이도 살 수 있었겠죠. 인간 생활과 대립해서 밤마다 지옥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도, 지낼 수 있었겠죠. (26)
-내게는 남자보다 여자가 몇 배나 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 그땐 사실 살얼음을 밟는 기분으로 그 여자들과 어울렸던 겁니다. 나는 거의 그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존재들이라, 그 수모의 정도가, 또, 남자들에게서 받는 채찍질과는 달리, 예를 들면 내출혈같이 극도로 불쾌하게 내부로 파고들어, 좀처럼 치유가 되지 않는 상처였습니다. (34)
-아아, 내게 냉철한 의지를 주십시오. 내게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시오. 인간이면서 인간을 밀어젖힌다 해도 죄를 묻지 마시고 내게 분노의 마스크를 주십시오. (…) 나는 신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신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신이 내릴 벌만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신의 채찍을 받기 위해, 심판대를 향하여 무릎 꿇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어도, 천국의 존재는 아무리 애써도 내겐 보이지 않았습니다. (89-90)
-세상이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요. 인간들의 집단을 말하는 걸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는 걸까요. 그 실체가 뭐가 됐든, 강하고 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였지만, 호리키에게 그런 소릴 듣고 나니 문득 “세상이란 건 널 두고 하는 말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튀어나왔습니다. 하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꾹 참았습니다. (…)
‘세상이 아니야. 날 매장하는 건 바로 너 아니냐?’
너는 네 안에 들어 있는 악마성, 괴기스러움, 악랄함, 능구렁이 같은 기만성, 요망함을 깨달아라! 갖가지 말들이 다 가슴속에서 솟아 나왔지만, 난 그저 얼굴에 배어나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식은땀이 다 나네”하고 웃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부터 난 ‘세상이란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닌가’라는 철학적인 관념을 갖게 됐습니다. (92-93)
-개인과 개인 사이의 싸움에서, 나아가 바로 그 자리의 싸움에서, 거기서 이기면 되는 것이며, 인간은 결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 존재로 노예조차 노예 나름의 비굴한 앙갚음을 하는 법이니 인간에겐 ‘한판 승부’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는 생존해 나갈 길이 없고, 대의명분 따위를 내걸고 이루고자 노력한 목표는 반드시 개인으로 귀결되고, 개인을 딛고 일어선 다음에도 다시 개인을 향하므로 세상의 불가사의는 개인의 불가사의고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을 말하는 것이라는 관념을 갖고 나니, 난 세상이라는 큰 바다의 환영을 두려워하는 버릇에서 약간은 해방되어, 이전만큼 이것저것 오만 가지 일에 걱정하는 일 없이, 눈앞에 닥친 필요에 따라 어느 정도는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법을 익히게 됐던 겁니다.(97)
-나는 점차 세상에 대해 경계하지 않게 됐습니다. 세상이란 그렇게 두려운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공포감은 봄바람이 불면 백일해균이 수십만, 대중탕에 가면 눈을 멀게 하는 세균이 수십만, 이발소에 가면 탈모를 일으키는 세균이 수십만, 기차 손잡이에는 옴을 일으키는 벌레가 우글우글, 또 생선회, 설 구운 돼지고기나 쇠고기에는 촌충의 유충이며 디스토마균을 비롯한 세균들의 알이 반드시 숨어 있고, 또 어떤 경우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에 유리조각이 박혀서 그 파편이 몸 속을 돌고 돌아 눈동자를 뚫고 실명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는, 이른바 ‘과학적 미신’에 늘 가슴 조렸던 거였습니다. 확실히 수십만이나 되는 세균이 공기 중에 떠돌고 날 음식 안에 잠복해 있는 건 ‘과학적’인 사실이겠죠. 허나 그와 동시에, 그 존재를 완전히 묵살하면, 그것은 나와는 일말의 연관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과학적 유령’에 불과하다는 점도 나는 알게 된 겁니다. (98, 그걸 알아도 쉽게 불안과 강박이 가시진 않잖아...요우조우놈이 하는 저런 걱정 다들 안고 사는 거 아니었나요? 나랑 쟤랑 병자들만 저런가?)
-순진한 신뢰는 죄입니까?(118)
-도쿄에 큰눈이 온 밤이었습니다. 나는 술에 취해 긴자의 뒷골목을, 여기는 내 고향에서 몇백 리, 여기는 내 고향에서 몇백 리, 하고 작은 목소리로 되풀이해서 되풀이해서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도 계속 쌓여갈 것만 같은 눈을 구둣발로 걷어차면서 걷다가, 갑자기 구토를 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첫 각혈이었습니다. 눈 위에 커다란 일장기가 그려졌습니다. 나는 잠시 웅크렸다가는,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양손으로 퍼올려 얼굴을 닦으며, 울었습니다.
여긴 어느 골목이지?
여긴 어느 골목이지? (122-123)
-죽고 싶다. 당장에 죽고 싶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어떤 일을 해도,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난 구렁텅이로 빠져들기만 한다. 수치에 수치를 더할 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초록 잎들이 소용돌이치는 곳을 구경하는 일 따위, 난 이제 감히 바랄 자격도 없다. 그저 추잡한 죄에 야비한 죄를 더하고, 고뇌는 부풀고 더 강렬해질 뿐이다. 죽고 싶다. 죽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의 씨다.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도, 역시나 아파트와 약국 사이를 반미치광이가 되어 왔다 갔다 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128, 자살 사고에, 약물 중독에, 불륜에, 난리가 났다...에휴…)
-이제 내겐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갑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아왔던, 이른바 ‘인간’ 세상에서 단 하나 진리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단지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간다.
나는 올해 스물일곱이 됩니다.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 사람들은 40대 이상으로 봅니다. (133)
<<사양>>
-정말로 손으로 먹으면 더 맛이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나 같은 고급 거지가 어설프게 그걸 흉내내면 그야말로 진짜 거지꼴이 되어버릴 것 같아 그만두었다. (144)
-지난해엔 아무 일이 없었다.
지지난해엔 아무 일이 없었다.
그전 해에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178)
-데카당?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지. 그런 말들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보다, 죽어! 하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고맙다. 그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인간은 좀처럼 죽어! 라는 말은 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쩨쩨해. 꿍꿍이로 배불린 위선자들아! 정의? 이른바 말하는 계급 투쟁의 본질은 그런 데 있는 게 아니야. 인도? 헛소리 마. 나는 알고 있다고. 그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일이야. 죽여버리는 일이야. 죽어! 하고 내리는 선고가 아니라면, 그게 뭐냔 말이야. 사람을 기만하면 안 되지.
하지만 우리 계급에도, 제대로 된 노예가 없다. 백치, 유령, 수전노, 미친 개, 떠벌이. 그렇습네다, 구름 위에서 뿌리는 오줌.
죽어! 하고 말하기조차 아까워. (201)
-불량하다는 건 다정다감한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212)
-세간에서, 좋은 평을 듣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고, 위선자란 걸 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믿지 않습니다. 불량하다는 꼬리표 달린 것만이 제 편입니다. 꼬리표 달린 불량자. 저는 그 십자가에 만큼은, 매달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만인에게 비난받더라도 전 목청껏 응수해줄 수 있습니다. 너희들은 꼬리표가 붙지 않은 정말로 위험한 불량자들 아니냐고. (230)
-지금까지 이 세상 어른들은 이 혁명과 사랑, 두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흉측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주입시켜, 전쟁 전이나 전시에나 우리는 배운 대로만 알고 있었는데, 패전 후, 우리는 이 세상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뭐든 그 사람들이 말하던 것과는 반대로 하는 것이 진정 살 길이라 여기게 되어서,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고 맛난 것이고, 그러니까 좋은 일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못된 심보로 우리에게 설익은 포도라 이르며 거짓말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245-246)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굳건히 살아남아야 하고,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라, 인간으로서의 영예라고 하는 것도 꼭 그런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죽는 게 죄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아. (282)
-인간은, 모두, 똑같다.
이 얼마나 비굴한 말인가. 인간을 혐오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경멸하고, 일말의 자존도 없이 모든 노력을 포기해버린 말. (285)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내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 (2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