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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즙 배달원 강정민
김현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평점 :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 훔쳐본지가 언제인지 모른다. 이 책은 나에게 그런 책이 되었다. 사실 울 만한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다소 도톰한 책 내용 대부분이 반복되는 일과와 술 얘기만 계속되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지루한 책일 수도 있다. 읽으면서 다 읽지 않아도 내용을 알 것 같단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그런데 김현진 작가는 이야기를 꾸준하면서도 완곡한 방식으로 끌고 나갔다. 사람들이 읽기를 포기하지만 않으면 이야기와 함께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다부지게 이야기를 펼쳐주었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나는 더 눈과 코가 시큼해졌고, 아주 만족스럽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또한 단순히 녹즙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우정, 가족, 실패, 사회, 이슈, 현실, 사랑, 유머(?) 등 많은 주제를 어우르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언젠간 지금 느꼈던 세세한 감동을 잊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 또다시 책을 읽더라도 다시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 그러고보니 책을 읽으며 깔깔깔 엄청 많이 웃기도 했다. 좋은 책이었다.
의사는 나를 파악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나 자신을 파악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아봤자 좋은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의사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내가 의학용어로 말하자면 ‘양가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술을 끊고 싶다. 그렇지만 두렵다. 술을 끊으면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끊고 싶으면서도 끊고 싶지 않다. 끊고 싶다. 그렇지만 끊고 싶지 않다.
과하다 싶을 때 그만둘 수 있다면, 나도 여러분처럼 스스로를 대강만 미워할 수 있을 텐데.
자기보다 한참 어린 걸 그룹 보면서 침이나 질질 흘리질 않나. 왜 남자들은 자기 외모와 상관없이 모든 여자들을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대부분의 동물은 교미를 하고 싶은 수컷 쪽에서 구애를 하고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거늘, 왜 인간 수컷은 그러지 않는 걸까.
하긴 남자와 대화할 때 많은 말은 필요 없다. 그냥 웃거나, 아 정말요, 그런 이야긴 처음 들어봐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이 정도만 있으면 모든 게 매끄럽게 흘러간다. 남자들은 사실 여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슨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요만큼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나를 죽일 것을 알면서도 거둘 수 없는 이 미친 짓. 언제나 숨이 막히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안아주는 너. 간이 나빠지고 얼굴색이 나빠지고 평판이 나빠지고 지갑 형편이 나빠지고 건강이 나빠지고 인간관계가 나빠져도, 차마 놓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랑.
마땅한 일자리도 별로 없고, 있다 해도 사람들이 너무 몰리고, 이놈의 삶이란 게 만만한 구석이 있어야지.
... 사실 나는 섹스 따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단지 누군가에게 안겨 잠이 들고 싶을 뿐이다. 타인의 온기와 다정함 속에서 안심하고 잠들고 싶을 따름이다. 하지만 남자란, 자주지 않으면 절대로 자고 가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 어느 며느리가 시부모 아프다고 간병해주거나 노후를 책임지겠어? 그래서 딸이 ‘가성비‘가 좋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아들보다 돈 적게 들여 키워도 나중에 며느리가 안 해주는 돌봄 노동을 딸이 대신 해주잖아. 자발적으로 결혼 안 하고 ‘비혼‘으로 부모하고 살면서 실질적으로 부양하는 딸들도 생기니까, 딸이야말로 투자 대비 효율이좋다는 걸 알게들 된 거지."
"아 진짜. 줄 것처럼 해놓고, 존나 비싸게 구네." 그래, 이거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게일 분노하는 것. ‘가성비‘가 안 맞을 때, 내가 얼마나 돈도 쓰고 공도 들였는데 이제 와서 감히 거부를 해? 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본인의 억울함이 우선이 된다. 아마 법으로 고소할 수 있다면 그들은 기어코 그런 여자를 재판에 회부하고야 말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도대체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 나에게는 적당히가 없다. 필름이 끊길 때마다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다. 하지만 술이 주는 위로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견딜 수 있을까. 맨정신으로 살기엔 하루하루가 너무 버겁다.
삶이란 놈이 냉정해서, 유예기간을 주지 않아요. 이미 시작되어버린 지 오래되었어요.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돼요. 어른이니까요.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모래에 닭처럼 고개를 처박고 이건 진짜 내가 아니야, 하고 스스로에게 계속 거짓말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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