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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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자기 인식 없이 낭만화된 자기 긍정은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중2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정말로 자신을 긍정하는 길은 자기 행위의 무의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 게다.-20쪽

한때 '나는 다르다'는 자의식을 극복하는 것은 사춘기의 과제였다. 전통적으로 청소년 필독 도서였던 위대한 문학작품들은 대개 그 문제와 치열하게 대면하고 있었다. 스무 살이 넘으면 그런 소설에 담긴 고민들 자체가 유치해 보이는 것이 정신이 성숙해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상은 우리에게 그 과제를 해결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21쪽

내 주변의 20대 좌파들은 정말로 사교성이 없다. 사교성이 없어서 좌파가 된 건지 좌파질을 하다 보니까 사교성이 사라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그러한 조류는 운동권 바깥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거다. 그들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일종의 우울증이었다. 동년배에게서 공통의 화제를 찾거나 지적 자극을 받는 일을 포기한 그들은 각자의 환경에서 원자화된 개인으로 전락한 채 그로부터 파생되는 우울함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40쪽

부르주아들이 '문화 자본'을 획득하는 것은 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돈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 가치 또한 소유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을 '허영'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그렇다고 치자.
문제의 핵심은 우리 사회의 부르주아들이 그런 '허영'에 쉬이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없는 이들에게 문화 자본을 자랑하는 법이 없고 돈과 상관이 없는 일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자신이 성공한 이유는 남들을 철두철미하게 잘 쥐어짰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재능'이나 '능력'이라는 수사로 포장한다. 천박함이 재능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없는 이들은 이 재능이 없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결국 계급 체계를 정당화하게 되는 문화적 차이'라는 부르디외의 논의는 한국 실정에서는 고급문화에 대한 감수성이 아니라 어떤 천박함을 지칭한다. 그러니 슬프고 우스꽝스럽게도 남는 건 학벌과 영어밖에 없는 것이다.-76~77쪽

부모님 세대는 사회 내에서 자신의 계층이 상승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 자체가 상승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사회는 올라가는 중이었다. 아이를 낳아야 한단 사실에 의문을 품은 바도 없지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의 삶이 나보다 더 나을 거란 것도 그들에겐 명약관화한 진실이었다. 실제로 어르신들을 만나보면 그렇게 부유하지 않은 분들도 '얼마나 세상이 좋아졌냐'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하지만 이 세대가 세계에 대해 가지는 '느낌'은 그와는 정반대다. 그들은 청소년기와 청년기 초반에 그들이 누렸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들 부모님 세대가 그들보다 훨씬 고생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엄청난 요행이 생기지 않는 한 자신의 평생 기대소득이 부모에게 미칠 수 없음을 '안다'.-133쪽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예술가나 운동권들의 정신 건강이 회사원에 비해 얼마나 황폐한 수준인지도 알고 있고, 그들이 '예술성'이나 '진보성'같은 어휘들을 그 황폐함을 가리기 위해 어떻게 활용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정신 건강은 연봉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지는 않지만 대체로 '양의 상관관계'를 지닌다. 예술계와 사회운동 진영의 현실은 일반 사기업보다 훨씬 더 황폐하기 때문에, 거기서 살아남는 중인 이들의 감성이 자본주의의 다른 영역에서 살아남는 중인 이들의 감성보다 나을 리가 없는 것이다.-158쪽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창의성을 말살하는 값싸고 질 나쁜 공교육'을 그대로 받아내고 세상에 나오는 것만큼 급진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나는 그걸 견뎌낼 수 없는 이들이 있고, 그런 이들에게 그걸 감내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공교육에서 밀려난 이들의 경우 부모가 유학을 보내주거나 대안학교에 보내줄 자본이 없을 때 그저 검정고시를 치게 된다. 또한 '값싸고 질 나쁜 공교육'에 대한 비판은 다분히 시장주의적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공교육 체제의 교사는 경쟁을 모르고 교육 시장 '소비자'들의 수요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대안은 쉽사리 사교육을 향해 치닫는다.-199~200쪽

운동권 바닥에서 발언권을 가지려 해도 명문대를 가야 하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주변부에서 '그럭저럭 살 만한 진지'를 구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이 가능할 수는 있는데, 심지어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학벌 등 중심부에서 '먹어주는' 자원을 하나 정도는 가져야 한다. 이래서야 그걸 주변부라고 볼 수 있겠는가?-201쪽

하지만 사실 지금의 청년층은 미계몽되었다기보다는 과계몽된 상태다. 그들은 '부모 세대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을 운동으로도 반전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 이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 지식인의 조언은 상당히 기괴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말한다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사춘기'에 가능했던 저항의 형식을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체제는 68세대나 386세대와 같은 '그 청춘들'이 다시 등장한다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을 살 수 없다면 부모 부동산을 물려받으려 하고, 얼마 안 되는 일자리 안에 나만은 포함되겠다고 판단하는 것이 청년 세대다. 이런 모든 주체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일자리 만들기'는 한계에 부딪혔으니 '일자리 나누기'를 사유하자는 고민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233~234쪽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동의하는 바도 아니고 정상성이 모든 이에게 강요되는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상성이라는 폭력에 반대한다는 것과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택화고 싶을 그 선택지로 가는 길에 '좁은 문'이 놓여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어떤 이들은 태준식감독의 쌍용자동차 파업을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 전쟁>에 나오는 그 해고자들이 무쏘를 몰고 다니는 모습을 통해 추측되는 파업 이전의 '정상적인 삶'을 경외하고 동경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상적으로 월급 받으며 정상적으로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것만큼 경외와 동경의 대상이 되는 일은 따로 없다. 그것을 애초에 포기했거나 유예하자고 생각한 이들에게, '정상적인 삶'과 해고 이후의 '피폐한 삶'의 엄청난 낙차를 제시하는 운동 전략은 공감과 위화감을 발생시킨다.-250쪽

학생운동권, 혹은 학생정치 조직에서 20대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부족하기 때문만은아니다. 평균적인 20대들이 정치적인 접근이나 연대를 통한 문제 해결방식에 대해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집단이나 어떤 연대의식이 특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가치 지향을 품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이 인식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조직 가입을 권유한다는 것은 곱셈의 효용성을 의심하는 이에게 인수분해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학생운동 조직이 '88만원 세대'의 미래에 돌파구를 가져오리라는 희망이 들지 않는 이유이다.-266~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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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보수의 품격
표창원.구영식 지음 / 비아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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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베르는 상관이든 권력자든, 상대가 누구냐에 상관없이 '법을 어겼다', '범죄자다'라고 하면 사냥개처럼 무조건 수사한다. 그런 법 집행자에게 휴머니즘을 찾으라 하고, 정치적 타당성을 고려하라 하고, 시대정신을 헤아려 누구 편을 들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법 집행자는 공평하면 된다.
여든 야든 나쁜 사람이나 법을 어긴 사람은 수사하고 처벌하면 된다. 노동자와 사용자도 마찬가지다. 경영주와 노동자 중에 누가 파울 플레이를 했는지 찾아내 엄정하게 처벌하면 된다. 협약으로 풀고 정치로 푸는 부분은 자베르의 영역이 아니다. 법 집행자에게 정치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자베르는 교과서다.-25쪽

구_한국 사회에서 '품격 있는 보수'가 가능할까?
표_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이제부터 시작 아닌가. 품격 있는 보수가 될 수 있는 분들이 보수를 포기하는 현상들이 있었다. '보수? 그거 수구 꼴토이잖아. 나는 그렇게 살기 싫어! 난 좌파야. 난 진보야.' 이런 모습들이었다. 내가 자꾸 보수와 반공을 주장하는 이유도 그거다. 보수면서 진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보수임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서 보수 속으로 뚜벅뚜벅 들어가 '너희들이 잘모소딘 거야. 너희들이 제대로 된 보수야?'하고 안에서 흔들어버리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은가. 그 안에 있는 분들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수와 반공 정체성으로도 불법 비리 척결해낼 수 있어. 십알단처럼 '종북 좌파 빨갱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우리의 대표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더 이상 참지 않아.'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나와라, 나와라. 커밍아웃 해라.'하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다.-105쪽

구_'경제보다 표현의 자유가 우선된다'고 주장했는데, 표현의 자유가 사람들에게 밥을 먹여줄 수 있다고 보나?
표_표현의 자유가 직접적으로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들이 먹고살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고, 우리의 경제구조도 향상되었다. 그게 왜곡되지만 않으면 된다. 왜곡되지 않고 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서, 거기에 존 롤즈적 정의론(최소 수혜자를 최대한 배려하라.)에 따라서 복지가 깔려 있는 경제구조로 굴러간다면 모두의 입에 밥이 들어간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독점, 카르텔이 형성되고, 담합이 이루어지고, 복지 예산이 다른 곳에 전용되고, 토건 사업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되면 억울하게 굶는 사람, 직장을 잃는 사람이 생기고, 죽는 사람도 생긴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제대로 확보된다면 그런 모순이 일어나지 않도록 비판하고 감시할 수 있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경제를 왜곡시키는 현상은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많은 사람에게 밥을 먹여주는 것이 될 수 있다.-145쪽

왜 보수의 가치에서 표현의 자유가 핵심적이어야 하는가? 이것을 제대로 고민해봤다면 '저 새끼 말 좀 못하게 했으면 좋겠어.'하는 감청이 차올라와도 '아, 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나의 정체성을 뒤집는 것이야.'하고 느끼는 자기 본능적 제어장치가 생기게 된다. 그것은 십수 년간의 교육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는 이게 안 된 거다. 오직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즉 내가 속한 집단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만 따지는 것이 보수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북한과 같은 행동을 하는 거다. 전체주의적 행동,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행동,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발언들을 하고 있는 거다.-152쪽

그들을 자꾸 대상화시키고, 어쩔 수 없다 하고,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수구 꼴통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유형화시키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포기하게 되고, 그들의 변화 가능성을 놓치게 된다.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들이 종북 좌빨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행동인 것처럼 '저들은 변하지 않아. 저들 세대가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야.'하는 순간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분들도 생각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고, 차분하게 이것저것 따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해서 그런 거다. 그분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사고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사고 능력이 제약 없이, 두려움 없이, 공포 없이 계속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면서 무엇이 정말 진실일까를 탐구할 수 있는 기회만 드리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158~159쪽

오히려 그런 패배주의, 즉 '대한민국은 안 돼. 기회주의만이 살고 정의는 진다.'이건 싫다. 비록 그런 면이 과거에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그렇다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침묵해서 그럴 뿐이지 정말 정의를 위해 노력한다면,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거기에 또 한 사람이 인정해주고 격려해주고 동조해주고, 그렇게 나아간다면 우리도 결국 이 땅에 정의를 구현하게 될 것이다.-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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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 - 공정한 한국사회를 위한, 김영란.김두식의 제안
김영란.김두식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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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 물론이죠. 다만 저는 지금까지의 부패방지 대책이 실패한 이유가 적발, 처벌을 부패방지와 동일시하는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법률가지만 법률적 제재 만능주의가 가지는 함정이 잇다고 봐요. 막스 베버는 적발이나 처벌이 범죄억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공식적, 사법적 처벌에 앞서 우선 공동체의 비난이나 따돌림 같은 사회적 처벌 풍토가 있어야 된다고 했어요. 법률적 처벌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적용이 엄격하여 제재의 효과를 내기 어려운 반면 직능단체의 자격 박탈, 기업의 해고, 협회의 퇴출 강튼 제재는 즉각적이고 해당 개인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효과를 내거든요.-88쪽

김영란 /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나는 왜 선출되지 않았는데 권력을 가지게 됐을까?'를 늘 고민하고 깊이 사유해야 한다는 의미로 저는 받아들여요. 그래서 대법관일 때 늘 고민했어요. 사법부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구성되는 이유는 뭘까? 견제와 균형 원칙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라 한다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견제하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선출된 권력은 다수에 의해 뽑힌 거잖아요. 그렇다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소외된 소수를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권력 위에서 군림하려 들면 반드시 문제가 복잡해져요. 그러나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역할은 필요하다고 봐요. 모든 것을 다 다수결로 해버리고 나면 까딱하다가는 우중정치로 가도 통제할 수 없거든요.-171쪽

김두식 /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보수성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벌 위주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예컨대 성폭력 범죄의 형량만 계속 올라가잖아요. 국회의원들도 모두가 찬성하는 데다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으니까 만만한 거리 범죄의 처벌만 강화되는 거죠. 여기에 검사장 선거까지 들어오면 미국이 그렇듯이 선거 있을 때마다 법집행 의지를 과도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어요. 재선을 노리는 주지사나 주 법무장관이 마구 사형집행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자칫하면 보수일변도, 처벌일변도에다가 초강경 입장을 가진 사람들만 계속 당선돼 우리 사법 시스템 전체가 더욱 경직될 수도 있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사건을 과대포장하고 잘 엮으려는 의지가 더더욱 강해지는 거죠.-204~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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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해가면서 읽은 책은 간만이다. 그만큼 생각할 거리가 많았기에.

 

교사이자 중산층에 진입하게 된 딸이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가난한 노동자에서 소상인으로 진입한 아버지의 삶을 반추해보는 스토리,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 하다. 읽으면서 지나치게 감정이입했던 건 내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일테다. 물론 아버지의 캐릭터는 많이 다르지만 둘러싼 환경에 대한 묘사나 저자가 고백한 심리들이, 내가 느낀 것들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나도 저자처럼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 을 짧게나마 해보..고 싶었는데, 쓴 글을 지워버렸다. 아직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이곳이 편안하지 않은 탓도 있고, 내 자신이 덜 성숙한 탓도 있다.

 

쓰려고 했던 걸 건조하게만 이야기하자면, 가방끈 짧고 농사짓는 아버지를 둔 대졸 화이트칼라 딸내미가 이 책을 읽고 내 감정을 돌아보며 수치심과 자책감을 느꼈다는 내용이 될텐데, 구구절절 쓰자니 내가 너무 힘들고 자기검열을 많이 하게 되어 포기했다.

 

 

어느 날 그는 자랑스러운 시선으로 이렇게 말했다. <난 널 한 번도 창피하게 만든 적이 없다.>

 

-p.105 

 

이 구절 아래 써둔 메모 한 개만 꺼내본다.

 "내가 일생 힘써온 것은, 진정으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혹은 부끄러워 하는 티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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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02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랑스러운 눈길'로 늘 '자랑스럽게',
아니 '즐겁게' 살아오셨겠지요.

'자랑스러운'이라고 나오는 말이지만,
이 말은 '즐거움'과 '기쁨'일 테고,
곧 '사랑'과 '믿음'이리라 느껴요.

언젠가 천천히 즐겁고 기쁜 웃음으로
브륀 님 삶 이야기를 조곤조곤 적어 보셔요.
모두 사랑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구판절판


아이들의 몸엔 언제나 벌레가 있었다. 그것들을 쫓아 버리기 위해 셔츠 안쪽, 배꼽 부근에 마늘을 채운 조그만 주머니 하나를 꿰매어 달아주곤 했다. 겨울철엔 귓구멍을 솜으로 틀어막았다. 난 프루스트나 모리아크를 읽을 때면, 이 작품들이 내 아버지가 아이였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버지의 환경은 중세였던 것이다.-26쪽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꼭 필요한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었다. <저 사람들이 항상 저렇진 않았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런 꼴이 되어 버렸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축제와 자유의 장소를 제공한다는 의식 말이다. 물론 거기에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 사람들에겐 이곳이 끝장난 주정뱅이들이나 드나드는 <목로주점>에 불과했지만.-56쪽

그리고 모든 말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들이나 내 말들 가운데에서, 선망과 비교를 의심한다. 내가 <어떤 애가 루아르 강변의 고성을 구경 갔대>라고 말할라치면, 그들은 곧바로 화를 내면서 <너도 나중에 얼마든지 거기 갈 수 있어! 네가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지!>라고 쏘아붙인다. 항상 느껴지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결핍감.
그건 욕망을 위한 욕망이었을 뿐이다. 왜냐면 사실은 무엇이 아름다운지, 아니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61~62쪽

아버지는 뭔가 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는 소심해지고 뻣뻣이 굳어져서 상대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요컨대 똑똑하게 처신했다. 이 경우 <똑똑함>이란 우리의 열등함을 인식하되, 이 열등함을 최대한 숨김으로써 거부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교장 선생님이 <이 배역을 위해 따님은 정장을 하고 나오면 될 거예요>라고 한 말의 뜻을 알아내려고 저녁 내내 끙끙거렸다. 만일 우리가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열등하지 않다면 분명히 알았을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창피했다.-64쪽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예절 바르게 대하는 모습은 내게는 오랫동안 신비로 남아 있었다. 또 나는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들이 간단한 인사말을 건넬 때에도 극히 부드러운 어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어조의 인사말을 듣게 되면 부끄러웠다. 난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내게 어떤 특별한 호의를 품고 있다고 상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결국 알아차리게 되었다. 몹시 관심 있는 듯한 태도로 질문을 하거나, 이렇게 따뜻하게 미소 짓는 것은 입을 다물고 식사를 하거나 살그머니 코를 푸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78~79쪽

난 런던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아버지는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추상적인 애정으로 환원되었다.-99쪽

상차림은 고민의 근원이었다. <주느비에브 양은 토마토를 좋아하나?> 한마디로 그는 최선을 다했다. 내가 이 친구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거기서 난 내 존재로 인해 조금도 바뀌지 않는 그들의 생활 방식을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었다. 외부인의 시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세계, 난 내 세계의 방식들과 생각들, 취향들을 잊어버렸기에 내게 열리게 된 그들의 세계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아버지는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저 일상적인 방문에 불과했을 것에 특별한 축제의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내 친구들에게 경의를 표했고, 세상 예절을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예를 들어 특히 <안녕하세요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신다요?>같은 말로써, 내 친구들이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어떤 열등성을 드러내곤 했다.

어느 날 그는 자랑스러운 시선으로 이렇게 말했다. <난 널 한 번도 창피하게 만든 적이 없다.>-104~105쪽

내가 미끄러져 들어간 이 세계의 반쪽에서 다른 반쪽 세계는 하나의 배경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내게 편지를 보내 희미하게 우리가 원하면 집에 와서 쉬어도 괜찮다고 알렸지만, 대놓고 당신들을 보러 오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난 집에 혼자 가곤 했는데, 그들의 사위가 오지 않는 진정한 이유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그와 내가 피차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 그리고 내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이유였다. 식구 대부분이 고학력자이며 대화 중에 끊임없이 <아이러니>를 구사하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가 어떻게 이 순박한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서 즐거울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치 있는 대화의 부재>라는 이 본질적인 결함을 보상할 수는 없었다.-108쪽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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