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정치 떠난 뒤 100일간 민심대장정 부딪치는 사람마다 "먹고살기 피곤하다"
배낭하나 ''달랑''... 여관 전전 정치사활 건 ''승부수'' 각오
대선주자들에게 2007년 대통령선거 시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여야 정당 모두 대선후보를 뽑는 경선에 국민이 참여할 문을 열어놓아 대선주자들의 대(對)국민 접촉면도 넓어지고 있다. 민생 현장에서 만난 대선주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인터뷰를 통해 전달한다. 기사 게재 순서는 대선주자들의 민생 방문 일정에 따른 것이다.
[홍성=황정미 정치전문기자] 장맛비가 전국을 휩쓴 16일 충남 홍성에서 만난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한 교회 예배에 참석 중이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검게 그을린 얼굴이 쉽게 눈에 띄었다. 여의도 정치를 떠나 ‘100일 민심대장정’에 나선 지 17일째. 교회 사람들과 어울려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는 홍성역 근처의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해 속보를 쏟아내는 텔레비전 소음만 있을 뿐 다방 안에는 손님이 없다. 주문을 받는 중년의 다방 주인이 아는 체를 안 하는 걸 보니 손 전 지사를 모르는 듯했다.
“이 정치 이대로 가면 희망 없다.”“주7일 강행군이 힘들지 않느냐”고 첫 질문을 던지자 그는 “쉬면서 사람들 만나는 건데 뭐가 힘드냐. 주위에서 건강 걱정을 하는데 마음이 편하니 병에 걸릴 일도 없다”고 했다. 장성, 해남, 보성, 고창 등 전라도를 거쳐 경남 진주 태풍피해 복구현장을 다녀온 뒤 충청도로 넘어왔다. 하루, 이틀 일정으로 배낭을 메고 지방을 순례하는 일보다 그를 힘들게 하는 건 그가 잠시 떠나 있는 ‘여의도 정치’가 아닌가 싶었다.
그는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5% 안팎의 낮은 지지율에 머물러 있다. 20%대를 오르내리는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그가 지사직을 그만둔 뒤 당으로 복귀하지 않고 ‘민심 속으로’ 뛰어든 것도 두 경쟁자와 달리 당내 지지기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해법’을 민생현장에서 찾아보겠다는 의도에서다. 지난 11일 대선후보 경선을 관리할 새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가 ‘박근혜-이명박 대리전’으로 치러진 건 그에게는 분명 실망할 만한 ‘현실’이었다. “하루종일 신문도 못 보고 딴 생활 하는 내가 굳이 얘기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조목조목 문제점을 짚었다. 그는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 변화를 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걸 느끼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농민들은 한미 FTA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난리다. 그 사람들은 한나라당 전대에서 누가 대표가 됐고 대리전을 치렀고 관심도 없다.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남북장관급회담이 결렬됐다. 민생은 민생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별도로 가고 있다. 퇴임 후 멀리 떨어져 정치를 보니, 우리 정치가 국민생활과 이렇게 관계가 없구나 싶다. 한나라당 전대가 국민 생활에 무슨 영향을 미쳤는가.”
하지만 앞으로 ‘본선’인 대선후보 경선이 가까울수록 후보 간 세 대결은 더 심해지지 않을까, 물었다. “그것이 계속 반복된다면, 거기에 아무런 국가적 주제나 과제가 없다면, 정치가 설 자리가 없을 테고 내가 (정치를) 할 필요도 없고…” 말끝을 흐렸다.
# “아직은 때 아니다. 절실한 때 오면 달라질 것.” 그는
원희룡,
남경필 의원 등 소장개혁파와 가깝다. 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한나라당이 미래지향적 모습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가능성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나라당이 앞으로 어떨 것이라고 평론할 게 아니라 내가 할 일이다. 그 방향을 만들기 위해 국민 마음을 읽고, 국민이 원하는 한나라당 모습을 그려가기 위해 지금 이 일(민심대장정)을 하고 있는 거다. 누가 한나라당을 대표하고 장악하느냐가 개혁과 혁신의 핵심이다.”
하지만 같은 목소리를 내온 소장파는 이번 전대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손 전 지사는 ‘전술적 오류’라고 지적했다. 소장파 모임인 ‘미래모임’이 세불리기에 급급해 당 혁신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소장개혁파가 줄 세우기, 세 불리기 등 구태 정치를 답습하면서 세력 하나를 형성하겠다는 식으로 해선 안 된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보여줬다고 본다”며 “세를 과시할 게 아니라 확고한 목표 의식을 갖고 뭉쳐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이번 전대 결과를 놓고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했다. 손 전 지사는 “이번 전대가 한나라당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획기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애당초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은 국민도, 당 내부도 절실한 때가 아니다. 한나라당이 두 번의 실패를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당의 얼굴로 누구를 내세워야 할지를 절실하게 고민할 때가 온다. 지금은 아직 구경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2007년 대선의 시대정신을 ‘디지털, 세계화, 통합’으로 꼽은 그는 “아날로그 시대의 패거리 정치, 땅따먹기 정치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얘기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천적 능력을 보여주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그건 국민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측우기, 훈민정음을 만들고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든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했다. ‘실사구시’는 그의 정책적 지향점이다.
# 길에서 만난 사람들그는 매일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간담회를 가지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질문에 대한 답을 “내가 며칠 전 만난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전언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처음 방문한 지역은 호남이었다. 한나라당의 최대 취약지인 만큼 물론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그도 부인하지 않았다. “호남이 제일 (경제적으로) 어려운 곳이니 문제를 먼저 살피자는 이유도 있고, 호남 민심이 소외돼 왔고 한나라당은 자기들을 살피지 않는다는 의식이 있으니까 (찾았다).”
그는 “순천에서 여수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어떤 사람이 날 알아보고 어떻게 왔느냐고 묻더라. 민심 살피러 왔다고 했더니, ‘에이, 표 주우러 왔죠. 여기 헛걸음 오셨다. 한나라당 표는 하나도 안 나온다’고 하더라. 개별적으로는 모두 친절하게 대하는데 개중에 진지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사실 여기 표는 없습니다. 그건 아셔야 합니다’라고 한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호남에서 최소한의 지지 없이 한나라당이 집권한다는 건 있을 수 없고, 반드시 호남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라면서 “호남 지역 발전을 적극 지원하고 호남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 한나라당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먹고살기 피곤하다”는 게 그가 접한 국민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손 전 지사는 “택시기사 몇 명이랑 얘기했는데 자기들은 대한민국에서 버려진, 방치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더라”고 걱정했다. 진주의 태풍피해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 청양 고추밭에서 만난 사람, 홍성의 양돈업자 등 그가 만난 사람들의 고민과 토로는 그의 수첩에 빼곡히 적혀 있다.
인터뷰·정리=황정미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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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 약력▲경기 시흥(59)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영국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 ▲
인하대·서강대 교수 ▲14·15·16대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