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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어 -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탈 벤 샤하르 지음, 노혜숙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행복. 무척 친숙한 단어이면서 동시에 낮선 단어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나요?’라고 질문했을 때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라고 한 번에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학생(대학원생들)들에게 “선생님은 무엇을 위해 사시나요?”라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분들이 답변한 말은 “먹고 살기 위해” “자식 공부시키기 위해” “남보다 더 살려고” “돈 많이 벌려고” “편안하게 살려고”이고 조금 심한 경우에는 “죽지 못해 산다”는 분도 있었다. 물론 간혹 가다 “세상에 무언가 남기고 싶다” 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당시 내가 원했던 답은 ‘행복하기 위해서’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답을 끌어낼 때까지 최소한 3번에서 5번 정도는 질문했던 것 같다. 질문했던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질문1 “선생님은 왜 무엇을 위해 사시나요?”
답변1 “자식 공부시키려고”
질문2 “왜 자식 공부에 그토록 관심을 가지시나요?”
답변2 “자식은 나보다 낫게 살아야 하니까.”
질문3 “선생님보다 낫게 산다는 게 뭔가요?”
답변3 “남들 앞에서 큰 소리치고 사는 거지.”
질문4 “그렇게 살면 뭐가 좋은가요?”
답변4 “그럼 세상을 편하게 살잖아.”
질문5 “편하게 살면 뭐가 좋은 가요?”
답변5 “한번 태어난 세상인데 남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살아야지.”
답변을 봐도 알겠지만 우리는 분명히 행복한 삶을 원한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카페인음료를 물처럼 마시며 밤새 일하는 것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 내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도 참는 것도 모두 행복한 삶을 위해서다.
그러나 막상 ‘왜 사는냐’ 고 물어보면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단번에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너무나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산 넘어의 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다른 사람 이야기는 제쳐두고 내 이야기를 해 보자.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누군가 나에게 행복감을 평가하라면 아마도 5점 만점에 3.7~3.8정도에 체크할 것 같다. 특별히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행복한 것도 아닌,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불행보다는 행복하다는 느낌을 좀 더 갖는 상태다.
‘행복’을 생각할 때면 가끔 느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말 내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하다고 해도 이런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기가 거북하다는 것이다. 남에게는 물론이고 내 자신에게도 그렇다. 아마도 지금 행복하면 다음에는 불행이 찾아오고, 복잡한 세상에서 나 혼자 행복하다는 것이 남의 어려움을 외면한 이기주의자이고, 또 어떤 때는 내가 행복하면 누군가 불행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고, 어떤 때는 더 큰 두려움을 야기 시킬 수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사람들이 가진 것 중에서 바꾸기 어려운 의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제한되어 있어 모든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다는 선입감이라고 한다. 돈, 권력, 땅, 식량, 에너지 등등이다(엄밀히 따지면 지구상의 모든 자원은 모든 인류가 충분히 쓰고도 남을 양지만). 그러다보니 누군가 하나를 가지면 또 다른 누군가는 못 갖기 마련이고, 이런 상황이 행복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란 인간의 내적인 문제이기에 누가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내가 행복하다고 해서 남의 불행해 지는 것도 아니다. 남의 것을 빼앗을 수도 없고(물론 순간의 만족을 위해 남의 행복을 짓밟는 사람도 있기 하지만), 몇 그루 안 되는 행복나무에서 남보다 내가 먼저 따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내가 행복해야 남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행복은 내면의 것이기에 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키우고, 가꾸고, 확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행복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젊은이들은 우울증 환자로 변하고 있고, 길거리에는 무엇인가를 찾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만이 즐비하다. 하나같이, 나를 포함해서,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저자는 ‘행복한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의 즐거움’이라는 두 개의 축을 기준으로 네 가지 타입의 인간 모습을 설명한다. 저자는 이를 ‘햄버거 이론’이라 하면서, 사람 유형을 쾌락주의자, 성취주의자, 허무주의자, 행복주의자로 나눈다.
[쾌락주의자]는 현재의 이익을 위해 미래의 손실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순간적으로 입에는 달지만 몸에 안 좋은 햄버거를 먹는 사람을 말하고, [성취주의자]는 미래의 이익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즉 건강에는 좋지만 당장은 맛이 없는 햄버거를 먹는 사람이며, [허무주의자]는 맛도 없고 건강에도 안 좋은 햄버거를 먹는 사람으로,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채 지금 이 순간도 즐기지 못하면서 미래에 대한 목적의식도 없는 사람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행복주의자]는 현재와 미래의 이익을 모두 보장해 주는 맛도 있고, 건강에도 좋은 햄버거를 먹는 사람이다.
물론 저자는 사람들이 위의 네 가지 유형으로 정확히 구분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누구나 네 가지 성향을 다 갖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성격이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만약 행복을 원한다면 그는 “‘지금 행복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에 행복할 것인가?’라고 묻지 말고, ‘어떻게 하면 지금과 미래 모두 행복해 질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행복한 사람]이란 현재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활동이 곧 자신을 성공적인 미래로 안내한다는 믿음을 갖고 생활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와 미래의 즐거움을 동시에 얻을 수 있을까? 저자는 언뜻 들기에는 불가능해 보일지 몰라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면 배움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즐거움에서 현재의 이익을 얻고 그러한 아이디어를 경력을 위해 활용하면서 미래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특히 [몰입]과 관련된 책을 보면 이런 예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저자는 행복을 “즐거움과 의미의 포괄적인 경험”이라고 정의하면서 단순히 즐거움만 추구하는 것을 경계한다. 이는 행복의 중요한 요소인 삶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이익인 즐거움과 미래의 이익인 의미를 담고 있는 무엇인가를 행할 때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 내 앞에 놓인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또 그것을 통해 얻는 것을 미래에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저자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무언가를 찾는 방법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첫 번째는 다음과 같이 자신에게 물어본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 중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중에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또 한 번 질문한다. 이 중에서 ’내가 정말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고. 그리고 이와 같은 네 번의 질문을 통해 얻어진 결론을 갖고 삶의 목적과 목표를 만들고 이에 대한 계획을 짠다.
물론 저자도 인간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상황일지라도 자신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일을 조금씩 늘려갈 수 있지는 않느냐고 반문한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정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이라도 하면서 과정 자체를 즐기라는 말이다.
두 번째는 ‘무엇이 나에게 의미를 주는가?’ ‘무엇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가?’ 그리고 ‘나에게 어떤 장점이 있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을 통해 나온 답들 간의 공통점을 찾는다.
예를 들어 나에게 ‘의미 있는 활동’은 글쓰기, 문제해결, 아들과 노는 것이고,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독서하고 글 쓰고 여행하는 것이며, ‘내 장점이자 재능’은 자료를 수집하고, 계획을 세우고, 항상 뭔가를 최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정이라면 이들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찾으면 된다.
자료수집하고 계획세우기가 장점인 사람이 글 쓰고 문제 해결하는 것과 아이들과 놀이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게다가 독서하고 글 쓰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면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의 이익을 얻으면서 목적지를 향한 하루하루의 삶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바로 행복의 열쇠를 찾아내는 것이다.
심리학자 나다니엘 블랜든 행복과 즐거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즐거움은 사치가 아니라 절실한 심리적 욕구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즐거움을 추구해야 하며, 또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
나는 어떤 일이든지 그것이 나에게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 삶에 대한 의미’를 줄 수 있다면 그 일을 연료로 삼아 기꺼이 남은 삶을 불태울 것이다. 스티브 도나휴가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에서 말한 것처럼 산등성이를 정복하는 등반대의 삶이 아닌, 행복이라는 북극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목표지보다 가는 과정을 음미하는 사람)처럼 오늘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의미를 찾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