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구판절판


아이들의 몸엔 언제나 벌레가 있었다. 그것들을 쫓아 버리기 위해 셔츠 안쪽, 배꼽 부근에 마늘을 채운 조그만 주머니 하나를 꿰매어 달아주곤 했다. 겨울철엔 귓구멍을 솜으로 틀어막았다. 난 프루스트나 모리아크를 읽을 때면, 이 작품들이 내 아버지가 아이였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버지의 환경은 중세였던 것이다.-26쪽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꼭 필요한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었다. <저 사람들이 항상 저렇진 않았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런 꼴이 되어 버렸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축제와 자유의 장소를 제공한다는 의식 말이다. 물론 거기에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 사람들에겐 이곳이 끝장난 주정뱅이들이나 드나드는 <목로주점>에 불과했지만.-56쪽

그리고 모든 말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들이나 내 말들 가운데에서, 선망과 비교를 의심한다. 내가 <어떤 애가 루아르 강변의 고성을 구경 갔대>라고 말할라치면, 그들은 곧바로 화를 내면서 <너도 나중에 얼마든지 거기 갈 수 있어! 네가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지!>라고 쏘아붙인다. 항상 느껴지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결핍감.
그건 욕망을 위한 욕망이었을 뿐이다. 왜냐면 사실은 무엇이 아름다운지, 아니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61~62쪽

아버지는 뭔가 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는 소심해지고 뻣뻣이 굳어져서 상대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요컨대 똑똑하게 처신했다. 이 경우 <똑똑함>이란 우리의 열등함을 인식하되, 이 열등함을 최대한 숨김으로써 거부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교장 선생님이 <이 배역을 위해 따님은 정장을 하고 나오면 될 거예요>라고 한 말의 뜻을 알아내려고 저녁 내내 끙끙거렸다. 만일 우리가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열등하지 않다면 분명히 알았을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창피했다.-64쪽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예절 바르게 대하는 모습은 내게는 오랫동안 신비로 남아 있었다. 또 나는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들이 간단한 인사말을 건넬 때에도 극히 부드러운 어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어조의 인사말을 듣게 되면 부끄러웠다. 난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내게 어떤 특별한 호의를 품고 있다고 상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결국 알아차리게 되었다. 몹시 관심 있는 듯한 태도로 질문을 하거나, 이렇게 따뜻하게 미소 짓는 것은 입을 다물고 식사를 하거나 살그머니 코를 푸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78~79쪽

난 런던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아버지는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추상적인 애정으로 환원되었다.-99쪽

상차림은 고민의 근원이었다. <주느비에브 양은 토마토를 좋아하나?> 한마디로 그는 최선을 다했다. 내가 이 친구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거기서 난 내 존재로 인해 조금도 바뀌지 않는 그들의 생활 방식을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었다. 외부인의 시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세계, 난 내 세계의 방식들과 생각들, 취향들을 잊어버렸기에 내게 열리게 된 그들의 세계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아버지는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저 일상적인 방문에 불과했을 것에 특별한 축제의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내 친구들에게 경의를 표했고, 세상 예절을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예를 들어 특히 <안녕하세요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신다요?>같은 말로써, 내 친구들이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어떤 열등성을 드러내곤 했다.

어느 날 그는 자랑스러운 시선으로 이렇게 말했다. <난 널 한 번도 창피하게 만든 적이 없다.>-104~105쪽

내가 미끄러져 들어간 이 세계의 반쪽에서 다른 반쪽 세계는 하나의 배경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내게 편지를 보내 희미하게 우리가 원하면 집에 와서 쉬어도 괜찮다고 알렸지만, 대놓고 당신들을 보러 오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난 집에 혼자 가곤 했는데, 그들의 사위가 오지 않는 진정한 이유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그와 내가 피차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 그리고 내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이유였다. 식구 대부분이 고학력자이며 대화 중에 끊임없이 <아이러니>를 구사하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가 어떻게 이 순박한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서 즐거울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치 있는 대화의 부재>라는 이 본질적인 결함을 보상할 수는 없었다.-108쪽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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