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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카뮈 전집 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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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이었다. '번개를 잉태한 폭풍우'에 흠씬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흡사 '황야의 이리'처럼 한 권의 책도 사지 않은 채 하루종일 그 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나의 사춘기는 이렇듯 기묘한 형태로 그 서막을 연주하였던 듯 싶다.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해 가는 나의 육체, 그리고 도저히 비집고 들어가 고쳐 보려 해도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았던 어른들의 세계,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균열은 금새 파열로 이어졌고 언제 세상이 무너져 내릴 지 모를 암담함 속에서 나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내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나 이룩해야 할 목표라는 것은 사치로 여겨질 만큼 난 어리석었다. 난 어리석었고, 메말라 있었고, 굶주려 있었다. 누군가 장난으로라도 툭치면 이빨을 한껏 드러내고 달려들 만큼 나는 야만적이었다.

이런 내 손에 우연히 잡힌 한 권의 책이 있었으니 그것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이었다. 나는 이 책을 사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상의 속에 재빨리 숨겼다. 그리고 그대로 서점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점원이 쫒아 나와 경찰서로 끌고 갈 것만 같아서 계속 심장은 방망이질을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이 최초의 모험이 대단한 승리처럼 여겨졌고 엄청난 희열감을 안겨 주었다. 결국 이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 채 나는 이후에 몇 번이나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중독된 것처럼 서점에 들어가면 훔칠 것을 반사적으로 계획했다.

상한 숭늉 냄새를 풍기는 벽지에 무너질 듯 기대 누워 읽으며, 나는 심한 구역질을 느꼈다. 그것은 내 영혼 속에 또 다른 자아가 생겨나면서 시작된 불가피한 입덧이었다. 니체의 말처럼 독서는 분명히 시작부터 내게는 죄악이었으며, 독서란 남의 자아에 끊임없는 관음증을 품는 일이었을 것이다. 책의 내용을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더 그 잔여물들은 내 내부에 깊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책은 위안이나 휴식이라기 보단 정신의 가혹한 고문에 가까웠다. 그러나 나는 이후에 겨우 한 가지 나의 목적을 깨달았다. 일상의 균열을 뚫고 파열을 뒤로 한 채 무한으로 치달을 것, 고통으로 점철된 현실의 진공관을 뚫고 희미한 빛을 향해 광속으로 직진할 것... 더 이상 나는 그 밖의 것을 중요하게 여길 수 없게 되었다.

한때 나는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어떤 책을 찾아내거나, 우연히 발견했을 때, 이 '사건을 통해' 내 정신은 비약해서, 너무나 현명해진 나머지 복잡한 미궁 속에서도 금새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책들과의 만남으로 내 정신은 일상의 궤도를 이탈하고, 우주의 섭리를 관통하며, 미지의 행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거대한 착각이었다. 이 때 책은 단순히 오락이나 경험의 수단이 아니라 정신의 법열로 가는 비밀스러운 열쇠였다.

그런데 이러한 발상은 망구엘 선생의 말대로 '미신적인 악덕'인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지나치게 믿고 숭배하는 미신에 가까운 신앙의 한 양태였을 것이다. 과거형을 쓴다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정도가 약화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믿음은 그리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그렇게 책을 읽음으로써 나는 여전히 '이방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내게 있어 책 읽기가 '죄악처럼'이 아니라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 지위가 결코 유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홍의' 증표를 내 목에 기꺼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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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 삼성세계사상 34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 삼성출판사 / 199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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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적 사고는 변화하는 것에서 변치 않는 것(本質-substance)를 가려내는 눈이 있을 때만 효과적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희랍의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B.C5)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질서는 영원하며, 끊임없는 불꽃은 어느 때는 성하고 또 약해지기도 한다. 불의 변화는 기름, 불꽃, 연기로 측정되며, 로고스는 그 변화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순수한 불은 하늘에 빛나며 하늘을 채우고, 그 중 일부는 내려와 바다가 되고 또 일부는 대지가 된다. ---세계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하나의 질서를 유지한다.』

한편, 불교에서도 '모든 것은 변한다'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주장하고, 그러면서 변치 않는 존재의 본질을 공(空)이라고 말한다. 변화 속이 불변이 진리는 그 구조(構造)를 말한 것이다. 뜻 있는 구조의 본질을 찾는 것이 구조주의자의 목적이었고 이런 맥락에서 위대한 철학자와 종교가에겐 구조주의적 경향이 있는 거 같다. 레비 스트라우스는 결혼의 구조를, 촘스키는 언어구조를, 수학자 아벨은 군(群)의 구조를 찾아냈다. 이를 통해 저마다 생물의 유형, 문화의 패턴, 수학적 구조에 의의를 찾는다. 그 작업은 널리 이용되어 모든 좌표(座標)와 변환(變換)을 뚫고 넓은 공간 속에서 변화의 의미를 과시한다.

<슬픈 열대>는 레비 스트라우스의 본격적인 이론서는 아니다. 그가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행했던 인류학 조사 과정을 사소한 것까지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책을 일종의 모험서로 받아들인다.

모험은 미지의 곳으로의 여행과 낯선 이들, 그리고 새롭게 만나는 자연과 알게되는 인간에 대한 지식,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새로워지는 나를 발견하는 데 그 가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책은 허구의 모험소설이 갖지 않은 진지함과 동시에 장식되지 않은 거친 문장 속에서 저자와 함께 그 모험의 전 과정을 함께 하고 싶은 자들에게는 꼭 권하고 싶은
것이다.

이 여름 꼭 여행을 가고는 싶은데 가난하여, 혹은 시간이 없어, 혹은 동행인이 없어 망설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저렴한 가격으로 탄력적인 시간 운용을 통해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여행을 떠나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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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
미셸 뚜르니에 지음, 황보석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8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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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동방박사를 죽였는가?

누구나 구약을 읽었다면, 혹은 크리스마스 때라도 바자회처럼 열리는 교회에 들락거려 봤다면 이 동방박사를 모를 리 없다. 어린 시절 나는 교회에 매우 열심히 다니는 편이었는데, 나중에 좀 시들어 졌어도 크리스마스 때는 잊지 않고 교회에 가곤 했다. 물론 그 날은 특별하게 헌금 없이도 달콤한 것들이 입안을 녹여 주는 황홀하면서 열린 축제의 한마당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항상 유치부나 아동부 아이들은 성탄절을 위해 연극을 연습해서 올렸다. 그들은 예수가 탄생하는 바로 그 상황을 매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 때 나는 그 연극을 보며 '동방박사는 왜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것일까?'라는 아주 당연하지만 사실 당연하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솔직히 동방박사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리라는 것에서부터, 아기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라는 사실도......그런데 그런 사실을 모두 명약관화하게 알고 있었던 지금 막 태어난 애숭이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나는 의문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니는 것은 어찌 보면 초등학교 입학의 예비 과정처럼 보편화 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참으로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생각들의 단초를 이미 훈련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기독교가 내게는 의문부호 투성이었다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가져왔던 회의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저항할 수 없는 경외보다는 한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권력을 싸고 도는 교회안의 교리 주의자 혹은 그 권력에 빗대어 시대와 사회를 교정해 보려는 교정 주의자들의 노력이 참으로 무모하고 덧없어 보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여기서 왜 동방박사가 예수에게 몰약과 보석 등을 바쳤는지 파헤쳐 보려 한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사실은 일이 거꾸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가 태어난 것과 동방박사의 존재는 무관하다.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를 경배한 일도 경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후대에 예수를 숭배하는 자들은 그럴 필요도 있었고 그래서 없었던 일도 꾸며야 했다. 그래서 일이 그렇게 이상스럽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권위와 지식 그리고 예지력(점술가) 같은 것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 시대에 이미 활발했던 동방-여기서 동양은 중국, 일본, 한국, 인도차이나 반도 같은 동북서 아시아가 아니다. 이란, 이라크 등 소위 중앙 아시아를 지칭한다.- 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문명 파우어를 실감하고 있었으므로, 동방의 메스터로 하여금 그들의 교주를 떠받들게 함으로서 그 권위의 기강을 한 층 높게 쌓으려 했던 것이다.

각설하고, 투르니에의 소설로 돌아와 보자. 이러한 의구심들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 보면 더욱 재밌긴 하다. 투르니에는 상상력만으로 동방박사를 재창조해 내고 있다. '방그리디, 태평양의 끝'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무한한 상상력으로 데포의 소설을 재구성한 것 처럼, 구약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사라져 버린 그 동방박사를 누가 죽였을까? 아주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며, 동시에 필요한 생각이기도 하다. 서양의 강력한 기독교 문명에 시들대로 시들어- 사실 절멸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절멸시키는 것이 식민주의의 기본 원칙은 아니다. 그들은 죽이지 않고 부릴 만큼은 살려주길 좋아하니깐-버린 동양의 화려했고 찬란했던 문화와 문명, 그것은 다름아닌 동양인들이 의당 가져야할 스스로의 문명에 대한 자긍심이다. 서양인인 투르니에가 동양인보다 먼저 해버린 이 얘기가 정말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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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일기
체 게바라 / 거리문학제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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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체 게바라의 마지막 일기를 번역한 것이다. 66년 11월7일부터 67년 10월7일까지, 즉 그가 체포되기 전날까지 日記는 이어진다. Che Guevara란 이름에서 'Che'는 스페인語로 '어이 친구'정도에 불과하다. 그의 本名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다'란 비교적 긴 이름이다. 이 일기는 그의 이름이 왜 Che일 수 있는 가를 말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사르트르란 대철학자도 탄복케 할 수 밖에 없는 숭고한 요소이다. 그것은 humanity 즉, 한 사람의 지성인이 진짜 인간이기 위해서 벗어 던지고 있는 모든 것이다.

허세와 자만, 아전인수(我田引水)의 술수, 선동과 세뇌의 웅변, 자아도취, 극단적 이기주의.. 그 많은 껍데기로 둘러싸인 지성인이란 지위에서 뚝 떨어져 나와 humble한 사람들과 나란히 어깨를 걸치고, 한결같이 웃고 있는 명랑한 소년 같은, '어이 친구'란 사나이를 알게 되고, 그제야 자기 가슴을 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다'라고! 이 일기책은 유난히 Che의 사진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이 사진들은 그의 빼곡한 일기만큼이나 많은 사실들을 말해준다.

우선 그가 단벌의 사나이란 점, 거의 외모 특히 옷에 대해 무신경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군인의 신분이었다는 점, 그것도 정규군에 속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언제나 빨치산 신분이었을 뿐이다. 그의 군복이 두벌이거나, 그의 장화가 깨끗하게 손질돼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게릴라가 아닌 것이고, 그에 대한 모든 神話는 깨져야 할 것이다. 모든 일기 글은 매우 절제돼 있고 간결하다. '感情'이란 것은 최대로 아끼고 아끼다가 정말 더 이상 아낄 수 없을 지경이 돼서야 내보인다. 잔뜩 흐린 날씨 중에 언뜻 비치는 햇살만큼이나 안타까울 만치 明徵하다.

그리고 그 감정의 吐露는 독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놓았던 연민의 腺을 자극한다. 부모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풍차에 대항하고, 창녀를 공주로 모시며, 허약한 로시난테의 등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가던 돈키호테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 연민은 우리가 세르반테스가 만들어낸 주인공 돈키호테에 대해 어떠한 미움이나 조소의 감정도 가질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다. 어쩌면, 체의 핏속엔 그의 전세기 사람이었던 세르반테스란 인물이 가졌던, 세상에 대한 낭만적 이상주의, 버릴 수 없는 스페인적 기질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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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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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부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서점에 들어가면 반드시 책 한 권은 꼭 옷 속에 숨기고 나와야 직성이 풀리기 시작했다. 사실 어떤 때는 두 권이나 세 권까지로 늘어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한 권을 훔친 후에 안전한 곳에 숨겨 두고 다시 들어와 또한 권을 훔치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어서' 혹은 '책 도둑질은 도둑질도 아니다'란 말을 실험하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거리에 나가면 수 만가지 나를 유혹하는 물건들이 있었다. 책을 훔칠 때 나는 그 물질 문명의 어느 부분을 취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모든 것에 그렇듯 책에도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유형의 것은 이른바 바코드로 상징되는 그 책의 물리적 형성 과정과 시장경제에서 유통되는 기호인 가격 등이다. 무형의 것(내용,가치)에 견주어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판단되거나, 대중적이지 않아 나 정도나 그 가치를 발견할만하다고 판단된다면 서슴없이 그 책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이 행위를 영웅주의로 환원시킬 만한 사람은 내 주위의 껄렁한 반항아들 뿐이었다. 모범생들이라면..솔직히 그들은 나를 경찰서에 신고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보니, 많은 지식인들이 이 책을 매우 긍정적이며 높게 평하고 있다. 그 내용상에서 일본, 중국, 한국에 대한 것이 취약하거나 일부 잘못돼 있는 것은 그러나 꼭 짚어 봐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인문학서는 매우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외국판에는 너그러운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번역판에서 빠진 것으로 보이는데, 작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는 정말 유례가 없는 실수로 보인다. 그리고 역자 후기 같은 것도 몇 장이나마 배려했으면 좋았을 테고, 본문 내용처럼 저자가 독자의 페이지로서 할당한 그 면을 실제로 번역판 안에도 실현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주석과 백과 사전식 내용을 담고 있는 교양서인 만큼 인덱스를 반드시 달아 놓아야 했다. 내 생각에 이 모든 것이 출판사 측에서 종이 몇 장을 아끼려고 했던 것으로밖에 안보이다.

그리고 언론에서 번역판을 선전해 줄 때는 반드시 내용면에 있어서는 몇 점이며, 형식면에서는 몇 점 정도 된다고 명기해 줬으면 좋겠다. 보니, 한결같이 문예부 기자님들은 평론가들뿐이다. 작가의 말을 인용, 차용하면서 작가인 듯 뽑내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작가가 이미 한 말들을 좀 양념을 첨가하여 섞는 차례만 좀 바꿨을 뿐, 소작가연하는 태도는 저널리즘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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