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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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자기 인식 없이 낭만화된 자기 긍정은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중2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정말로 자신을 긍정하는 길은 자기 행위의 무의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 게다.-20쪽

한때 '나는 다르다'는 자의식을 극복하는 것은 사춘기의 과제였다. 전통적으로 청소년 필독 도서였던 위대한 문학작품들은 대개 그 문제와 치열하게 대면하고 있었다. 스무 살이 넘으면 그런 소설에 담긴 고민들 자체가 유치해 보이는 것이 정신이 성숙해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상은 우리에게 그 과제를 해결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21쪽

내 주변의 20대 좌파들은 정말로 사교성이 없다. 사교성이 없어서 좌파가 된 건지 좌파질을 하다 보니까 사교성이 사라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그러한 조류는 운동권 바깥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거다. 그들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일종의 우울증이었다. 동년배에게서 공통의 화제를 찾거나 지적 자극을 받는 일을 포기한 그들은 각자의 환경에서 원자화된 개인으로 전락한 채 그로부터 파생되는 우울함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40쪽

부르주아들이 '문화 자본'을 획득하는 것은 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돈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 가치 또한 소유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을 '허영'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그렇다고 치자.
문제의 핵심은 우리 사회의 부르주아들이 그런 '허영'에 쉬이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없는 이들에게 문화 자본을 자랑하는 법이 없고 돈과 상관이 없는 일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자신이 성공한 이유는 남들을 철두철미하게 잘 쥐어짰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재능'이나 '능력'이라는 수사로 포장한다. 천박함이 재능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없는 이들은 이 재능이 없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결국 계급 체계를 정당화하게 되는 문화적 차이'라는 부르디외의 논의는 한국 실정에서는 고급문화에 대한 감수성이 아니라 어떤 천박함을 지칭한다. 그러니 슬프고 우스꽝스럽게도 남는 건 학벌과 영어밖에 없는 것이다.-76~77쪽

부모님 세대는 사회 내에서 자신의 계층이 상승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 자체가 상승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사회는 올라가는 중이었다. 아이를 낳아야 한단 사실에 의문을 품은 바도 없지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의 삶이 나보다 더 나을 거란 것도 그들에겐 명약관화한 진실이었다. 실제로 어르신들을 만나보면 그렇게 부유하지 않은 분들도 '얼마나 세상이 좋아졌냐'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하지만 이 세대가 세계에 대해 가지는 '느낌'은 그와는 정반대다. 그들은 청소년기와 청년기 초반에 그들이 누렸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들 부모님 세대가 그들보다 훨씬 고생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엄청난 요행이 생기지 않는 한 자신의 평생 기대소득이 부모에게 미칠 수 없음을 '안다'.-133쪽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예술가나 운동권들의 정신 건강이 회사원에 비해 얼마나 황폐한 수준인지도 알고 있고, 그들이 '예술성'이나 '진보성'같은 어휘들을 그 황폐함을 가리기 위해 어떻게 활용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정신 건강은 연봉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지는 않지만 대체로 '양의 상관관계'를 지닌다. 예술계와 사회운동 진영의 현실은 일반 사기업보다 훨씬 더 황폐하기 때문에, 거기서 살아남는 중인 이들의 감성이 자본주의의 다른 영역에서 살아남는 중인 이들의 감성보다 나을 리가 없는 것이다.-158쪽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창의성을 말살하는 값싸고 질 나쁜 공교육'을 그대로 받아내고 세상에 나오는 것만큼 급진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나는 그걸 견뎌낼 수 없는 이들이 있고, 그런 이들에게 그걸 감내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공교육에서 밀려난 이들의 경우 부모가 유학을 보내주거나 대안학교에 보내줄 자본이 없을 때 그저 검정고시를 치게 된다. 또한 '값싸고 질 나쁜 공교육'에 대한 비판은 다분히 시장주의적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공교육 체제의 교사는 경쟁을 모르고 교육 시장 '소비자'들의 수요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대안은 쉽사리 사교육을 향해 치닫는다.-199~200쪽

운동권 바닥에서 발언권을 가지려 해도 명문대를 가야 하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주변부에서 '그럭저럭 살 만한 진지'를 구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이 가능할 수는 있는데, 심지어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학벌 등 중심부에서 '먹어주는' 자원을 하나 정도는 가져야 한다. 이래서야 그걸 주변부라고 볼 수 있겠는가?-201쪽

하지만 사실 지금의 청년층은 미계몽되었다기보다는 과계몽된 상태다. 그들은 '부모 세대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을 운동으로도 반전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 이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 지식인의 조언은 상당히 기괴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말한다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사춘기'에 가능했던 저항의 형식을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체제는 68세대나 386세대와 같은 '그 청춘들'이 다시 등장한다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을 살 수 없다면 부모 부동산을 물려받으려 하고, 얼마 안 되는 일자리 안에 나만은 포함되겠다고 판단하는 것이 청년 세대다. 이런 모든 주체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일자리 만들기'는 한계에 부딪혔으니 '일자리 나누기'를 사유하자는 고민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233~234쪽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동의하는 바도 아니고 정상성이 모든 이에게 강요되는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상성이라는 폭력에 반대한다는 것과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택화고 싶을 그 선택지로 가는 길에 '좁은 문'이 놓여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어떤 이들은 태준식감독의 쌍용자동차 파업을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 전쟁>에 나오는 그 해고자들이 무쏘를 몰고 다니는 모습을 통해 추측되는 파업 이전의 '정상적인 삶'을 경외하고 동경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상적으로 월급 받으며 정상적으로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것만큼 경외와 동경의 대상이 되는 일은 따로 없다. 그것을 애초에 포기했거나 유예하자고 생각한 이들에게, '정상적인 삶'과 해고 이후의 '피폐한 삶'의 엄청난 낙차를 제시하는 운동 전략은 공감과 위화감을 발생시킨다.-250쪽

학생운동권, 혹은 학생정치 조직에서 20대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부족하기 때문만은아니다. 평균적인 20대들이 정치적인 접근이나 연대를 통한 문제 해결방식에 대해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집단이나 어떤 연대의식이 특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가치 지향을 품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이 인식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조직 가입을 권유한다는 것은 곱셈의 효용성을 의심하는 이에게 인수분해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학생운동 조직이 '88만원 세대'의 미래에 돌파구를 가져오리라는 희망이 들지 않는 이유이다.-266~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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