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다루는 영화의 접근은 크게 두 가지다. 거대담론과 미시담론. 이 영화는 후자의 포즈를 취한다. 영화사에서만 찾는다면, 역시 유럽영화인 '바르샤바', '글루미 선데이' 등과 그 접근법, 플롯이 닮아 있다. 매우 협소한 공간, 사랑을 둔 삼각관계, 그들의 은밀한 공간 밖에서는 역사상의 중요한 사건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퇴폐와 타락은 그 역사적 상황을 굴절해 보여주는 이상한 거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들의 삼각관계가 극단으로 치달을 수록 인간과 이데올로기 혹은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과의 관계는 더욱 더 괴리되고, 인간은 소외된 채 일그러진다.

다시 말하면, 이런 영화들은 역사 해석에 있어 어떤 정공법을 따르지 않는다. 어떠한 해석 중에 하나만을 슬쩍 제시할 뿐. 게다가 전쟁 혹은 혁명을 다루는 영화답지 않게 '꾸민 영화'다운 매력도 있어, 전혀 무겁지도 않다.

여자 주인공의 지속적인 노출은 이런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훌륭한 '무기'
그로 인해 한국영화계는 배우 하나를 잃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 영화 속의 여배우의 '몸'은 역설적인 두 가지 사실을 방증한다. '너무도 아름답다.'와 '여배우의 훌륭한 몸은 무거운 주제를 상업적 성공 혹은 대중과 연결시키는 가장 손쉬운 KNOT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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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소위 지식인을 표방하는 이들도 텔레비전 드라마에 혹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의 시트콤 프렌즈나 섹스 앤 씨티는 여러가지 이유가 보태지며 이들 부류에게 옹호되고 있기도 하다.  소위 지식인들의 트랜드라고나 할까. 색스 엔 씨티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케이블 라인을 설치하지 않아 시청하지 못한 경우는 대화에서 소외될 정도로 이것들의 시류성은 대단하다 할 수 있다.

MBC 드라마인 '결혼하고 싶은 여자'도 비슷한 선상에 있다. 노혜경같은 드라마 작가군들이 그랬듯이, 드라마 작가는 시류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기를 희망하기 마련이다. 소위 이 사회 돌아 가는 꼴에 대해 한마디씩 꼭 던지고 싶어한다는 것인데,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도 결혼보단 그런 욕망을 강하게 드러낸다 하겠다.

솔직히 나는 이 드라마를 매우 띄엄띄엄 봤기 때문에 그 줄거리 돌아가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그런 팩트의 오류는 누군가 지적하면 그만이다. 지적하지 않으면 나로선 남들이 안 읽어 주는 것으로 간주하면 그만이고.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몇 가지 점에서 강한 의문을 남기기도 했으며, 한편으로 '한겨레 21'의 내가 애독하고 있었던 기사들의 기자가 이 드라마에 대해 30대 비혼 여성이며 인텔리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교양 및 지식을  발휘하여 써 줬기에  탄력을 받은 바 그 내력을 고하려 한다.

# 노처녀에도 등급이 있다.

이 드라마를 매우 호의적으로 본 기자는 이 드라마가 기존의 노처녀-주인공 드라마와는 차별되게 주인공을 둘러싼 세 여자의 우정을 '자매애'로까지 그려내고 있다며 이 점을 크게 홍보해 주고 있다. 여기에 나는 물음표를 찍을 수밖에 없는 것이, 과연 '친구의 남자는 넘보지 않는 거야'라고 호언장담하는 것이 과연 '자매애'의 요체인가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기 때문.

그런데 드라마를 들여다 보자. 드라마속 인물의 이름은 모르므로, 그들로 분한 연기자의 이름을 거명하자면,  이태란은 명세빈이 침발라 놓은 생선 즉, 30대 항문외과 전공의에게 눈독을 들이며, 이를 안 제 3의 친구인 변정수는 아까 언급한 저 '경구'를 날리며 이태란을 한방 먹인다. 그런데 문제는 명세빈에게 제 2의 남자가 있다는 것. 그의 이름하여 '이현우' 나는 흘러간 그의 노래를 들으며 그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절감했다. 그 쳐진 눈커풀과 어눌한 대사로 30대 노련한 여연기자들을 어찌 상대하려 맘을 먹으셨는지..

각설하고

이현우의 존재는 이태란 대 명세빈 뿐아니라, 명세빈 대 변정수 의 관계까지도 복잡하게 만든다. 왜냐. 변정수는 아주 일찌감치 이현우에게 침발라 놓은 상태이므로

문제는 이현우나 항문과 의사나 둘 다 의사인데다가 명세빈만을 좋아하게 되기 때문.

여기에 바로 노처녀들간의 사회적 위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사실 이 위계성은 현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세 명 미모 수준이 거의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1. 명세빈 : 어설퍼도 공중파 방송의 기자였다(상도 받았다) 경혼 경력 무, 집안 빚 무. 신용 상태 양호

2. 이태란 : 회복 기미 없는 병중의 아버지, 벗겨먹으려고만 하는 고모와 그의 딸, 실직 상태. 재취업 가능성 희박

3. 변정수: 유명한 색정광, 노골적이며 집요함. 이혼 경력 유, 혼혈아 출산 경험

이러한 조건 변수를 보더라도 작가나 시청자가 누구를 우위에 둘지는 이미 결정된 것이다.  여성 트랜디 드라마의 거의 적법한 규정처럼 이현우는 1을 무조건 추종하고, 연모하고, 러브 콜을 보낸다.  1,3의 여자는 이런 관계에 추임새를 보내는 광대에 지나지 않을 뿐. 특히 변정수는 그렇게 망가지고도 지속적으로 CF를 따낼 수 있는지, 자연인 변정수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 가족은 노처녀 앞에서 폭력적이다.

이런 가족 폭력에 가장 극단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인물은 바로 명세빈, 브라운관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그는 가족들의 최대 관심사요, 신경 써 줘야 하는 대상이다.

명세빈이 직장에서 돌아오는 신, 이미 카메라는 가족들을 담고 있다. 그 가족들이 모여서 하는 대화란 것이 들어보면 알파요 오메가가 오메가가 명세빈 시집 보내기다. 그러다보니 명세빈이 들어올라치면 가족들은 미끼에 걸린 고기 낚아 올리듯 드세지기 마련이다. 명세빈 집중 공략. 그것이 그 가족들의 사랑의 표현인 듯.

손위 올케는 과거 명세빈의 동창이었으면서도 가장 확실한 대적자다. 그녀는 정말 이름 그대로 '그녀'로서 자신의 볼품 없는 남편을 내세우며 '그래도 나는 결혼했다'는 것을 누누히 강조하며, 과시하려 든다. 내 보기엔 웃기지도 않는 쇼일 뿐. 자신에 대한 불만족 혹은 며을 향한 열등감을 소위 공격 기제로 해소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녀의 언어 폭력은 웃기지도 않으면서도 명세빈을 무너뜨린다.(기자 정도나 되서 그 정도의 어거지에 무너지는 설정도 웃기지만)

가족들은 명의 충실한 검열관들이다. 하나같이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혹은 그녀의 현현만이 그들 존재를 선험적으로 가능케 한다.  이러한 판옵티콘 같은 검열과 관리 체계 속에서 명의 야망과 사회적 위신은 어디론가 내동이쳐도 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는 결혼을 안했다는 이유만으로 남동생에게 무시당한다. '살도 안쪘는데..'

비혼은 비만만큼이나 이 집안에서 큰 야유거리이며, 걱정거리인셈. 이것이 한국의 표준적인 노처녀 가정이라고? 그렇다면 열심히 일한 당신은 떠나야 한다. 명세빈이여. 일단 그 폭력적인 가정에서 떠나라. 그리고 나서 결혼이 필요하면 해라. 그런데 그렇게 결혼해서 만든 당신의 가정에서 또 그런 노처녀가 안 나오란 법이 없다. 한국의 표준적 가정은 그렇다고? 그렇담 뭐하려 기를 쓰고 노처녀들이여 그런 가족을 만드려 드는가. 당신들의 딸이 결혼할 적앤 그런 불상사가 없을 거라고? 누가 알겠는가

# 노처녀는 사회적 질병. 훈계받고 질책 받아야 할 존재

기자의 드라마 비평이 오르고, 한겨레 21 자유게시판은 모처럼 문화적 이슈로 활기를 띠었다. 정치적 문제도 , 양병거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웃긴건 반이상이 기자의 개인적 노처녀 체험 고백성 맨트를 건드리며, 인신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어떤 남자는 그가 왜 아직 노처녀인지를 조목조목 진단하고 처방전까지 제시한다.

요는 현대의 인텔리 노처녀들의 만성질환인 '늙었으나 우리는 지적이고, 유치하지 않다'는 미덕이 허위란 것이다. 그것은 노처녀이기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노처녀 이기 떄문에 유일한 것이라나?

그런 믿음을 갖는 노처녀야말로 더 유치하고 15살 소녀의 멘탈리티를 갖었단 것이 그의 집단 심리 분석이다.

참으로 편벽스러운 이 결론에 나는 몇 가지 댓글을 달아 놓기도 했지만, 이러한 결론이 반증하는 것은 한국 남자들의 소아병적인 여성관이다.  그들의 유치한 견해로는 모든 여자들이 '남자를 얻기 위한 전투'를 하는 걸로 보인다. 그리고 남자들은 근엄하게 서서 그들의 전투가 끝나길 기다린다. 고로 그들은 전투가 끝나도 흐트러짐 없이 걸어나오는 여자를 택할 것이란 거다. 예컨데 그 길고 관리된 메뉴큐어 발라진 손톱에 하등 흠집도 없는 암컷을 택하리란 것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든 한국 남자들이 그렇게 근엄하게 서서 관리자적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는 게 또한 현실이니 그의 무지막지한 보편론은 여성에 와서가 아니라, 남성에 와서 깨지기 마련이다.

#  그대 왜 결혼을 원하는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결혼은 미친짓이다'란 대중소설에 영합해 영화도 만들어졌지만, 양혜승이란 가수의 가사는 정말로 치졸하기 이를데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진실을 반영한다면 , 이런 것일 듯.

'결혼'이란 소재가 아직도, 여전히, 굳건히 모든 연령대의 주된 관심사란 것.

동거도 있고, 이혼도 있건만 모두 '결혼'에 대해 열광하거나 고민한다. 그럼에도 우린 아직 남성에게 결혼이 뭘 의미하는지, 남성이 왜 결혼을 원하는가에 대해선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다. 다만 그들은 여성의 결혼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결혼을 감행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나중에 올 불륜의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서

그런데 왜 반대 급부적으로 여성의 결혼은 그렇게 이슈가 되는가.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드라마를 인용하면서

여자는 일하고 커리어를 쌓다 보면 어느새 30이다. 그 때 상대를 찾으려 보면, 그 나이 대 남자들은 갈수록 어린 여자만을 찾는다. 더 연상을 고르다 보면 이혼경험이 있거나 유부남이다. 연하를 찾다보면 사회적으로 불안정하다. 결국 진퇴양난인것이다.

그렇다 보니 결혼 대작전을 벌이는 '노처녀'만이 주된 화제가 되기 마련인듯

그런데 그런 노처녀들이여, 왜 그대는 결혼을 원하는가?

단지 나이들어 혼자인 것이 패배로 인정되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라면, 왜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는지,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감추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뭔지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여기서 치졸한 음모론을 내밀려는 건 아니지만, 노처녀를 비방하고 모함하는 직장과 가정의 담론 속엔 음모가 없다고 볼 수 있겠는가?

# 담합을 피해가는 법

나는 결혼을 강요하고, 결혼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절차로 간주하는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다수자의 횡포요 담합이라고 본다. 그들은 '인간은 본래 하나였는데 좌웅이주가 되었다는 둥'의 전설까지 빗대며 인간은 둘이 같이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동성애는 그럼? 하면 함구하며 얼굴이 뻘개질지 모른다. 이성이래도 격이 전혀 다른 사람 예컨데 외국인 노동자를 결혼상대자로 소개한다면? 차라리 혼자 살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런 사회적 관습적 카르텔을 뚫고 지나가는 법은 사실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같은 드라마를 아예 만들지 않기 , 그런 드라마가 나오면 박수칠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기 이런 게 기본적일 것이다. 물론 저 진보적이라 표방하는 매체의 또한 가장 진보적일 듯한 기자 중 하나가 노처녀로서의 자신의 삶을 너무나 극명히 토로하는 르포성 비평을 내보냈다고 하더라도. 나는 저 드라마에 대해 여전히 비판적이다.

주위에서 드라마의 인물같은 맨트를 내뱉는 자가 있다면 (예컨데 올케) 그 사람을 논리적으로 굴복시킬 정도의 말빨은 되야 독신으로서 그럴듯하게 살아남지 않을까? 자기 스스로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에 시달리며 결혼을 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는 그런 좌충수는 최대한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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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1-10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드라마를 한번도 안 봤지만^^ 글이 재밌어서 퍼갈게요
 

제목은 거창하나 내용은 비루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대략 이러하다.

어제는 토요일, 소피마르소의 '거대한 열정'이라는 케이블 영화를 찔끔거리다가 욕조에 몸을 담궈 몸 안팍의 삼투압을 재조정 한 후, 여전히 땀이 삐질 거리는 몸을 침대에 뉘인 후, 거의 직행으로 꿈의 나성형 계단 쯤에서 오르락 내리락 수직운동을 흡족하게 끝내고, 현실로 낙하한 시간은 대략 10시.

깨서 한 일은

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 만들어 마시면서 두어 조각의 케익을 곁드린 후

다소 울렁거리는 복부를 쥐고 화장실을 두어 번 들락거릴 때까지.

옆 방에서 자고 있는 신혼 부부를 감상한 것.

'아침형 인간 강요하지 말라'는  공저의 한 명으로 참여한 나의 새 올케

참으로 제목만큼이나 실천이 정확하여

나보다도 침구에서 오래 버틸 줄 알았다.

경향신문에 소개된대로 아침형 인간에 대항 개념을 세운 한 일본인이 주창한 것이 바로

'대충형 인간'인데

나는 정기적으로 8시 30까지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다.

그 시간을 9시 혹은 9시 30으로 늦추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럼에도 일찍 일어나는 새처럼 벌레를 잡기 위해

혹은 일찍 일어나는 벌레처럼 새에 잡혀 먹히기 위해

부르조아든 프로레타리아든 학생이든 선생이든 부지런을 떨기 마련이다.

그러니 10시에 일어난 아침은 너무나 행복하달 수밖에

일어나서 비생산적인 바보상자 앞에서 키득거릴지라도

눈안에 잔뜩 들어있던 모래의 지글거림도 없고

머리속에 수면 공습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도 없는

그런 아침엔

무언들 유쾌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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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bee 2005-06-19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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