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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초판 출간 80주년 기념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8월
평점 :
‘부활‘의 음악이 다 비슷비슷하단 의견에 김태원 행님이 대답했다. ˝그것이 밴드의 색깔이다. 다른 색깔을 보고 싶으면 다른 밴드의 음악을 찾아 들으면 된다.˝ 이 얼마나 멋진 신념인가. 그러니까, 꼭 많은 걸 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고 여기에 나 역시 동의한다. 중국집은 중화요리만 잘하면 되고, 축구선수는 축구만 잘하면 되는 거다. 그러면 여러 능력자들 가운데서 소위 고인물 소리 좀 듣는 이들은 무엇이 다른가 하면, 바로 자기만의 고유성을 지녔다는 점에 있다. 제 장점이 무기가 될 때까지 갈고닦아놔야 어딜 가든 살아남는다. 이건 소설가들도 예외가 없는데, 매번 비슷한 식이라면 아무래도 취향을 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고유성이 있다면 죽어서도 알아주는 불멸의 명예를 얻는다. 그런 이유로 대중한테서 살아남은 이름들은 취향과 상관없이 전부 존경받을만하다.
올해의 독서는 그동안 아껴두었던 작품들을 손볼 계획이다. 가장 먼저 <레베카>로 시작했는데, 왜 그토록 전 세계가 극찬했는지를 알겠더라. 야 이건 뭐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함이다. 이제야 나도 어디 가서 호들갑 떨 자격이 생겼다. 보통 호평 일색일 때 나는 비평만 적곤 하는데, <레베카>는 딱히 비평할 거리가 안 보인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듀 모리에의 글도 다 비슷하긴 한데, 사실 고딕소설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봐야지. <레베카>에서는 저자의 전매특허인 으스스함을 첫 장부터 끝장까지 느낄 수가 있다. 과연 출구 없는 매력이란 이런 걸 말하지 싶다.
유명하니까 줄거리는 패쓰. 초반부터 주인공을 귀족과 후딱 결혼시키는 작가. 그 와중에도 이제 곧 후폭풍으로 독자를 후려칠 거라는 암시가 곳곳에 가득했다. 이후 맨덜리의 안주인 행세를 해야 할 주인공이 영 못 미더운 하인들의 표정은 곧 내 표정이었다. 차마 그녀에 대한 걱정과 근심을 배제한 채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맨덜리의 원래 안주인인 레베카는 보트 사고로 죽었으나, 집 안팎 어딜 가도 남아있는 그녀의 흔적이 주인공을 작아지게 만든다. 살아생전 팔방미인 사기캐였던 레베카는 죽어서도 살아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맨덜리는 여전히 레베카의 방식대로 운영되고 있었고, 무엇 하나 손댈 게 없는 주인공은 안주인의 위엄은커녕 체면이나 안 구기면 다행이었다. 으아아, 정말 불편해 미치는 줄 알았다.
맨덜리 저택의 실세, 댄버스 부인이 나서면서 작품의 구도가 크게 변한다. 레베카의 곁을 쭉 지켜왔던 부인은, 주인공을 교묘히 꼽주면서 멘탈을 무너뜨린다. 오직 레베카뿐이었던 댄버스 부인은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저 몹쓸 것이 불쾌했고, 그 몹쓸 것을 데려온 집주인 또한 원망스러웠다. 이제 주인공의 몰락을 향한 부인의 빌드업은 맨덜리 무도회장에서 결정타를 날린다. 레베카에 대한 부인의 집착과 걷잡을 수 없는 광기가, 독자의 텐션을 지구 밖에까지 끌어올린다. 진짜 이대로라면 제목을 댄버스로 바꿔도 손색없겠던데.
갈수록 차가워지는 남편의 태도가 주인공을 돌게 만든다. 남편은 일상 곳곳에서 전처의 부재를 느끼고 그리워하였다. 결국 레베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강박과 지독한 편집증에 빠진 그녀는, 있지도 않은 존재와 싸워서 자신의 무쓸모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쳐갈 무렵 해안에서 한 선박이 좌초되는데, 인양할 때 딸려 나온 보트 안에서 레베카의 시신이 발견된다. 이 쇼킹 뉴스가 영국 전역에 퍼지고, 용의자로 지목된 남편은 사건 심리를 받는다. 이제 흐름은 한 개인의 갈등에서 맨덜리 전체의 위기로 넘어간다. 정말이지 숨 돌릴 새가 없었는데, 요절하지 않은 주인공도 참 대단했다.
어찌어찌해서 남편의 심리는 무죄 판결이 났다. 그 과정에서 몇 수 앞을 내다본 레베카의 비밀과 속내가 밝히 드러난다. 마치 죽어서도 난 영원할 거라는 레베카의 저주에 걸린 기분이었다. 이 미지의 인물은 책을 덮은 지금도 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존재이다. 어떻게 단 한 번의 등장 없이도 이만한 파급력을 지닐 수 있을까. 역시 이 정도는 해줘야 고인물 소리를 듣는가 보다. 총 세 편의 작품을 읽고서 감히 평을 하자면, 이 작가의 톤은 딱 하나뿐이다. 근데 그 하나가 유일무이한 흑진주 같아서 안 좋아할 수가 없는 거다. 허나 대중들은 무지개 톤을 원하고 있으니 이것 참 대략 낭패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