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마스터 - 성경에서 배우는 리더의 시간관리
한홍 지음 / 비전과리더십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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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관리, 어쩌면 시간 경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시간의 활용에 대한 책은 넘치지만, 이 책의 특별함은 '성경'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시간 관리의 원칙을 제시하는 데 있다


서문에서는 '마스터'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는 주인으로서의 마스터 개념으로, 시간의 소유주인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은 시간을 임대받아 사용하는 관리인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어느 분야에서의 통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간을 만든 하나님의 매뉴얼대로 사용할 때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는 뜻을 함축한다.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이 만든 시간 관리의 핵심을, 성경을 통해 배우는 한편 이를 적용해 주어진 시간을 지혜롭게 활용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시간의 개념에서 먼저 전제할 것은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의 개념이 전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흥미롭게도 천체 물리학의 빅뱅 개념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하루의 개념이 마치 우주 연대기에서의 하루와 완전히 다르듯,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우리는 시간 속에 있지만,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시며 죄를 짓기 전 시간에 갇히지 않았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원래 모습으로의 회복, 즉 시간을 초월해 하나님과 연합하는 영원을 갈구한다는 점도 성경에 근거해 제시된다. 


이러한 조건 안에서 한계를 갖는 인간이기에, 시간 관리의 핵심은 영원을 위한 준비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데 초점을 맞추어져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푯대를 향해 나아갔듯이 우리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억하며 푯대를 향해 경주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시간 관리가 필요하며, 관리하지 않는 시간은 나의 약점에 할애되거나 주변의 공격적이고 주도적인 사람들에게 시간을 장악당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또한 급한 일들을 처리하는 데 시간을 쏟게 되고, 사람들이 칭찬하는 일에만 시간을 흘려 보낸다는 점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또 푯대를 향한 삶을 위해서는 단순한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관계, 언어, 미디어 등을 절제하고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쫓아가노라"고 했던 헬라어 원뜻은 '서두르다'라는 의미로, 강렬한 노력, 땀 흘림을 뜻하며 어느 좌표에 있든지 우리는  매 순간 업그레이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혼자서만이 아니라 주변인들이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고 동료, 가족 등을 챙기면서 함께 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는 점도 명징하게 제안하고 있다. 


한편 치열한 경주 속에서도 시간 안에 공간을 만들어 멈추고 비우는 훈련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야하는데, 특히 헨리 나우엔이 제안한 '희미해지는 훈련'이 눈에 띈다. 작아지는 것, 숨는 것, 약해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


소명을 알면, 보통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외롭지 않게 되며, 인간은 함께 함으로써 거룩한 교집함을 이루어나갈 수 있다고 단언한다. 특히 마지막에는 입산, 엘론, 압돈 등 세 사사를 예로 들어 인생이 풍성하고 능력 가운데 거해도 하나님의 뜻에 비켜 나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낭비의 시간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밀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져야 한다. 


짧은 생애 동안 하나님의 사명이 시간 관리의 기준이 되었던 예수님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에필로그에서는 마음 한 구석이 다시 묵직해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것 이상으로, 그 과정에서 서로를 축복하고 세워주기를 원하신다.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서는 아름다운 오늘이 필요한 것이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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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애플 스토리 - 한국어판 22만부 기념 영어원문 수록 특별판
IBLP 지음 / 아이비엘피코리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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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코닝 선교사가 7년 동안 뉴기니에서 선교를 하면서 분노를 다스리고, 진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실화를 다루었다. 


그는 파인애플이 먹고 싶어 원주민을 고용해 파인애플을 심고 과실을 얻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렸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다. 원주민들은 파인애플을 심으면서 품삯을 받았지만, 파인애플은 자신의 손으로 심은 것이니 자신들의 것이라며 파인애플을 훔쳐간다. 선교사님 입장에서는 도둑질이지만, 그들은 당당했다. 


화가 난 선교사님은 병원 문을 닫아 원주민에게 복수하기도 했고, 때로는 상점을 닫았다. 때로는 개를 길러 접근을 막았지만, 파인애플을 얻는 대신 선교 대상인 원주민이 떠나갔다. 


그러다가 안식년을 맞아 참석한 베이직 세미나에서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파인애플 밭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한다. 파인애플을 먹든, 그렇지 않든 주님의 것이므로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지 그대로 따르겠다고 결심하면서, 선교사님의 분노는 누그러들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원주민들은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 선교사님에게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그 이유를 묻는다. 파인애플 밭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자, 그 날부터 원주민들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것을 훔쳐서는 안된다고 각성한 원주민들은 자신들에게 나타나는 일상의 원인을 하나님에게서 찾기 시작했고, 신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청지기로서 역할을 재설정하자, 선교사님은 분노에서 벗어나 평안해졌고, 그의 변화는 강고했던 원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분노하고 대적하며 기어이 밀어뜨리면서 정작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신의 삶은 변화하지 않았는데, 아름다운 말로만 치장한 선교가 가능한 일인가. 하나님을 우선하는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 안에서 내가 변화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쳐 전도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기본이라는 것을 다시 일깨운다. 


화내지 않는 선교사님을 보면서, 드디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원주민의 고백이야말로 이 책의 키워드다. 

주님 이 파인애플 나무가 보이시죠? 이 열매를 먹으려고 지금까지 싸웠습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하며 내 권리를 내세웠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잘못임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잘못을 알았으니 이 밭을 주님께 드립니다. 이제부터 주님께서 주님의 파인애플을 제가 먹기를 바라신다면, 주님 뜻대로 제게 주십시오. 그러나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하시든 상관 없습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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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 언니 - 권정생 소년소설, 개정판 창비아동문고 14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 창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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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것들을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누군가의 삶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작은 시골 교회의 종지기로 평생 소박하게 헌신한 작가는, 인생과 삶을 관통하는 기독교적 주제의식을 <몽실 언니>룰 통해 보여준다. 도대체 사랑은 무엇이고, 관용이란 무엇인가. 현실을 불평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 그것은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가. 아니 현실을 타개할만한 대단한 지식이나 이론을 창출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주어진 삶의 무게를 버티어내는 것이 그것이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던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고,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건가. 


그러나 작가는 단언한다. 아주 자그마한 불행 뒤에도 큰 이유가 있으며, 몽실은 비록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전심으로 살아가는 여정 속에서 참과 거짓을 배우게 되었다고. 


뿌리를 흔드는 가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현실, 폭음과 폭행으로 점철된 결혼 생활에서 탈출해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떠나 새로운 터에 자리잡은 어머니. 빈한한 아버지와 그리고 새로 맞이한 새어머니,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는 다르지만, 몽실이 책임져야할 동생들. 사고로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된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동생들을 위해, 때마다 닥쳐오는 불행과 씨름하며 살아낸다. 


암죽을 만들어 동생을 기르고,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무료 치료가 가능한 자선병원으로 달려가며,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들을 맡는가 하면 구걸을 해서라도 먹을 것을 구하는 소녀 가장으로 산다. 성인이 된 후 꼽추와 결혼한 그녀는 새어머니처럼 아픈 동생을 살뜰히 챙긴다. 


민족의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산 몽실의 삽화를 읽다보면, 최고의 지식과 풍성한 부를 가지고 '나'를 위해 살고, '나'를 우선하면서도 왜 종국에는 허망해지고 비루해지는 현대인으로 살고 있는지 설핏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상황이든 사람이든 그렇게 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살며, 하루 하루 불평 불만하지 않고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한껏 지고 최선을 다해 사는 것. 몽실 언니를 통해 작가가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에게 싸움을 시키듯이, 도둑질도 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일을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까닭은 덮어놓고 도둑놈만 나쁘다고 욕하고 벌을 줍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몽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한 것과 나쁜 것을 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딴 데 시집을 간 어머니도 나쁘다 않고 용서합니다. 검둥이 아기를 버린 어머니를 사람들이 욕을 할 때도 몽실은 그 욕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나무랍니다. 몽실은 아주 조그만 불행도, 그 뒤에 아주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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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지식인마을 32
하상복 지음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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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서론에서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점이다. 근대의 주요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푸코와 하버마스의 상반된 견지를 중심으로 주요 내용이 전개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 독자가 독서의 필드를 짐작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저자에 따르면 푸코가 이성과 합리성이 일방주의적인 폭력이라고 이해한 반면, 하버마스는 그것들을 미래를 추동할 긍정적인 요소로 판단한다. 


외과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푸코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폴'로 정해졌지만, 자유로운 어머니에 의해 폴-미셸로 불리웠고, 훗날 스스로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폴'을 자신의 이름에서 삭제하는 등 반항의 인생을 구가한다. 일상의 외견에서 보여지듯 그는 정신병으로 규격화된 광기, 표준화된 성, 과학의 이름으로 포획된 해부학과 감시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통해, 이성과 합리성이 곧 세밀한 권력 장치가 되었고, 결국은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의 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학문의 역사는 연속, 계승, 진보가 아니며, 불연속, 단절, 반복이라고 규정하면서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에피스테메는 다양한 지식에 구조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관념 체계, 즉 학문을 관통하는 궁극적인 원리 또는 하부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각 시기를 규정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15-16세기는 유사성의 원리를 지향했고, 17-18세기는 표상, 즉, 동일성과 차이의 원리에 의해 분류하고 체계를 만드는 일람표 식의 학문이 발달하였으며, 표상을 통해 질서가 세워지면서 사물과 존재 사이의 간극이 생기는 재현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운동, 흐름, 변화에 주목하는 역사의 에피스테메가 등장하며 이것은 결국 언어, 생물, 경제학적 모델에 입각해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인간 과학을 지향하는 데 이르게 된다. 이러한 논의가 주는 함의는 결국 '과학', '실증'이 보편적인 학문이 아니라 19세기 에피스테메의 소산일 뿐이며 이러한 에피스테메가 변형되면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에피스테메의 변화를 고려하면,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와 지식이 실재와 일치될 수 없는데도 진리와 지식이 일치하고 있다는 중대한 착각을 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한다. 착각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푸코는, 언어 행위와 지식을 인간의 주체적 의지의 산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푸코는 말이나 글로 표현되는 진술, 즉 언표는 사회적 공간에서 실천되면서 기능이 발휘되는데, 존재의 출현과 제한의 가능성을 규정한다고 단언한다. 예를 들어 광인의 개념은 정신병자로서의 광인이 존재한 것이 아니고 정신병자가 곧 광인이라는 언어 행위가 사회적으로 실천되면서 만들어졌고, 이 언어 행위를 하는 행위자인, 특정한 사회적 위치를 가진 법률가나 의사, 즉 객관적인 사회적인 위치를 가진 이들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점을 포착한다. 또한 이러한 언표는 광인과 구분되는 이성을 가진 정상인을 상정하게 되므로 인접한 언표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존재하는 특징을 갖게 되고, 일종의 물질성까지 가지면서 하나의 사건이 된다는 점도 덧붙인다. 어제까지 즐겁게(?) 살던 정상인이었던 광인이 하루 아침에 정신병자로 분류되면서 비정상으로 전락하는 것. 


종합하면 근대의 에피스테메를 간과하면서 현재의 학문적 시각이 보편타당하다고 착각하면서, 과학적 지식을 갖춘 소위 객관적인 전문가들이 곧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다보니, 그들은 존재를 규정하고 배제할 권한을 갖게 되었고 이성으로부터 배태된 지식이 실제로는 진리와 간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미세하지만 대담한 권력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권력은, 지식과 담론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특정한 도덕률을 주조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며  피지배자인 객체 자체가 내면화를 통해 자기 통제를 하는 예속화를 따르게 된다는 점이다. 더구나 권력은 병원, 학교, 교소도 등 사회의 곳곳에서 다양한 장치를 통해 분산된 형태로 작동하는 일종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전문가 권력은 기존의 권력과 다르게, 기꺼이 피지배자가 따르고 확산시키며 그 토대를 굳건하게 구축해 나가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한편 하버마스는 구개 파열을 가진 채로 출생해 수 차례의 수술을 겪었고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 과정에서 거부나 배척을 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서구 사회의 이성이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속성만 가진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의 잠재성을 보여주는 근간이라고 생각한다. 


하버마스는 어떤 행동이 단순히 물리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특정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둘 이상의 존재가 있어야 하며 의미 전달을 위한 의사소통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분석을 통해서, 커피 하우스 등을 문예적 토론 뿐만 아니라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념과 가치가 형성되는 공간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과시적인 군주 권력의 정당성은 전통이나 권위가 아니라, 이해 관계를 공유하는 복수의 사람들이 모여 특정 사안 등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여론에 의하여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보았다. 


또 물질적, 정신적 조건의 동등성을 갖춘 교양인들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이 자신들이 마주한 사적인 영역의 문제들을 사적인 문제로만 축소하지 않고 공개 토론이라는 '공증'을 거쳐 여론을 주조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지만, 국가의 역할이 확대되고 국가의 개입이 만연해지면서 부르주아 공론장의 해체 위기가 촉진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점차 문화가 감각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상업주의에 편승하면서 가벼운 문화가 만들어지는 사이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성찰이나 토론은 증발하고 있고, 공론장의 주요 역할을 담당해야할 정당이나 의회가 본래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는 데서 문제가 더 증폭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근대인들은 특정한 형태의 도덕규범을 내면화하면서 스스로를 통제하는 종속적인 주체가 되었는데, 이를 해결할 보편적인 해결책은 없다고 단언한다.  다만 외적인 가치나 원리 대신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자신만의 도덕 규범을 만들어가는 윤리적 주체가 되어 자기 영혼에 침잠해 내적인 것에 집중해야 하며, 정념, 욕망, 환상 등에 노출되어 외적인 것만 따라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참된 자기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말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성찰을 해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 


하버마스는 사회적 영역은 체계와 생활 세계로 구분되된다고 주장한다. 체계란 본질적으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기능, 즉 행정과 경제를 담당하는 것이고, 생활 세계는 구성원들의 사회화, 통합, 문화 전승 등을 담당하며 교육, 문화, 종교적인 기능 등을 담당한다고 정의한다. 


체계는 사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물질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한 행위는 인간 도 하나의 자원으로 취급할 정도로 도구적이고 기능적일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생활 세계의 행위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차원으로 정체성, 내면화, 소속성 등과 관계된다고 본다. 


체계와 생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의 근본적인 원리가 다르므로 사용되는 언어의 성격도 다른데, 체계에서의 언어가 전략적인 반면, 생활 세계에서의 언어는 의미의 공유 및 주체성의 확인을 위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참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주체들끼리 개방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전략적 행위에 의한 합의가 아니라 실제로 타당성을 갖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생활 세계의 정치화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활 세계의 정치화를 통해 환경, 평화, 연대 등 일상의 가치들을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 운동이 표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짧은 책 안 담겨진 두 거장의 주장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무리일수도 있지만, '이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서로 비교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푸코의 주장과 하버마스의 의견이 교묘하게 교차되고 있다는 사실을 각성한 후 더더욱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느껴진다. 


다만, 푸코의 주장대로라면 자기 성찰을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버마스의 주장대로라면 생활 체계의 정치화를 가능하게 할, 소위 예전의 부르주아 같은 물질적, 정신적 동등성을 갖춘 계층만 의사소통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남는다. 물론 의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독자의 몫일 수 밖에 없겠지만. 


푸코는 이성이 근대의 유일한 사회적 원리가 되어 합리적이지 않은 다른 모든 원리는 부정적이고 무용한 것들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이성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바라봤다..하버마스는 근대의 이성은 푸코의 분석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 삶의 진보와 해방을 이끈 힘이라는 측면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대의 이성은 근대 문주주의의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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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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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된 세대들이 맞딱드린 불행은 서로를 이해할 단서나 기회가 줄고 있는데서 출발하지 않을까. 점점 좁혀지는 기회의 틈을 그나마 넓히는 것이 문학의 사명일텐데,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충실하다. 


시간 여행이나 서신 교환의 진부한 장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묘미는 부모와 자녀가 동일한 청소년으로서 만나는 접점을 따뜻하게 조명한데다, 편지의 시작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주인공들의 동일한 목표 의식 때문에 스릴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양면적인 스토리에서 기인한다. 


마침내 알게 된 부모님의 비밀을 통해 그 사랑의 깊이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청소년에게는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는 계기로, 부모님과 같은 어른 세대는 청소년이 겪는 외로움과 방황의 그 내밀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주는 묵직함에 가슴이 아련해진다. 

세상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특별한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거야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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