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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깊은샘 / 1996년 11월
평점 :
품절
종종 시간이 날 때마다 신간으로 나온 책을 확인하는 일을 한다. 선호하는 작가의 신간을 찾는 경향이 강해서 - 평범한 시간은 관심이 별로 없다 - 작가의 이름으로 신간을 검색하곤 한다. 물론 그 작가들의 리스트는 정해져있고 굉장히 한정적이며 그에 비례해서 그들에 대한 내 신뢰는 각별한 편이다. 물론 그 작가 리스트는 간간히 교체되기도 하지만 꾸준히 들어있는 작가도 있는데, 그 몇 작가 안에 슈테판 츠바이크가 단연 돋보인다. 당연하지만 츠바이크의 책은 발견하는 대로 족족 사들여서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
보통은 신간이 출간되는지를 찾게되지만 아주 가끔씩 구간이 걸릴 때도 있는데, 이런 책은 절판이거나 품절이거나 혹은 재고가 1권으로 표시된 경우가 있다. 갈증이 난다랄까. 이번 책 [감정의 혼란]도 작가 이름으로 검색하다가 정말 우연히 찾은 책이다. 비록 배송은 정말 오래 걸렸지만, 그 기다림이 전혀 아깝지 않은 작가의 이름에 걸맞는 책이었다.
[감정의 혼란]은 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고, 어느 이야기 하나 휘리릭 읽고 넘길만한게 없다. 하나 같이 화자의 인칭과 시점의 변화는 있으나 사건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의 심리묘사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츠바이크의 소설에서 인칭은 꽤 중요한데, 심리묘사의 대가인만큼 이야기의 화자와 인칭이 표현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를태면 한 남자를 사랑한 여인의 이야기를 타자인 남자 화자의 목소리를 빌리는 것과 여인 본인의 시점, 혹은 여인이 자기 자신을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서술하는 등 시점이 그의 소설에서 표현의 큰 부분을 결정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감정의 혼란] 중 가장 압권인 이야기는 단연 '모르는 여인의 편지'라는 중편 소설이다. 소설에서 한 남자가 모르는 여자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 속에는 곧 자신이 죽을거라는 여인은 한 평생 이 남자만을 사랑했노라 절절하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남자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걸 알고 있지만, 자신은 곧 죽을 것이며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다고 여자는 담담하지만 격정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남자에 대한 사랑은 여인의 어린 시절 앞 집으로 남자가 이사를 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소녀였던 시절 지긋지긋했던 자신의 삶을 투영하는 앞 집 세입자가 사라지고, 자신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소설가인 남자가 이사를 오면서 소녀는 그 남자에게 사랑에 빠져 버린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어쩌면 그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동경에 가까웠을 것이다. 소녀의 사랑은 어머니의 재혼과 연이은 이사로 헤어져야하는 순간이 닥치면서 소녀의 동경이 어쩌면 사랑으로 그 순간 자라버린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기막히는 설정은 편지를 받은 남자는 이 여인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애정을 받는다는 점이다. 앞집에 살았던 소녀이고 마주쳤을 법도 한데, 그리고 그녀는 분명 매력적인 여자인데 그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평생 사랑했던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는건 이 남자의 밑에서 일하는 집사이고, 그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단 한번의 스침으로도 여인의 얼굴을 - 그녀가 그 소녀임을 -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하지만 유독 이 남자만은 그녀를 '하룻밤의 여인'으로 흘리는 것이다.
그녀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그 편지 글 내내 여인의 절절한 사랑만이 계속 묻어날 뿐이다. 어떻게 이런 여인의 마음을 아니 그녀의 일생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어떻게 이런 여자의 마음을 그리고 그녀의 일생을 따라가며 이야기할 수 있는지, 마치 그녀의 마음을 투명하게 들여다 보고 있는 듯한 이 감상은 츠바이크의 소설을 계속 찾아 읽을만한 충분한 이유이다.
그 순간에 그의 눈은 책상 위에 놓인 파란 화병에 떨어졌다. 그 병은 비어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생일날과는 달리 처음보는 빈 병이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갑자기 문이 열려져 차가운 바깥 세상의 바람이 고요한 방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 한 여인의 죽음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죽지 않는 영원의 사랑을 예감했다. 그는 마음 한 구석에서 뭔가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먼 데서 들려 오는 음악소리 처럼,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느 여인의 모습을, 형상은 없으나 훈훈한 애정을 갖고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