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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ㅣ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평점 :
아침 자율학습 시간, 나는 한 바퀴 교실을 돌며 아이들을 살핀 뒤 교탁에 책을 펴고 서서 책을 읽는다. 보통 자습시간에 읽을 책을 들고 교실에 들어가는데, 오늘은 약간 지각을 한 탓에 헐레벌떡 교실로 달려가느라 책을 들고 가질 못했다. 주어진 자습시간만 때우고 다시 꽂아둘 요량으로 학급문고에서 아무 책이나 집어들었는데, 그게 바로 이 책 <마당을 나온 암탉>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에 푹 빠져 오늘 하루를 보냈다.
이 책은 바람과 햇빛을 한껏 빨아들이고, 떨어진 뒤에는 썩어서 거름이 되고, 결국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아카시아 나무 잎사귀처럼 뭔가를 하고 싶어 스스로 제 이름을 '잎싹'이라 지은 암탉이 주인공이다. 잎싹은 배불리 먹고 걱정없이 살 수 있는 양계장과 마당에서 도망쳐 제 스스로 알을 품어 병아리를 탄생시켜 보겠다는 갸륵한 꿈을 갖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
비록 몸이 망가져 스스로 알을 품어 병아리를 낳지는 못하지만 잎싹은 지성으로 아기오리를 보살피고, 족제비에 대항해 아기오리를 보호하려 애쓰며, 기어코 아기오리를 세상 밖으로 내보낸 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순순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갖가지의 등장인물(동물)과 에피소드는 어느 성인소설 못지 않게 섬세한 묘사와 감정처리, 깊은 통찰로 감동과 울림을 전해준다.
보통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면, 친구나 가족관계, 학습과 관련된 내용만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 책은 드물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하는 과정에 대해, 삶의 고통과 기쁨, 삶의 끝자락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철학책 못지 않은 사유의 깊이과 넓이, 그것을 동물로 의인화하여 표현해내는 실력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은 이 책이 읽는 내내 놀랍고 감동스러웠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나게 해 준 오늘의 지각이 감사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