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서론에서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점이다. 근대의 주요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푸코와 하버마스의 상반된 견지를 중심으로 주요 내용이 전개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 독자가 독서의 필드를 짐작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저자에 따르면 푸코가 이성과 합리성이 일방주의적인 폭력이라고 이해한 반면, 하버마스는 그것들을 미래를 추동할 긍정적인 요소로 판단한다.
외과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푸코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폴'로 정해졌지만, 자유로운 어머니에 의해 폴-미셸로 불리웠고, 훗날 스스로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폴'을 자신의 이름에서 삭제하는 등 반항의 인생을 구가한다. 일상의 외견에서 보여지듯 그는 정신병으로 규격화된 광기, 표준화된 성, 과학의 이름으로 포획된 해부학과 감시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통해, 이성과 합리성이 곧 세밀한 권력 장치가 되었고, 결국은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의 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학문의 역사는 연속, 계승, 진보가 아니며, 불연속, 단절, 반복이라고 규정하면서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에피스테메는 다양한 지식에 구조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관념 체계, 즉 학문을 관통하는 궁극적인 원리 또는 하부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각 시기를 규정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15-16세기는 유사성의 원리를 지향했고, 17-18세기는 표상, 즉, 동일성과 차이의 원리에 의해 분류하고 체계를 만드는 일람표 식의 학문이 발달하였으며, 표상을 통해 질서가 세워지면서 사물과 존재 사이의 간극이 생기는 재현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운동, 흐름, 변화에 주목하는 역사의 에피스테메가 등장하며 이것은 결국 언어, 생물, 경제학적 모델에 입각해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인간 과학을 지향하는 데 이르게 된다. 이러한 논의가 주는 함의는 결국 '과학', '실증'이 보편적인 학문이 아니라 19세기 에피스테메의 소산일 뿐이며 이러한 에피스테메가 변형되면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에피스테메의 변화를 고려하면,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와 지식이 실재와 일치될 수 없는데도 진리와 지식이 일치하고 있다는 중대한 착각을 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한다. 착각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푸코는, 언어 행위와 지식을 인간의 주체적 의지의 산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푸코는 말이나 글로 표현되는 진술, 즉 언표는 사회적 공간에서 실천되면서 기능이 발휘되는데, 존재의 출현과 제한의 가능성을 규정한다고 단언한다. 예를 들어 광인의 개념은 정신병자로서의 광인이 존재한 것이 아니고 정신병자가 곧 광인이라는 언어 행위가 사회적으로 실천되면서 만들어졌고, 이 언어 행위를 하는 행위자인, 특정한 사회적 위치를 가진 법률가나 의사, 즉 객관적인 사회적인 위치를 가진 이들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점을 포착한다. 또한 이러한 언표는 광인과 구분되는 이성을 가진 정상인을 상정하게 되므로 인접한 언표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존재하는 특징을 갖게 되고, 일종의 물질성까지 가지면서 하나의 사건이 된다는 점도 덧붙인다. 어제까지 즐겁게(?) 살던 정상인이었던 광인이 하루 아침에 정신병자로 분류되면서 비정상으로 전락하는 것.
종합하면 근대의 에피스테메를 간과하면서 현재의 학문적 시각이 보편타당하다고 착각하면서, 과학적 지식을 갖춘 소위 객관적인 전문가들이 곧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다보니, 그들은 존재를 규정하고 배제할 권한을 갖게 되었고 이성으로부터 배태된 지식이 실제로는 진리와 간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미세하지만 대담한 권력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권력은, 지식과 담론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특정한 도덕률을 주조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며 피지배자인 객체 자체가 내면화를 통해 자기 통제를 하는 예속화를 따르게 된다는 점이다. 더구나 권력은 병원, 학교, 교소도 등 사회의 곳곳에서 다양한 장치를 통해 분산된 형태로 작동하는 일종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전문가 권력은 기존의 권력과 다르게, 기꺼이 피지배자가 따르고 확산시키며 그 토대를 굳건하게 구축해 나가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한편 하버마스는 구개 파열을 가진 채로 출생해 수 차례의 수술을 겪었고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 과정에서 거부나 배척을 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서구 사회의 이성이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속성만 가진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의 잠재성을 보여주는 근간이라고 생각한다.
하버마스는 어떤 행동이 단순히 물리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특정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둘 이상의 존재가 있어야 하며 의미 전달을 위한 의사소통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분석을 통해서, 커피 하우스 등을 문예적 토론 뿐만 아니라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념과 가치가 형성되는 공간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과시적인 군주 권력의 정당성은 전통이나 권위가 아니라, 이해 관계를 공유하는 복수의 사람들이 모여 특정 사안 등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여론에 의하여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보았다.
또 물질적, 정신적 조건의 동등성을 갖춘 교양인들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이 자신들이 마주한 사적인 영역의 문제들을 사적인 문제로만 축소하지 않고 공개 토론이라는 '공증'을 거쳐 여론을 주조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지만, 국가의 역할이 확대되고 국가의 개입이 만연해지면서 부르주아 공론장의 해체 위기가 촉진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점차 문화가 감각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상업주의에 편승하면서 가벼운 문화가 만들어지는 사이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성찰이나 토론은 증발하고 있고, 공론장의 주요 역할을 담당해야할 정당이나 의회가 본래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는 데서 문제가 더 증폭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근대인들은 특정한 형태의 도덕규범을 내면화하면서 스스로를 통제하는 종속적인 주체가 되었는데, 이를 해결할 보편적인 해결책은 없다고 단언한다. 다만 외적인 가치나 원리 대신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자신만의 도덕 규범을 만들어가는 윤리적 주체가 되어 자기 영혼에 침잠해 내적인 것에 집중해야 하며, 정념, 욕망, 환상 등에 노출되어 외적인 것만 따라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참된 자기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말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성찰을 해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
하버마스는 사회적 영역은 체계와 생활 세계로 구분되된다고 주장한다. 체계란 본질적으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기능, 즉 행정과 경제를 담당하는 것이고, 생활 세계는 구성원들의 사회화, 통합, 문화 전승 등을 담당하며 교육, 문화, 종교적인 기능 등을 담당한다고 정의한다.
체계는 사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물질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한 행위는 인간 도 하나의 자원으로 취급할 정도로 도구적이고 기능적일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생활 세계의 행위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차원으로 정체성, 내면화, 소속성 등과 관계된다고 본다.
체계와 생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의 근본적인 원리가 다르므로 사용되는 언어의 성격도 다른데, 체계에서의 언어가 전략적인 반면, 생활 세계에서의 언어는 의미의 공유 및 주체성의 확인을 위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참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주체들끼리 개방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전략적 행위에 의한 합의가 아니라 실제로 타당성을 갖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생활 세계의 정치화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활 세계의 정치화를 통해 환경, 평화, 연대 등 일상의 가치들을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 운동이 표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짧은 책 안 담겨진 두 거장의 주장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무리일수도 있지만, '이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서로 비교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푸코의 주장과 하버마스의 의견이 교묘하게 교차되고 있다는 사실을 각성한 후 더더욱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느껴진다.
다만, 푸코의 주장대로라면 자기 성찰을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버마스의 주장대로라면 생활 체계의 정치화를 가능하게 할, 소위 예전의 부르주아 같은 물질적, 정신적 동등성을 갖춘 계층만 의사소통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남는다. 물론 의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독자의 몫일 수 밖에 없겠지만.
푸코는 이성이 근대의 유일한 사회적 원리가 되어 합리적이지 않은 다른 모든 원리는 부정적이고 무용한 것들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이성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바라봤다..하버마스는 근대의 이성은 푸코의 분석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 삶의 진보와 해방을 이끈 힘이라는 측면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대의 이성은 근대 문주주의의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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