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SF 장르를 썩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가 죄다 글맛도 없고 감성도 없고,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생김새하고는 영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터져 나오는 근미래 배경의 작품들은 좀 덜하지만 그래도 손이 잘 안 가게 된달까. 그래서 과학 관련은 문학보다는 차라리 비문학 쪽이 더 어울린다고 봐왔다. 이 같은 나의 편견을 완전히 뒤바꿔준 작품을 지인의 권유로 만나게 되었다. AI 로봇들이 점점 보편화 중인 세대를 그리고 있는 <천 개의 파랑>은 기존의 대중소설과 별반 다른 게 없다고 할 만큼 자연스러운 글과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SF에 감성을 불어넣은 작가를 가즈오 이시구로 외에 처음 보는데, 읽어보니까 과연 과학 문학상 탈만 합디다.
오늘날의 사회층은 전혀 다른 성격의 세 그룹으로 나뉘어있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노년층과, 어릴 때부터 스마트 문화를 접해온 청소년층, 그리고 양쪽 문화를 다 경험해본 중장년층. 이 같은 구분은 또 하나의 세대 차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현대 문명에 쩔쩔매는 우리 부모님들도 그렇고 나 또한 시대를 따라가질 못해서 자꾸만 과거를 그리워하게 된다. 쉼 없이 변화하는 지금의 시대가 나에게는 좀 무섭고 또 버겁다. 이 과학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인간은 어느 순간 도태되고 말 것이다.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과학이 세대를 가르고 나누는 벽으로 작용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렇게 온갖 혜택을 다 누리면서도 현대 과학이 나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천 개의 파랑>은 과학이 가져온 세대갈등을 다루고 있다. 로봇이 싫은 엄마는 로봇에 재능을 가진 둘째 딸이 고깝기만 하다. 로봇을 만지고 다루는 게 유일한 행복인 둘째 딸은 그 로봇 때문에 편의점 알바를 잘리고도 화를 내지 않는다. 언젠가 세상이 다 그렇게 바뀔 거란 걸 예상했다는 듯이. 남편을 잃은 후 바삐 살아왔던 엄마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 둘째 딸은, 감정 쏟을 일 없는 로봇을 대할 때에만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 한편 엄마는 애들이 다 자라고 나서야 어릴 때에 신경 써주지 못했던 지난날을 책망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과학은 누군가에겐 안식처였고 또 누군가에겐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또한 이 작품은 감정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과학의 역할을 다루고도 있다. 어려서부터 휠체어 생활 중인 큰딸은 세상과 멀어졌고, 언니를 챙겨야 했던 동생은 자기의 시간들을 뺏겼고, 생계를 책임지느라 딸들에게 소홀했던 엄마는 유대관계가 끊어졌다. 뿌리칠 수 없는 현실에 발목 잡힌 세 사람은 잃어버린 자유 속에서 긴 세월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99%의 체념과 1%의 소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들에게 있어 구원의 손길은 바로 과학이었다. 그리고 무너진 연대를 회복해준 것도 다름 아닌 과학 기술 덕분이었다.
2035년에는 인간이 아닌 로봇 기수들끼리 경마 시합을 한다. 일등 성적을 거두던 경주마 투데이는 무리한 시합으로 관절이 망가져가고, 투데이를 걱정한 휴머노이드 콜리는 시합 도중 일부러 낙마하여 하반신이 부서진다. 달리지 못하는 말은 조만간 안락사를 할 것이고, 부서진 로봇은 폐기처분을 할 것이었다. 엄마네 식당 근처인 경마장을 놀이터처럼 들락날락하던 두 딸은 망가진 말과 로봇에게 마음이 기운다. 첫째 딸은 자신처럼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투데이를 틈나는 대로 돌보았고, 둘째 딸은 콜리를 데려와 수리하며 작게나마 로봇 연구원의 꿈을 대리 경험한다. 타인에게 도움만 받았던 첫째 딸은 처음으로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었고, 누구와도 잘 지내지 않았던 둘째 딸은 로봇의 수리를 적극 지원해준 학교 친구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된다. 그리고 엄마는 딸들에게 받지 못할 위로와 격려를 그렇게나 싫어했던 로봇인 콜리한테 받게 된다. 꼭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로봇은, 반드시 말을 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대답했다. 이 장면이 핵심이다. 과학의 발달로 삶의 질이 오를수록 서로 간에 대화와 소통은 끊어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오해와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이 올 것이다. 작가는 이 점을 염려하고 책을 쓴 게 아닌가 한다.
고장 난 마음은 똑같이 고장 난 마음에게 이끌린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을 공감해줄 수 있으니까. 나의 아픔을 이해 못 할 이들의 삶에는 어떤 식으로도 자리할 수가 없다는 걸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안다. 마음을 얻어내는 시간은 너무도 길고,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은 너무나 짧은 현대사회의 공허함은 인간만이 해결해준다고 믿었다. 살아 숨 쉬는 인간이 지닌 무수한 감정 표현은 말로 다 할 수도 없는데, 로봇이 무슨 수로 그 자리를 대신해서 교감과 이해를 나누겠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다 제 역할과 본분을 하는 건 아니라서, 때로는 소통 불가의 인간보다 반쪽짜리 공감능력의 로봇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많은 이들이 과학의 장점에만 주목할 때 천선란 작가는 단점에 더 주목하고 그것을 장점으로 극복하여 조화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소설의 구조며 재미와 메시지 등등 모든 게 완벽한 이 작품에 도저히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장르 불문하고 소설은 소설다워야 한다는 걸 또다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