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HOW TO READ 데리다 How To Read 시리즈
페넬로페 도이처 지음, 변성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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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이해하겠다는 소망보다는 한 장이라도 세세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독서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으리란 소박한 욕심으로 시작한 까닭인지, 저자의 섬세한 설명과 역자의 명확한 번역은 오히려 예상보다 많은 부분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일조했다.

 

데리다의 저작들을 소개하면서 그의 문제 의식을 설명하고 사례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전개했기에, 데리다에 관한 밀도 높은 강의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데리다는 플라톤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을 고발하면서, 절대적 이상성, 자연성을 가진 순수성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순수성이 진짜 존재해서 갈망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하다고 하는 그 이데아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를 숨기기 위해 순수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독법을 가져야 하는데, 그 숨겨진 채 작동하는 구조와 장치를 탐색하기 위해 해체하고,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살펴봐야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약물에 의해 훼손되는 이상화된 자연적 신체는 존재하는가, 대리모 임신 등 기술에 의해 혼란이 온다고 믿어지는 모성은 정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인지 면밀한 검토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과 글에 대한 생각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데, 플라톤은 '진정으로 아는' 환상적인 이상을 설정하고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고 하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우리의 생각 자체가 어디서 들은 생각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반문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언어의 불멸성, 명확성 대신 혼돈 가능성, 애매성, 의미의 연기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

 

데리다의 이러한 해체하기는 단일성, 통일성, 일반성 등을 표방하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에도 날카로운 흠집을 내기 시작한다. 그는 관념상 한꺼번으로 추상화되고 일반화되는 그러한 말하기와 생각하기가 얼마나 폭력적인 구별짓기, 배제하기로 작동하게 되는지 설명하면서, 가령 사회가 다양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생각은, 개인을 아주 단순한 존재로 함축시키면서, 개인들간에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상충하는 믿음, 이해관계, 그 밖의 것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일순간에 사유의 영역 밖으로 몰아댄다는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독창성은 명료하게 전달되고 소통되는 언어가 가능한지 파고드는 데서 더 돋보인다. 예를 들어 개라고 읽는다고 해서, 모두에게 같은 '개'일 수 없다는 것이다. '개'라는 기호는 명확하게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종류의 연합, 치환, 결합 등에 의해서 다양한 '개'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화된 개념이라는 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무수한 관계와 네트워크 속에서 미분화되면서 발생한다는 것. 데리다의 방식으로 보고 읽으면, 각자가 바라보는 무한히 미분화되는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미분화된 그 세상들이 만나고 다독여져 적분화된 세상의 외연이 존재하는 것지만, 결코 그 외연은 동일하고 고정된 것으로 굳혀질 수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화되고, 각자만의 의미가 연합되고, 결합하며 발현되는 세계의 다양성과 충만성은 가히 상상이 안될 정도다.

 

데리다는 루소의 저작을 분석하면서, 그가 위계적이고 이항적인 대립에 천착하고 있는데, 자연에 대한 결여를 대리보충하는 방식으로 관념이 만들어진다는 의견에 반대하고 오히려 자연 안에 이미 타락과 오염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항을 뒤바꾸는 국면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항들이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선과 악, 높음과 낮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데까지 이르른다.

 

또 의사소통의 법칙으로 오해의 법칙을 채택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현대 의사소통의 수많은 효과들을 걷어내야한다고 주장한다. 의사소통이 실패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기술 발달에 따라 보여지는 효과, 즉 의사소통의 즉각성, 현존성의 환상을 벗어내고, 의사소통에 있어서 비이해, 비소통 등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SNS, 인터넷 등으로 끊임없이 소통하고 공동체가 확장되며 동일한 생각으로 이상을 꿈꾸고 있다는 착각이, 의사소통의 방해자라는 생각이 참신하다.

 

순수한 애도, 환대, 선물과 용서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것들은 무조건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오히려 불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타자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개방적이지 않은 우리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야만, 오히려 그렇다면 최대한 애도하고, 환대하며 선물하고, 용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탐색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최선의 방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성을 갖기에 애도하고, 환대하며, 선물을 주고, 용서한다고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면, 선물은 선물로, 애도는 애도로, 환대는 환대로, 용서는 용서로 간주되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풍부한 배경 지식 없이, 혼자서 제 수준대로 고군분투하느라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대목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또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없는지,  적극적으로 찾아보도록 독려하는 마중물 같은 책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데리다는 진보의 가치에 대해 믿지 않고, 진보를 희망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지속적인 이상들을 위해 무엇이 또는 누가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또한 생각해야만 한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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