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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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예전보다 힘을 잃었다고 해도 어느 순간 다시 문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다보면, 그 중 하나는 소설가의 역할도 하나의 답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위로하고 비극을 껴안게 하며 그 와중에도 인간성의 구현을 통해 다시 일어서고 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제사장이면서 치유자이자 철학자 같은 동시다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누가 있을까 싶을 때, 답안의 모서리에 희미하지만 확고한 모습으로 서 있을 이. 그는 소설가라고 자신있게 답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 밀란 쿤데라의 섬세하고 대답한 필치는 상상의 나래를 확고하게 뒷받침한다.


<농담>의 줄거리는 간단한다. 네 명의 화자가 각각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이들의 이야기가 맞닿아 마침내 퍼즐처럼 마추어지면서 서사로 모아지는 구조다.

 

주인공 루드빅은 대학에서 공산주의에 앞장서는 학생 연맹의 임원으로써 활동하다가 농담처럼 여자친구 마르케타에게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라는 편지를 보냈고, 이것이 발각되어 학교에서 쫒겨난다. 이 짧은 엽서로 그는 길 밖으로 추방되었고, 군대 생활이 시작된다. 탄광에서의 노동, 강압적인 병영 생활이 교차되는 일상에서 그는 한줄기 빛 같은 루치에를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데, 루치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성관계를 거부하고는 자취를 감춘다. 루드빅은 시대가 바뀌면서 나름 안정을 찾아가고, 우연한 기회에 복수를 위해 자신의 농담을 지렛대 삼아 곁길로 가도록 밀어버린 제마넥의 아내 헬레나를 유혹지만, 새로운 애인과 즐거운 제마넥을 마주치면서 복수마저 실패한다.

 

헬레나는 제마넥의 아내로 우연히 루비딕을 인터뷰하면서, 루비딕과 일탈을 감행하고, 그가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목적을 위해 접근한 것을 깨닫고 죽기로 결심하고 약을 털어넣지만, 그 약이 변비약인 바람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루비딕에게 발견된다.

 

야로슬로브는 체코의 민속 악단을 이끌면서 이 민속 음악이 재즈처럼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릴 뿐만 아니라 여러 의식들의 통합을 통해서, 구별이 아니라 연합을 구현하게 된다는 루비딕의 설득에 넘어가 민중 예술이 어느 곳에서든지 자리잡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공산주의 정부의 지원을 받아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공산주의 시대의 퇴색과 함께 빛바랜 낡은 환영처럼 퇴조하는 악단의 운명을 기마 행렬 의식의 날 똑똑히 목도한다. 의식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도망친 아들의 행방을 알고 쓸쓸해하던 그는 복수에 실패한 루비딕과 함께 연주를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킨다.

 

코스트카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공산당 총회에서 위험에 처했는데, 신앙에 대한 입장은 달랐지만 루드빅의 옹호를 받게 된다. 신앙을 지킨 그는 교화가 필요하다는 당국의 판단에 따라 국영농장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루치에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루치에가 특유의 순진함과 순결함에 대한 집착 때문에 성관계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집단 성폭행의 피해를 입은 후 트라우마가 생긴 사실을 알게 된다.

 

작가는 네명의 화자를 통해서 공산주의 시대의 암울했던 시대상 뿐만 아니라 농담처럼 일어난 일상의 무수한,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을 생생하게 맞추어냈다. 시대의 조류 속에서 여러 개의 얼굴을 하면서 분열적 모습으로 살아낸 이들의 모습은, 스스로를 속이고 기만하면서 시대에 걸맞는 모습으로 사는 것처럼 연기할 수 밖에 없는, 부조리로 내몰린 인간의 운명도  날카롭게 포착한다.

 

게다가 끊임없는 쉼표로 이어지므로, 뒤따르다보면 독자들의 숨까지 차도록 내모는 유려한 문장은, 각각의 주인공들이 처한 복잡미묘한 심경을 정확하게 묘사하는가 하면, 음울하고 음산하며 도무지 출구가 없는 것 같은 시대상의 냄새와 촉감까지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든지 <농담>을 읽고 나면, 밀란 쿤데라가 도무지 읽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데 모두가 공감할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되지 않는, 역사 저편의 낡은 이야기를, 꾸역꾸역 꺼내어 담담하지만 눈 치켜 뜨고 직면할 수 밖에 없도록 스멀스멀 포획하는 뛰어난 역량 때문에,  마지막 책장을 덮는 게 내내 아쉽게 느껴질 정도다.

 

나는 먼지 이는 보도를 따라 걸으며, 내 삶을 짓누르는 공허, 그 공허의 무거운 가벼움을 느꼈다. 루치에, 그 안개의 여신은 처음에 내 손에서 빠져 달아나 버리더니, 이제는 정확하게 미리 계획된 나의 복수를 허망하게 만들어버렸고, 이제는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에 대한 나의 회상조차도 어떤 비통한 조롱거리로, 무언가 알 수 없는 기괴한 올가미로 만들어버린 것이다...나는 그녀의 존재를 나에게로 곧바로 향해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내가 체험한 상황의 기능에 불과했다. 내 삶의 이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그 자체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모두 간과되었던 것이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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