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들
최수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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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들>은 문지사에서 나온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대부분 문지사가 간행하는 격월간지에 발표된 작품이란 얘기다.

최수철은 캐나다 체류중인 괴짜 작가 ''박상륭''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주로 ''도플갱어''란 주제에서 그렇다. 도플갱어는 주지하다시피 수많은 소설의 모티브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이 탐닉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분신들>에는 수많은 도플갱어들이 도착적으로 얽혀 있다. 소위 후기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군상은 어쩌면 근본적으로 비슷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허름한 술집에서 혹은 따닥따닥 붙어있는 연립 주택에서 당신은 누군가를 스친다. 피로와 자기연민으로 쩔어있는 당신의 시선 안으로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사소한 순간 당신은 바로 그들의 피로와 자기 연민의 냄새를 맡고, 어쩌면 그들이 당신의 또 다른 모습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이러한 주제를 노골적으로 그리고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소설집의 마지막 소설인 ''분신들''이다.

한 사내가 다리 위에서 토막 시체를 버리다 잡힌다. 그는 잡히기 위해서 그렇게 대놓고 시체를 유기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분신들이 끊임없이 자라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살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진술을 끊임없이 경청하던 담당 검사는 자신이 그의 또 다른 ''도플갱어''란 끔찍한 사실을 깨닫는다. 

비교적 최근에 발표된 최수철의 <페스트>는 <분신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분신들에서 보여 준 세계는 더욱 더 어두워져 있고, 이 사회의 소시민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서로 경쟁하듯이 목숨을 끊는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이 사람은 저 사람에 의해 대칭이다. 마치 분신들이 페스트의 대칭이듯이. 분신들은 서로 대칭적으로 행복하며 또한 불행하다. 그들 삶의 합은 산술적 합이 될 수 없으며, 단지 공명을 이룰 뿐이란 사실이 분신들을 아름답게 혹은 끔찍하게 채색하는 여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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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yage Au Bout De LA Nuit (Paperback)
Louis-Ferdinand Celine / Gallimard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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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ellebecq led me to monsieur Celine who is one of the most notorious writer through the era of modernism. here putting on few sentences taken from the book.

 

"In this world we spent our time killing or adoring, or both together. 'I hate you! I adore you!' We keep going, we fuel and refuel, we pass on our life to a biped of the next century, with frenzy, or any cost, as if it were the greatest of pleasures to perpetuate ourselves, as if, when all's said and done, it would make us immortal. One way or another, kissing is as indispensable as scratching." (from Journey to the End of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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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프랑스 책방
마르크 레비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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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페낙에게 파리의 13 구역 벨빌이 영감의 무대라면, 마르크 레비에게는 런던의 프랑스인 구역, 개구리 골목이 이에 대응 될 만 하다. 페낙의 벨빌이 파리의 최하층민들이 모인 멜팅 팟(melting pot)이라면 레비의 개구리 골목은 나름대로 순혈통주의를 고수한다.

 

프랑스 레스토랑 주인인 이본, 플로리스트 오드리, 건축가 앙투안이라는 막강한 라인업에 정말 못 하는 일 목록을 늘리기 위해 안달하는 것만 같은 사고뭉치 마티아스가 전입신고를 하면서 이들의 영국령 프랑스촌은 더욱 풍성해진다.

 

건축가 경력을 지닌 작가의 자아는 단짝 친구인 앙투안과 마티아스에게로 절반씩 이입되는 듯, 하나는 건축가로 또 다른 이는 프랑스 문학 애호가로 창조된다. 마티아스는 영어도 거의 못하는 골수 프랑스인이지만 앙투안은 영국에 온 이유가 아들을 옥스퍼드에 입학시키기 위해서라고 당당히 말한다.

 

경쟁과 명문대학을 선호하는 영국식 가치관과 문학과 평등교육에 대한 지지를 담은 프랑스식 가치관의 충돌이랄까. 개인적으로 나는 영국식 유머와 프랑스식 성찰을 좋아하지만, 이 책의 넘쳐나는 대사는 어떤 스타일인지 딱히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재치 있는 유머로 가득하다는 점은 장담할 수 있다. 여하튼 뭐라 딱 꼬집어 이를 수 없는 행간의 여백은 단연 프랑스식이라고 할 만 하다. 

 

 런던과 파리, 내가 생각하기엔 도버 해협 너머 지척이지만 조금이라도 자기의 연고지를 떠나 살고 싶은 '먼 곳에 대한 그리움(fernweh)'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뭍으로 돌아온 따개비들처럼 그들은 다시 안락한 공간, 제 2의 고향으로 모여들고 친숙한 언어로 떠든다.

 

 그곳엔 터줏대감으로 살면서 그림자처럼 그들의 안위를 살피는 밥 퍼주는 여인 이본이 있고, 당신이 어려울 때 속마음을 털어내도 될만한 속 깊은 이성친구 오드리도 있다. 이 두 여인의 따뜻하고 인내심 있는 비호 아래 철부지 두 남자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연애를 꿈꾼다.

 

 동네의 작은 서점은 물론이고 대형서점까지도 인터넷 서점에 잠식당하는 요즘, 마티아스의 작은 프랑스 서점은 또 다른 면에서 향수를 자극한다. 자신의 관심사인 책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공간, 작가와 책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서로 책을 권해 줄 수 있는 가장 알찬 사이즈의 문화 공간으로서의 서점 말이다.

 

 이렇게 ‘행복한 프랑스 책방’은 책방 그리고 제 2의 프랑스라는 공간을 이중으로 구축함으로써 새로운 소설적 공간을 창조하고, 어디선가 봄직한 혹은 한 번쯤 꿈꾼직한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는 이 즈음 두 개의 시공간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는 거리의 행인인 당신의 발걸음을 잡아 챌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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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 랜덤소설선 14
강영숙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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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 출구 찾기 혹은 출구 되기의 이름

 눈이 내린 후 흰 토끼처럼 지하실 덮개를 비죽이 열고 바깥을 둘러보는 소년, 노이-살아남은 자, 노아를 연상시키는 이름-가 있다. 그가 목도한 세계는 모든 세계들의 처음이다. 지긋지긋한 눈의 사막에서 벗어나고자 꿈꾸었던 소년은 눈만이 살아남은 세계, 그 눈이 살기 위해 그의 가족, 연인을 모두 죽여 버린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눈은 이동하면서 그를 가둔다. 출구는 기계소음을 내며 이동한다. 영화 큐브의 전언처럼 출구는 끊임없이 그것을 찾기 위해 이동하는 자들을 비웃으며 한발 먼저 움직인다. 

 아이슬랜드 소년 노이는  <리나>의 다른 이름이다. 리나의 또 다른 이름들은 사실 도처에 있다. 그들은 차고 넘쳐서 심지어 스크린 속에도 있다! 세상의 모든 리나들은 자기 속에 '희고 작은 나방들'을 품고 사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끝없이 국경 혹은 출구로 밀려오고, 그것에 대항해 연대하고, 출구는 또 그것들대로 담합해 그들을 기만한다. 사람들은 때로 막막한 그곳을 향해 푸념하며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기도 하고, 주저앉은 그 자리에 풀이 돋듯 집이 세워지기도 하며, 대책 없이 애들을 싸지르는 '지랄'들을 떨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임시가옥이 무너질 때 여지없이 버려진다. 아이들은 희고 작은 나방들이 되어 집-없음, 구원-없음의 정서를 거리에 쏟아낸다. 거리는 항상 '영혼을 위로'해주기에 이 프로 아니 이십 프로 이상 부족한 '순두부 백반' 냄새를 풍기며 그들에게 싸구려 위로를 건넨다. 거리는, 세상은 때로 <봄밤>의 남편처럼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무당처럼 '세뇌'하기도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순두부 백반'은 세뇌하기에도 위로하기에도 너무나 미약하다.

  끊임없이 출구 쪽으로 밀려가고, 여지없이 그 출구가 가짜 출구란 사실을, 진짜 출구는 이미 저만치 혀를 내두르며 달아났음을 통감해야 하는 리나의 존재 근거는 그래서 ‘생각하다’일 수가 없다. 그의 존재는 생각함으로 담보되지도 않고, 그의 출구는 열려라 참깨 식의 논리로 열리지도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리나의 존재 근거는 ‘견디다’ 혹은 ‘통과하다’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몸뚱이 하나로 한없이 낯설고, 날선 세계를 견디는 아이. 그런 몸조차도 거래되는 세계, 자본주의적 상품으로서의 몸이 아닌 값싼 노동력이나 배설 욕구와 교환되는 동물로써의 몸으로 리나는 회귀한다. 우시장으로 팔려가는 어미 소처럼 ‘나는 팔려간다네’하며 속으로 우는 리나들은 팔려만 다닐 뿐, 번 돈을 쓰지도 못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돈 통만 붙들고 있으면 출구를 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는 자신의 몸이 이미 교환의 수단이 되었음을, 효력을 다한 돈보다는 몸을 내놓지 않으면 수많은 출구들을 빠져 나갈 수 없음을 견딘다.

  삐를 비롯하여 쇳내니 타이어냄새니 하는 금속성 냄새를 풍기는 작가의 노동자계급 남성들도 하나같이 난포착적이긴 마찬가지다. 리나들의 욕망은 그들을 ‘가족앨범’에 기입하고픈 살내 풍기는 것이지만, 대상들은 화답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욕망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여자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주지 않거나 말할 수 없다. 아마 금속성의 세계가 그들에게 빈 욕망만을 되돌려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주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 원치 않는 남자들만 무언가를 요구하며 리나들을 가짜 출구로 끌고 간다. 그리하여 그녀들의 가족 만들기의 욕망은 좌초되고, 그들이 그녀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음으로써 여자들은 남자들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거나 한없이 소외된다. 노동자 남성과 가족은 뒤로 숨어버리며 리나들의 통과의례를 더욱 또렷이 전경화하는 출구, 역시 달아나는 출구다.

 수많은 출구를 통과하고, 출구 너머 세계를 견디면서 리나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기나긴 탈출은 ‘소금밭의 통증’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그 후 다양한 공정들을 거치는데, 화학약품공장에서 표백되고, 시링에서 거세되고, 경제자유구역에서 부패된다. 리나의 몸은 결국 삐의 몸처럼 녹슨 금속성을 띠게 된다. 그 몸은 관성이 생겨, 어떤 상황이든 담담히 받아들이고 구태여 내치지 않는다. 상황을 전복시키는 것은 리나가 아닌, 출구들 자신이다. 가수 천막촌은 홍수에 떠밀려 가고, 시링은 철거되며, 경제자유구역은 폭발한다. 악을 구축하는 것은 선이 아닌, 악 그 자신이다. 리나의 저항은 오직 살인으로만 표출된다. 역시 악이다. 그러나 살인조차도 출구자신의 전복에 비하면 사소하고, 오직 더 약한 자들을 구출할 필요가 있을 때만 행해진다. 죽은 자들도 영원히 매장되는 것은 아니다. 화학약품 공장장은 선교사 장, 프로듀서 김, 도시 노동자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리나는 여지없이 속고, 이용당함으로써 보상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퍼즐오빠와 뚱보는 각각 그들의 동생 모습으로, 미샤는 얼음 속에서 썩지 않는 얼음공주 모습 그대로 귀환한다.

 모두들 별칭만 있을 뿐 확정된 이름이 없어, 누구든 다르게 불려지고 또 불려진대로 행동한다. 그런 사람들, 누구일 수도 있고 누구도 아닌 익명의 사람들이 골고루 페르소나와 쉐도우의 조명을 받는다. 모두가 그렇고 그런 인물들의 축제, 그들의 비루함, 낯익음, 게다가 돌발적인 낯섦, 잔인함, 분열증까지도 그 안에선 섞일 수 있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온들 놀랄 것도 없으며, 어떤 웃기고 섬뜩한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역시 축제는 날마다 계속된다.

 스크린 속에 리나를 닮은 <릴자>라는 소녀가 있다. 그녀는 아마 헝가리에 살고 있었을 것이지만, 어디든 그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출구를 향해 치닫고 있는 가난한 동유럽인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녀의 엄마 역시 재혼과 동시에 미국이란 출구를 향해 떠났고, 릴자는 버려졌다.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출구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릴자는 혼자 스위스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감금당했다. 허옇게 불은 유부남들이 그녀의 방문을 열고, 몸을 강제로 침범했다. 릴자는 정작 스위스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시들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불가사의하게 방문이 열렸고 고향에 두고 온 죽은 고아 소년의 유령이 그녀를 밖으로 인도했다. 릴자는 정신이 나간 채 시내로 기어들었다. 그리곤 육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고아 소년이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릴자는 육교 아래로 몸을 던졌다.

 자살은 분명 수많은 출구 중에 하나다. 감금되었던 릴자에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겠지만, 죽음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면적과 거리의 출구다. 멀더라도 뛰어내리거나 혀를 깨무는 것만으로도 그 거리는 쉽게 단축된다. 리나들에게도 그 출구는 시종일관 열려 있었지만, 결국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자살이, 죽음이 또 하나의 가짜 출구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 선택이 옳았다고 손들어 주려는 것도 아니다. 리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그 선택의 결과는 그 출구를 나서야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리나가 끈질기게 살아남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홍수도, 철거도, 심지어 대규모의 폭발도 그를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의 따뜻한 곳을 함께 오래 만지면서, 폭발이 일어날 땐 다른 사람의 몸을 보호하고 약자를 위해 뜨거운 피를 뒤집어쓰면서도 살아남았기에, 적어도 몇 사람은 리나를 통해 축제의 훈훈함을, 상처가 욕이 아닌 삶의 밑천으로 환원되는 희한한 체험을 하지 않았을까?

 세계화, 국제화는 장삿속으로 출구를 더욱 더 깊숙이 감춘다. 출구도 돈이 되기 때문에, 돈이 되는 모든 것은 그들의 출구이다. 나는, 리나들은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똑같은 출구 앞으로 되돌아온다. 죽은 자들은 모두 비루한 삶의 도가니탕으로 되돌아온다. 모든 개인의 세계는 언제나 모든 세계들의 처음이다. 이 어지러운 되풀이, 오늘도 끊임없이 ‘국경으로, 국경으로’를 외치는 사람들, 국경에서 그들을 내치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에게 출구가 되어 주지 못한다면 국경이 열릴 일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버 문학광장에도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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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abc 2007-04-09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끝내준다. 몇 자 적으려다가 그만...
 
붉은 브라질
장 크리스토프 뤼팽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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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상작용에 의해, 나는 크리스토프 바타이유란 작가를 기억해 낸다. 그가 쓴 '다다를 수 없는 나라'란 소설 역시 작가의 이름들처럼 유사점이 다분하다.  후에 그가 쓴 '시간의 지배자' 역시 번역자인 김정란에 의해 '가치'를 증명(연두색 책읽기)받기도 했다.

 이 책도 김정란에 의해 번역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할 만큼 번역이 어수룩(?)하다. 물론 나는 원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번역을 운운하는 잰체하는 인텔리겐차는 아니다. 다만, 번역이 '프랑스어 실력'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정도를 알 뿐이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구호가 있을만큼, 번역은 언어의 대칭관계에 의해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그런 기계적 과정이 아니다. 한국어의 뉘앙스와 결을 살려 완전히 한국어란 꺼풀을 뒤집어쓴 이국인의 글이어야만 번역은 성공적이라 할만하다. 특히 대명사를 비롯한 원문에는 있지만 생략하고 비워두어야 할 것들이 한국어에는 많다. 모든 것을 옮기려고 하면 결국 많은 것을 잃게 마련이다.

 번역의 문제는 이제 밀어 놓고, '왜 브라질인가?'를 생각해 보자. 이미 남의 식민지가 된 역사를 뒤로 하고, 그들의 말(프랑스어)를 완전히 잊은 채, 가난과 마약에 찌든 그 나라를 말이다.  남반구의 그 나라는 한국인 여행자와도 거리가 멀며 단지 '축구'라는 화두로만 우리와 소통이 가능할 정도이다. 그러한 나라가 한 때는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에 나는 일단 생경하다. 아마 프랑스의 일반 독자들도 만찬가지리라. 가만 생각해 보면, 프랑스는 대륙 국가 중 유일하게 유럽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끼여 한 몫을 차지한 나라다.  근대적 개념의 국가를 주위의 독일, 벨기에, 스위스 등보다 비교적 먼저 수립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프랑스는 스스로 베트남과 알제리등을 식민화한 제국주의 국가였음을 밝힌 바 있다. 작가 스스로도 이러한 나라에 대해서는 카뮈나 뒤라스 등과의 경쟁에서 블루 오션을 점유할 수 없음을 일찍히 깨친 모양이다.

 이 소설은 크게 세개의 전개 국면을 갖고 있는데

1. 공자그가 발기용의 명을 받들고, 통역을 맡을 아이들을 색출하는 과정과 석달여 동안 브라질을 향해 항해하는 과정

2. 브라질에 도착해서 식민화의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

3. 뒤늦게 도착한 포르투칼 군에 의해 밀려나는 과정

이 그것이다. 1번은 전형적인 해양소설들과 다를 게 없다. 파이이야기, 로빈슨 크루소, 백경, 핌씨의 모험등 해양 소설에 열광한 바 있는 독자라면 찐한 소금내에 가슴이 벌렁거릴만 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해양 소설이 아니므로, 배에서의 모험은 일찌감치 끝이 나 버린다. 다분히 프롤로그라고 할만한 이 부분은 열거한 해양 소설들에 비해 그닥 흡인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본격적인 전개는 2번의 국면에 이르러서다. 여기서부터는 참조할만한 텍스트가 별로 없으리라.  소설은 크게 두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나는 발기용으로 대변되는 르네상스적인 인간상을 희구하는 식민지 건설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쥐스트와 콜롱브라는 '미래'의 아이들이다. 물론 초반에는 둘이었던 인물이  뚜렷한 정체성을 지니며 셋으로 확장된다. 

 발기뇽은 유럽열강이 꿈꾸던 '식민제국'의 이상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상징계는 그것에 포섭되지 않는 '쾌락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이란 적들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은 더 큰 대타자-포루투칼로 상징되는-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쥐스트와 콜롱브는 애초에는 한 몸을 지닌 양성구유의 존재들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그들은 소설의 전개에 따라 뚜렷이 다른 가치와 세계관을 표방하는 인물로 성장한다. 그들의 갈등은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 따를 수도 있었겠으나, 좀 더 개화한 문명인의 소설인만큼 자신을 스스로 컨트롤 하지 못하는 자기 모순적인 문명 대 전혀 자기 모순이 없음에도 자기 모순적인 야만에 의해 모순적인 운명에 처해질 에코토피안의 모습으로 대립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콜롱브라는 인물이다. 물론 이 인물은 이 식민화의 야욕이라는 실제의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는 배후의 인물이며, 그러하기에 작가가 마음놓고 자신의 주제를 관철시키며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 인물은 '여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작가는 '페미니즘'을 많이 검토한 후 이 인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시절, '말괄량이'로 대변되는 혹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제 1세대 페미니스트같은 모습의 여자 주인공은 세련된 작가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주제를 드러내기 힘든 인물이다. 그렇다고 콜롱브가 포스트 페미니스트의 몇명이 주장하는 바대로, '여성적인 주체'나 '여성적인 말'을 전달하는 인물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여자는 두 주체의 함정을 교묘히 피해가서는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실제성'이 없는 인물이 돼 버렸다. 콜롱브는 원래가 '말괄량이'같은 여자애였다. 그렇지만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파랗고 신비스러운 눈을 '무기'처럼 활용할 줄도 알았던 것이다.  배에 타기위해서는 '남장'을 해야 했지만, 그것을 엄청난 비극이나 성전환의 계기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남장이 지속될 수록 남성화 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생리적인 변화에 따라 더 '여성적'인 육체를 가지게 된다.

배 안에서 사귀게 된 '육체파 복음주의자'가 자신의 몸을 더듬어 정체성을 알아 버리지만, 예상되는 소동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이러한 행동이 나중에  문화의 갭이나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는 복장 규정 같은 것에 전혀 갈등을 일으키지 않은 채, 인디오 여자들처럼 홀라당 옷을 벗어던지는 데 필요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녀는 점점 더 쥐스트의 세계와 멀어지며 별 의심 없이 인디오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렇다고 이 여자가 파이 로처럼 인디오와 문명세계의 커다란 연결책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소녀의 야심은 점점 더 인디오처럼 되겠다는 것 뿐이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이념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브라질을 서구문명에 비해 '여자'로서 설정하는 것처럼, 그녀는 아폴로닉한 그녀의 남자 형제에 비해 덜 문명화 되고, 더 자연친화적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위그노 파의 오드라는 여자는 단순히 콜롱브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잠깐 찬조출연하는 정도다. 그녀는 소위 허위와 교태라는 '여성성'의 화신같은 인물인데다가, 그것의 동전이 양면이기도 한 무식함과 잔인함을 지녔다.

콜롱브가 인디오 세계에 느끼는 위화감은 오직 '식인풍습' 정도일 뿐이다. 그 만큼 그녀는 전혀 꺼리낌 없이 그들의 세계에 동화되는데 그 부분이 이 소설의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브라질과 인디오들을 절대 선으로 끌어올리는데 일조하는 아프로디테. 그녀는 문명인의 관점에서 볼 ‹š는 물론 반사회적이며, 지나친 정의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남성 영웅이, 이를테면 이 소설에서는 쥐스트가 소설의 메시지를 대리 전달하거나, 보여주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다. 결국 작가는 여자를 중심에 놓게는 되었으나, 다른 사람 -쥐스트나 발기뇽-의 시행착오를 그녀만 피해감으로 인해 주제가 너무 노골화 된데다 또다른 전형적 '여성'을 이상화 한 게 되버렸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베트남이란 식민지에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다시 말해 정복할 수 없는 나라라고 실토하는 반면, 이 소설은 브라질을 '사실은 다다를 필요가 없는, 그대로 나둬야 가장 좋은' 나라였다고 말한다.

그것이 현재로선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론'일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 속의 해프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5-6시간 정도의 지적인 유희? 분명 이 소설은 의외로 굉장히 재밌다.  재미없고, 난해하고, 쓸데없는 진술 덩어리라고 보는 독자는 분명 '안목'에 이상이 있음에 분명하다.

게다가 인도주의의 허구나 서구의 관점을 비난만 하기에도 꺼림칙함이 있다. 만약 이 소설이 브라질 인디오의 관점에서 본 프랑스의 침략이었다면, 이토록 흥미로울 수 있을까? 콜롱브와 쥐스트의 러브 스토리가 날줄로서 이 소설을 튼튼히 엮어내지 못했다면, 단지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돌덩어리 섬에서의 헛된 수고만을 그렸다면, 이 소설은 개인의 진정성을 주로 문제삼는 서구의 문학계에서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소설 이후의 '역사적 모험 소설'의 방향성이다.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며, 무난한 연애담에 참신한 인물 묘사와 박진감 넘치는 사건의 전개까지 모두 겸비한 소설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제 사람들은 '파리 대왕'의 메시지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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