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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아빌루 - 어부 나망이 사막 소녀 랄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김화영 옮김, 조르주 르무안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평점 :
발음하면 부드러운 휘파람소리가 날 것 같은 이 책의 제목은 작가가 만들어낸 밤꾀꼬리새의 이름이며 어부 나망의 배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새는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새로 변신한 아름다운 청년의 또다른 이름이다.
발라아빌루, 무슨 특별한 뜻이 담긴 말은 아닙니다. 'ㅂ'소리가 두 번, 'ㄹ'소리가 두 번 '아'소리가 두 번 되풀이되는 이 이름을 소리내어 보면 그 소리가 벌써 노래 같지 않습니까?
-옮긴이의 말 중에서
나망의 배는 오늘 수리를 위해 바닷가 모래톱에 엎드려 있다. 어부 나망은 주문처럼 그 배의 이름을 반복해서 발음하며 옛이야기를 기억해내기 시작한다.
'아주 오랜 옛날 옛적이었지. 나도 우리 아버지도, 심지어 우리 할아버지도 살아 본 적이 없는 옛날 옛적의 일이란다. 하지만 그 옛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두들 잘 알고 있어.'
이렇게 시작하는 나망의 이야기 속에서 아름다운 공주가 살아나고, 그 공주를 사랑한 젊은이가 생생하게 살아난다. 독자는 어느새 나망도 랄라도 잊고 공주와 청년이 살았을 먼 왕국으로 또다른 이야기 속으로 떠난다. 모래바람이는 언덕이 단숨에 머나먼 동방의 어느나라의 공주가 묶여있는 숲으로 변한다. 옛날이야기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어느 왕이 있고, 딱 하나뿐이어서 더욱 아름답고 더욱 소중한 공주가 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깝게도 공주는 숲의 동물들에게 재물로 바쳐져야하는 운명에 희생될 위기에 처한다. 안타깝고 아름다운 만큼이나 더욱 가슴졸이게 하는 해결사가 나타난다. '발라아빌루'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의 주인이다.
우리도 어렸을 적에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옛이야기를 들었었다. 아이들이 아이들처럼 놀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놀이의 한 부분이며 교육의 한 부분이었다. 그 잊혀진 풍경이 이 책 속에서 재현된다. 어부 나망은 부지런히 배를 수리하며 옛이야기를 풀어낸다. 그의 손으로 그가 오랜 세월 익혔을 삶의 지식을 말해주고, 그의 입으로는 먼 옛날 부터 내려온 아름다운 전설이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고 있다.
르 클레지오의 다른 작품, '사막'에 나오는 '랄라'를 주인공으로 해서, 또 한편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오래전 '사막'을 읽으면서 느꼈던 사막의 모래바람이 다시 느껴졌다. 이 책을 읽으며 모르고 있었던 랄라의 행복한 시절이야기 한 토막을 전해듣는 듯해서 행복했다. 랄라가 도시의 바람 속을 헤매일 때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이 작품은 이야기가 아니라 한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모래언덕의 웅크린 곳에 연기를 피우고, 그 불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피어난다. 작품의 시작부분에서 꽤 많은 페이지가 강렬하고도 아름다우며 시적인 불의 이미지에 할당되고 있다.
김화영선생님의 번역이라서 더욱 믿을 수 있는 아름답고 시적인 언어들을 만날 수 있다.
'해질녘은 낮과 밤이 바뀌려고 하는 시간입니다. 휴식과 상상과 꿈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 모든 복잡한 것들이 다 지워지고 오직 물, 불, 공기, 땅, 이렇게 세상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네가지 요소들만 남아 있습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저자의 글만큼이나 아름답고, 작품 속의 상징을 읽어내 우리에게 알려주는 김화영선생님의 옮긴이의 글도 좋다.
작품의 이미지를 잘 표현해낸 섬세한 일러스트도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