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박사
미셸 뚜르니에 지음, 황보석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8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누가 동방박사를 죽였는가?

누구나 구약을 읽었다면, 혹은 크리스마스 때라도 바자회처럼 열리는 교회에 들락거려 봤다면 이 동방박사를 모를 리 없다. 어린 시절 나는 교회에 매우 열심히 다니는 편이었는데, 나중에 좀 시들어 졌어도 크리스마스 때는 잊지 않고 교회에 가곤 했다. 물론 그 날은 특별하게 헌금 없이도 달콤한 것들이 입안을 녹여 주는 황홀하면서 열린 축제의 한마당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항상 유치부나 아동부 아이들은 성탄절을 위해 연극을 연습해서 올렸다. 그들은 예수가 탄생하는 바로 그 상황을 매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 때 나는 그 연극을 보며 '동방박사는 왜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것일까?'라는 아주 당연하지만 사실 당연하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솔직히 동방박사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리라는 것에서부터, 아기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라는 사실도......그런데 그런 사실을 모두 명약관화하게 알고 있었던 지금 막 태어난 애숭이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나는 의문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니는 것은 어찌 보면 초등학교 입학의 예비 과정처럼 보편화 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참으로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생각들의 단초를 이미 훈련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기독교가 내게는 의문부호 투성이었다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가져왔던 회의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저항할 수 없는 경외보다는 한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권력을 싸고 도는 교회안의 교리 주의자 혹은 그 권력에 빗대어 시대와 사회를 교정해 보려는 교정 주의자들의 노력이 참으로 무모하고 덧없어 보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여기서 왜 동방박사가 예수에게 몰약과 보석 등을 바쳤는지 파헤쳐 보려 한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사실은 일이 거꾸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가 태어난 것과 동방박사의 존재는 무관하다.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를 경배한 일도 경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후대에 예수를 숭배하는 자들은 그럴 필요도 있었고 그래서 없었던 일도 꾸며야 했다. 그래서 일이 그렇게 이상스럽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권위와 지식 그리고 예지력(점술가) 같은 것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 시대에 이미 활발했던 동방-여기서 동양은 중국, 일본, 한국, 인도차이나 반도 같은 동북서 아시아가 아니다. 이란, 이라크 등 소위 중앙 아시아를 지칭한다.- 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문명 파우어를 실감하고 있었으므로, 동방의 메스터로 하여금 그들의 교주를 떠받들게 함으로서 그 권위의 기강을 한 층 높게 쌓으려 했던 것이다.

각설하고, 투르니에의 소설로 돌아와 보자. 이러한 의구심들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 보면 더욱 재밌긴 하다. 투르니에는 상상력만으로 동방박사를 재창조해 내고 있다. '방그리디, 태평양의 끝'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무한한 상상력으로 데포의 소설을 재구성한 것 처럼, 구약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사라져 버린 그 동방박사를 누가 죽였을까? 아주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며, 동시에 필요한 생각이기도 하다. 서양의 강력한 기독교 문명에 시들대로 시들어- 사실 절멸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절멸시키는 것이 식민주의의 기본 원칙은 아니다. 그들은 죽이지 않고 부릴 만큼은 살려주길 좋아하니깐-버린 동양의 화려했고 찬란했던 문화와 문명, 그것은 다름아닌 동양인들이 의당 가져야할 스스로의 문명에 대한 자긍심이다. 서양인인 투르니에가 동양인보다 먼저 해버린 이 얘기가 정말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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