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 아퀴나스 : 신앙과 이성사이에서 지식인마을 26
신재식 지음 / 김영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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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모태 신앙의 강점은, 개인이 처한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판단 기준 없이 어려서부터 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다 보니, 신앙의 경로가 전체적으로 흔들림이 적다는 데 있을 것이다. 반면, 어떤 계기가 있어 각성하여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의 특성, 즉 치열한 반추나 감격적인 영적 경험이 부족할 수 있어 오히려 믿음의 성장이 더딜 수 있다. 어느 순간 저절로 주어진 교리를 그대로 체화하는 과정에서 이도 저도 아닌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이해'보다는 '믿음'을 우선하다 보니, 자칫 이성과 신앙이 배척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교리를 깊이 있게 생각해보고, 그 의미를 추적하는 것은 무언가 불필요한 절차처럼 여겨지는 부분도 분명 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믿지 않다니, 얼마나 불손한 신앙의 태도인가. 


그러나 바울은 세상을 꼼꼼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깨닫지 않을 수 없다고 단언했을 뿐 아니라, 첫번째 인간인 아담의 죽음과 의미, 두번째 인간으로 오신 예수그리수도의 부활로 영생을 획득하는 교리를 가르치면서 사고의 힘,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단순히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신앙을 공고히 하는데도, 저자의 주장처럼 어떤 믿음의 논리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기독교 교리를 해석하고 주요 각주를 만들어낸 주요 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사상적 차이를 비교할 수 있고, 기독교인들은 말씀의 정수를 더 깊이 있고 올곧게 이해하는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방랑의 세월을 보내다 암브로시우스를 만나면서 사상적 성장을 하게 되고,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유사성을 발견하면서 이를 기독교에 접목하고 발전시킨다. 신플라톤주의는 최상의 존재인 일자가 있으며, 정신인 누스, 영혼인 프시케의 3중 구조를 주장하는데, 아우구스티누는 이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일체와  비슷하며, 인간은 일자와 연합할 때 최고의 행복을 얻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이 인간 구원의 본질이라고 정리한다. 


동시에 신플라톤주의는 일자에서 유출되어 이 세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고 주장한 반면, 그는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스스로 존재하는 그 자체임을 강조했다. 또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주의 보편적 질서와 원리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이야말로 이성의 끝에서 신앙의 차원으로 도약하는 특별한 계시라고 주장한다. 즉 이성을 넘어서는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라며 데카르트와 유사한 주장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기도 한다. 인간의 감각은 불완전하지만, 지식으로 나아가도록 연결되는 매개체로써 현실의 세계를 인식하도록 도와주며,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도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인간을 알기 위하여 가시적인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신을 초월하는 단계를 거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제안기도 한다. 또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확고히 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알기 위해 믿는다'고 주장했다면,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목하여 이성을 토대로 한 신앙, 합리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은총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주장을 통해 신앙과 이성을 분리했으며 신학과 철학을 구분하는 데 생각의 기초를 제공한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창조의 결과인 세상을 통해서, 인간의 경험적인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최초에 움직이지 않는 부동자가 있는데 이가 하나님이며, 모든 원인의 제 1원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또 우연적 존재를 있도록 하는 필연적 존재가 하나님이며 사물의 가치와 완전성의 계층 속에서 최고의 완전성을 유추할 수 있는데 이가 하나님이고, 만물이 존재 목적이 있는데, 이러한 목적 지향성을 부여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의 사상적 비교뿐만  아니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간 사유의 최극단에 이르러 하나님이나 이상적 세계를 인식하고 유추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감각과 이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그 무언가를 지향했던 고대 또는 중세보다 현재의 철학과 논의가 더 풍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무엇이며,참 지식은 어떻게 인식하며 신이 있다면 인간과의 관계는 어떠한가와 같은 질문은 단지 고답적인 체 하는 허세일 뿐일까. 





 


흔히 종교와 과학을 두 개의 다른 지식으로 나누어서 생각하지만 반드시 분리된다고 할 수 없다...중략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단 한 가지로만 파악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는 것이다. 과학만이 진리라는 과학만능주의 또는 과학적 제국주의와 종교만이 진리라는 성서문자주의나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일은 우리를 광기와 무지로 몰아간다. 종교나 과학은 자연과 인간의 세계를 설명하는 각각 독특한 은유로서 이해해야 한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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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김민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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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름다움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문장의 수려함, 서사의 짜릿함, 매력적인 주인공 등 그 기원은 작품마다 특색 있고, 작가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감동은 매번 새롭고 다채롭게 변주되어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 


<투르게네프 단편집>이 주는 감동은, 사냥꾼인 주인공이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서정적인 자연과 소박한 삶의 풍광, 인간의 한계와 고뇌, 불행과 아픔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내는 사람들의 강인함을 담백하게 표현하는 작가의 역량에서 기인한다. 철학적 문제 의식을 점화해 문학적 장치로 고양하는 대신, 수기를 쓰듯 차분하고 평온하게 기록함으로써 더 큰 울림을 준다. 


이 책에는 <가수들>, <만남>, <베진 초원>, <산송장>, <숲으로의 여행> 등 총 5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각각의 작품은 모두 별개의 작품이지만, 사냥꾼인 주인공이 모두 겪은 내용으로 묶여 있어 실상은 하나의 장편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가수들>은 음악적 재능을 뽐내는 시골 주막 안의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다. 허름한 시골 주막 안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노래를 뽐내고 긴장하면서 모두가 함께 즐기는 모습이 그려진다. 


<만남>은 순진한 시골 아가씨인 아쿨리나와 귀족의 시종이면서,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빅토르 알렉산드리치의 이야기다. 이별의 선물로 아쿨리나가 수레국화를 엮어 가져오지만, 그는 그녀가 원하는 친절한 작별 인사도 없이 상관을 따라 도시로 가야한다면서 어깨 으쓱 한번 하고는 매정하게 떠나간다. 


<베진 초원>은 주인공이 길을 잘못 들었다가 만난 다섯 아이들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밤새 말을 지키는 아이들은 귀신, 물의 요정, 익사한 사람, 괴물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고단한 소임을 다한다. 안타깝게도 이 중 한 소년이 후에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소식도 전한다. 


<산송장>은 권정생 선생님이 극찬한 작품으로, 어느날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침대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루케리아의 이야기다. 그녀는 7년 동안 누워 지내면서도 자신은 눈과 귀가 멀쩡한 데다, 죄도 짓지 않게 된다면서 온종일 여러 생각을 하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고백한다.주인공인 사냥꾼이 병원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면서 속으로든, 소리를 내든 노래도 부른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그녀는 꿈에서 부모님도, 죽음도 만나는 환영을 보게 되는데, 몆 주 후 죽게 된다. 사람들은 그녀가 모든 것에 고마워한다고 전하면서 그녀가 죽은 날 5킬로미터가 넘는 교회에서 평일인데도 종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 


<숲으로의 여행>은 사냥꾼이 혼자서 숲에 떨어져 있으면서 인간이 사라져도 그대로일 자연 앞에서  인간의 고독함, 나약함, 우연성 등을 느끼게 되는 과정과 콘드라트, 예고르와 함께 사냥을 떠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특히 예고르는 근동에서 제일 가는 사냥꾼으로 다부진 체격의, 말수가 적은 이로, 아내가 계속 아프고, 아이들은 죽어갔으며, 소설 말미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암소마저 죽었지만, 이 모든 사정을 자신의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사냥꾼은 동물도 혼자 죽어가듯 인간도 생의 불행을 겪게 되더라도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예고르의 모습을 모면서 불행을 감출 줄 아는구나, 라며 감탄한다. 


작품을 다 읽고 나면, 평론가들의 주장대로 마치 수채화 연작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다. 산뜻하고 청명하지만, 그 안에서 쓸쓸함과 애잔함, 동시에 소박함과 웅장함을 동시에 맛본 것 같은 느낌.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 생생한 소리가 나를 놀라게 했고 나의 모든 존재를 기쁨에 들뜨게 했다. 실상 나는 알 수 없는 어두운 심연에 빠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사방이 적막했고 그 어떤 영원한 슬픔의 신음만이 나직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왔다...정신이 아찔해졌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친근한 부름 소리가 내게 들려왔다. 그 누군가 힘찬 손길이 단 한번에 나를 신의 세계로 끌어내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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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 - 텍스트로 콘텍스트를 사는 사람들에게
박양규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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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성경은 단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때로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고리타분한 옛 기록에 갇힌 문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성경 말씀을, 내가 사는 현실에 적용해 믿음으로 사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에 당연한 단견일런지 모르겠다. 더구나 저자의 진단대로 성경 속 영웅의 활약과 믿음, 그들의 위대한 신앙에 주눅이 든 탓에 때때로 현실의 초라한 믿음과 대비되어 더더욱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의 강점은 두드러진다. 첫째, 한 축으로는 성경 전반을 훑으면서, 현대 성도들의 주된 고민 12가지를 대비시킴으로써 어떤 신앙의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둘째, 성경의 주된 인물들 또는 영웅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아무개, 소수자 등에 집중하면서 직접 계시를 받지 않은 그들의 놀라운 믿음을 돌아보게 한다. 셋째, 직접 계시를 받은 영웅들과 달리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함께 했던 아무개들의 신앙처럼 우리도 해석하고 고민하며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넷째, 이러한 해석, 고민, 판단은 결국 말씀의 텍스트가 이루어지고 있는 콘텍스트를 이해해야한다는 점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다섯째, 신앙이 결국은 시대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짐을 자각할 수 있도록 여러 인문학적 장치, 예술, 사회학, 정치학, 문학 등을 접목시킴으로써 '인문학과 성경의 조우'라는 저작의 목표를 명확하게 달성한다. 


저자는 인문학으로 성경을 읽는 방법론으로 세 가지 방법을 차례대로 제시하고 있는데, 먼저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구조를 이해할 것, 그리고 벤치마킹을 할 것, 마지막으로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언어 간극을 좁히기 위해 공감사전의 코너를 제시하면서 공감하기를 시도한다. 


방법론에 따른 구조적 체계를 갖추고, 아담의 시대로부터 초대 교회 바울까지 12장의 각각의 내용에 인문학적 장치들이 드리워지면서, 당시 이름 없는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 성도들이 느꼈을 갈등, 고민, 감정 등이 매우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되살아난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 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조망하기에 어떤 믿음의 선택, 결단이 필요한지 현실적인 각성으로 이끈다. 


말씀을 어떻게 읽고,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그것도 제대로 배운 것 같아 감사하다. 

고대 시대에도, 조선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텍스트는 우리의 콘텍스트에 근간이 된다. 수많은 아무개가 그것을 의지해서 살았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현실을 극복해 나갔다면 우리도 아무개들처럼 하루를 사라 낼 것이다. 그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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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저 잘 살고 있나요? - 충분히 빛나고 있는 당신을 위한 일상 묵상
전대진 지음 / 넥서스CROSS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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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또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명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나님께 묻고 동행해야 한다는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말씀이 기도가 되는 기도보다는 지복을 구하는 기도가 익숙한데다, 내가 먼저 행동하고 말씀을 끼워맞추는 데 탁월하다보니 영성은 쇠퇴하고, 종교심만 충만해지는 게 당연했다. 


이 책은 조금이나마 이런 갈증을 해소하는 데 일조를 한다.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을 통해 자신을 읽어나가는 방식을, 짧은 글과 묵상을 통해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말씀은 저자 안에서 살아 그를 바꾸어 나가고 변화시키며 때로는 격려한다. 말씀이 흘러들어 자연스럽게 정화시키며 성장시키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듣게 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발견하게 된다. 


말씀을 곱씹어 나를 비추는 여정 없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간구하느라 바빴던 신앙 생활에 경각심을 주는 일침이다.

내가 상처받을 것을 각오하고 사랑하니 사랑 받은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영혼을 세우는 방법을 배운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잠언 말씀. 딱 맞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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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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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고, 그 거룩함에 놀라 가슴이 데인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진기하고 화려한 볼 것들이 많아지면서, 활자도 덩달아 기교가 더 늘다 보니 읽기에 탐닉하면 할수록 더 허기가 지기 마련이었는데, 선생님의 단정한 문장들은 그 자체가 힘이 있어 가벼이 날리지 않는다. 


일본 땅,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해방 후 우리 나라로 넘어왔으나 빈한한 까닭에, 가족들은 또 뿔뿔이 헤어질 수 밖에 없었고, 선생님은 평생을 괴롭힌 결핵 탓에 시골 교회의 종지기로 헌신하신다. 


불행이 상식이던 시대를 살아오시면서 겪은 아픔과 슬픔을, 꾹꾹 눌러 쓴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소소한 불평과 불만은 감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다. 단순히 선생님이 겪은 아픔이 너무 크니 지금 마주하는 삶의 문제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식의 일차원적인 논리 때문이 아니다. 


열여섯 소년이 이미 2번의 전쟁을 겪을 정도로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생애 내내 산문으로 써내려간  활자들을 추적하다 보면 우리의 현재 삶의 양식과 행동, 사고 방식이 어떻게 핍절되고  굴곡지게 되었는지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다. 거기에는 모멸감, 힐난 대신 안타까움, 긍휼의 마음이 드리워져 있다. 


그 마음은 꽃들이며 풀들, 벌레며, 나무들, 아이들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시선으로 확장되며 결코 흐려지지 않는다. 바른 삶에 대한 희구, 불행에 대한 긍휼, 하나님을 향한 대담한 사랑은 시로, 동화로, 작은 삽화들로 채워져 마음을 정화시킨다. 


선생님은 산업화, 독재 정치, 통일과 적대 등에 대한 소신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빌뱅이 언덕에서 겪은 삶의 경험, 주변에 대한 관찰 등을 통해 자신만의 사상을 구체화한다. 


소박하지만 정직한 마음, 몸의 연약함을 딛고 영혼의 소성까지 치받는 사고의 힘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기독교인으로 사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각성시킨다. 나를 넘어서서 우리까지, 인간을 넘어서서 자연 만물까지 확대하는 사유의 너비는, 쉽게 가늠할 수가 없다. 

나와 직접 간접으로 관계해 온 이웃들의 실망과 기쁨. 내가 그들에게 받은 실망만큼 나도 그들에게 실망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내 주위는 항시 조용하다. 아니, 조용한 것 같다. 그러나 소리없이 흐느끼는 영혼들의 울음소리로 내 귓전은 조용하지가 않다. 착각도 환청도 아닌 그 소리 때문에 나는 신경과민에 빠져 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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